검푸른 바다너머 by 디키 Homepage : http://www.saibi.lil.to/ 세상에는 정말 우연 같은 운명도 있다. 스쳐 지나듯 우연히 마주친 순간, 저절로 발걸음이 멈추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Sympathy 운명의 Sympathy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의 어느 날. 나뉘었던 두 개의 운명이 하나가 된다. 아직은 작은 새싹으로 존재할 뿐인 작고 작은 운명의 Sympathy · · · · · 잠이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손목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 때문에 저절로 눈이 뜨였다. 그 순간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가 신경을 자극했다. 대체 뭐야?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몽롱한 시선을 손목으로 옮기자 왼쪽 손목이 칼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갈라져 있었고 그 상처에서 피가 떨어져 내렸다. 혈관이 손상되기라도 했는지 피가 떨어지는 게 장난이 아니다.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급한 대로 오른손으로 왼 손목을 꽉 잡았다. 우선은 출혈을 막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형을 불렀다. 형이 옆방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흘끔 시계를 보니 1시 10분. 잠든 지 4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제기랄. 오늘 잠은 다 잤군. " 무슨 일이야?" 형이 방문을 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 피 냄새가 진동을 하겠지. 침대에 떨어진 피만 해도 엄청나니까. 아아, 어지럽다. " 도현아, 너 설마....?" 형이 경악한 얼굴로 내 손목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 내가 미쳤어? 자살 같은 걸 하게?"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 그럼....?" " 나도 몰라.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자 현기증이 더 심해졌다. 아아, 미치겠네. 몸이 저절로 허물어진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씩씩거리며 형을 쳐다보자 그제서야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책상 위에 있는 내 핸드폰을 집더니 119를 누른다. 형이 집 주소를 부르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데 사람들은 왜 자살 같은 걸 하려고 하지? 기왕 태어났는데 제대로 살다가 죽어야지, 읽어야 할 책도 산더미 같고 해야 할 일도 태산같은데, 미쳤지. 구급차가 도착했는지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잠들었던 누나와 부모님이 깨어나서 무슨 소란인지 묻는 소리도 들렸다. 눈을 뜨기도 귀찮아서 가만히 있자 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 괜찮냐. 도현아?"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형 성격상 분명 주변에 내가 자살에 쓴 도구를 떨어트렸는지 찾아봤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벌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뜨자 구급대원들이 들어왔다. 그 뒤로 놀란 얼굴의 누나와 창백해진 어머니와 벙찐 얼굴의 아버지가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 뻔했지만 지금은 대답할 기운도 없다. 구급대원들이 급하게 지혈을 하고 왼손을 단단히 테이핑 하고서 간이 침대에 눕혔다. 피를 너무 흘렸는지 힘이 없어서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가 뭔가 중얼거리며 비틀거리고 아버지가 부축하는 것이 보였다. " 형만 따라와. 누나는 부모님 좀 진정시켜 드리고.... 말해 두지만 이거 내가 한 거 아니야." 힘이 없어서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채현 누나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겉옷을 들고 구급요원들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와 구급차에 탔다. 하아. 이런 식으로 구급차를 타게 되다니. 적어도 교통사고 같은 게 일어나지 않는 이상 병원 신세 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계속 현기증이 일어나 눈이 감겼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구급차 뒷문이 열리고 침대가 옮겨지고 고정되는 동안 자기 전에 보고 있던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떠올렸다. " 도현아, 괜찮을 거야. 힘내." 형이 옆에서 계속 말을 걸었지만 시끄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병원에 도착했는지 차의 진동이 멈췄다. 뒷문이 열리고 밤 공기가 얼굴을 식혔다.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지 너무 춥다. 이동 침대에 몸이 눕혀지고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침대가 움직이며 천장에 달린 조명이 어지럽게 점멸했다. " 보호자는 이쪽에서 수속을 밟아주세요." 응급실인지 수술실인지로 옮겨졌다. 눈앞에 영화에서 많이 보이던 둥근 조명등이 보이고 간호원의 얼굴과 마스크를 쓴 의사의 얼굴이 조명을 가리며 끼어 들었다. " 편하게 숨쉬시고, 잠시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에요." 오른쪽 팔에 주사바늘이 파고든 것 같았다. 간호원이 또 다시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았지만 시야가 가물거리더니 곧 검게 변했다. · · · · · " 미안해....." 이것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사과의 말이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는 살아갈 의지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 삶에, 내게 주어진 시련에 맞서서 살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편하게 눈을 감고 싶다.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지독한 피 냄새 덕분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이제 희미한 뜨거움으로 밖에 남지 않았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지쳐서 잠이 들어버리면 끝나는 것이겠지. 이 몸 속에 흐르는 더러운 피 같은 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가서. 최후의 순간에는 정화되는 것이겠지. 신의 품으로 돌아가 밝은 빛 속에서 안온하게 잠들 수 있겠지. 현실의 괴로움 같은 것은 모두 던져버리고 언제나 꿈속에 잠긴 것처럼 그렇게 몽롱하고 따뜻하게. " 죽으려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던 몸이 저절로 경련을 일으켰다. " 그렇게 쉽게 널 놓아줄 것 같아? 넌 자유로워질 수 없어. 아직 더 고통받아야 해."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마치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그 말속에 담긴 것은 차가운 증오. 저 목소리에서 도망치고 싶다. 차가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저 얼음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지 않는 곳으로. 이젠....제발 나를 놓아줘..... 입술을 움직였지만 미미하게 떨릴 뿐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 넌 벗어날 수 없어. 영원히." 선고를 내리는 듯한 목소리가 낮게 귓가에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긴 손가락이 왼쪽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Part 1. Reflection " 제가 찾아봤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니까요." " 그럴 리가 있니?" "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도현이 성격에 실수로라도 그런 일을 벌이겠어요?" " 맞아요. 엄마. 실려나가면서도 저한테 부모님 잘 돌보라는 말까지 했어요. 평소랑 똑같았다구요." " 하지만, 그 앤 내 자식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아." " 믿기 어렵지만 도현이 방에서는 칼 비슷한 것도 안 나왔어요. 의사 설명 들으셨잖아요. 칼을 많이 다뤄본 사람이 망설임 없이 그어 내린 것 같은 자국이었다고. 다른 건 몰라도 도현인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해요.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잘 알고 있고 자기 입장도 잘 안다구요." " 지금 중요한 건 도현이가 빨리 낫기를 바라는 거지 추궁하는 게 아니잖아요. 진정하시고 정 궁금하시면 도현이가 깨어나면 물어보세요." 기현은 어젯밤 수술을 마치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동생 도현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른쪽 손에는 링거가 꽂혀있었고 왼쪽 손목은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족한 피를 보충하기 위해 혈액팩이 투여됐지만 어머니가 오기 바로 전에 링거액으로 교체되었다. 만약 도현이 수혈 받고 있는 장면을 봤다면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했을 지도 몰랐다. 도현의 자살 소동에 놀란 어머니는 밤새 안절부절 하다가 아침 식사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병원으로 달려온 것이다. 회사 일을 두분 다 빠질 수가 없어서 아버지는 회사로 갔고 기현은 오늘 오전에 회사에 미리 연락을 해두었다. 국내에서 1위를 달리는 게임 회사의 사장인 기현이었지만 가족의 일을 내팽개칠 정도로 일에만 매달려 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도현을 어려워하기는 하지만 어머니 역시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도현이는 언제 깨어나는 거니? 어디 잘못된 곳은 없는 거야?" " 피를 좀 많이 흘려서 그래요. 위험한 상황은 넘겼다고 했으니 문제없을 거에요." " 그래도 얼굴이 저렇게나 창백한데...." 기현은 한숨을 쉬며 마음속으로 한탄했다. 이럴 때보면 어머니는 지나치게 도현을 편애하는 것처럼 보였다. 천재였지만 도현은 아직 17살이었고 첫째인 기현이나 둘째인 채현과도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 막내에 대한 사랑이 큰 것은 알겠지만 좀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소 도현이 뭔가 말을 하거나 하면 어려워하던 어머니가 도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이렇게나 극성맞은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조금 착잡했다. " .......시끄러워요." 침대 쪽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도현아?" 기현이 동생의 이름을 부르자 겨우 눈을 뜬 도현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난 환자라고! 보살펴주지는 못할망정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는 거야?" 갈라지고 낮은 음성이었지만 평소의 도현이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오지 않자 화가 나는지 얼굴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 물이나 좀 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로웠지만 도현이 정신을 차린 것을 알고 어머니를 비롯해 기현과 채현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냉장고 가까이에 있던 채현이 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기현이 도현을 부축해 일으켜 주자 채현이 컵을 건넸다. 물을 반정도 마시고 나서 도현은 컵에서 입을 떼고 컵을 기현에게 건넸다. 그리고 나서 도현은 천천히 어머니와 기현 그리고 채현의 얼굴을 둘러보더니 자신의 손목으로 시선을 내렸다. " 정말 짜증나네. 누군지 몰라도 왜 남의 몸에 흠집을 내고 난리야. 기가 막혀서..." 손목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는 도현의 목소리에 세 명의 가족들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도현다운 태도와 말투였지만 상황이 약간 빗나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이 시간이었으면 벌써 번역 1권을 끝냈을 텐데....대체...." 도현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조용히 그것을 듣고 있던 나머지 세 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현이 깨어나면 뭔가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어머니 역시 도현의 기세에 눌려 아예 입을 열지 못했다. " 도현아, 어떻게 된 건지 기억나?" " 형, 바보야? 내 방에서 말했잖아. 그리고 형 성격에 내방 다 뒤졌을 텐데 뭐라도 나왔어?" 따지는 듯한 도현의 말에 기현은 수긍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도현이 원래 냉소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말투가 상당히 날카롭다는 것도 알지만 걱정해주고 있는데도 한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솔직히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 귀신같은 건 안 믿지만, 정말 귀신이 장난 친 것 같아. 아니면 카마이타치?" 도현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내자 그 말을 알아들은 기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채현과 어머니는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카마이타치? 그게 뭔데?" 채현이 묻자 도현이 설명조로 말을 꺼냈다. "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날카롭게 베인 자국이 생기는 걸 뜻하는 일본어야. 너구리를 영물로 생각하는 일본사람들은 너구리의 짓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다른 때라면 냉랭한 어조로 일관했을 도현도 모르는 것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줄 때만큼은 진지해진다. 몇 번이나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할 때는 다시 냉소적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유능한 선생이 되는 것이다. " 도현아. 그러면 정말 굿이라도 해야하는 거 아니야?" 채현이 진지하게 말을 걸자 도현은 핏하고 코웃음을 쳤다. " 굿은 무슨 굿이야. 누나. 난 그런 거 안 믿어." 가족 전체가 무교인 것은 사실이지만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와 만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한다. 평소에 아무리 그것을 무시했다고 해도 비상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 됐어. 생피를 잔뜩 흘리긴 했지만 금방 낫겠지. 다들 바쁠 텐데 왜 계속 여기 있어?" 그렇게 말하며 도현의 시선이 어머니에게 가서 닿았다. " 어머니도 회사 나가보세요. 아버지한테 저 괜찮다고 말도 전해 주시고요." " 그, 그래. 도현아." 뭔가 하고싶은 말이 참 많은 얼굴이었지만 어머니인 채현진씨는 결국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채현은 한 명쯤은 간병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남아있겠다고 우겼고 그녀가 뜻을 굽히지 않자 도현도 피곤한 얼굴로 승낙했다. 기현과 어머니가 병실을 빠져나가고 나자 병실 안에는 도현과 채현만이 남았다. 부모님 모두 사업가이고 형은 게임 회사의 사장, 누나인 채현은 사법고시를 준비중인 엘리트. 그리고 도현은 언어의 천재로 도현의 가족 모두가 벌어들이는 돈은 상당했다. 도현이 혼자 번 돈만으로도 현재 머물고 있는 특실의 병원비를 가뿐하게 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도현은 자신이 번 돈은 함부로 쓰지 않는다. " 뭐야? 궁금한 거 있어?" 도현을 간호하겠다며 병실에 남은 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도현은 누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 여긴 특실이야. 간호할 사람이 필요할 리가 없잖아.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누나가 남아있을 이유가 있어? 누나도 어서 돌아가. 시험도 얼마 안 남았잖아. 어머니 있는 자리에서야 간병인이 남아있는 게 마음이 편할 테니까 허락했지만 누나 뭔가 궁금한 게 있어서 남은 거지?" 이어진 도현의 말에 채현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7살이나 어린 동생은 도저히 그 나이 또래의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이 머리도 좋고 사업 수완이 뛰어난 분이고 장남인 기현이나 채현 역시 어디 나가서 수재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집안에서 도현 같은 천재가 태어났는지는 채현에게 언제나 미스테리로 여겨졌다. 17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세상을 달관한 듯한 태도나, 지나치게 냉소적인 말투와 표정. 채현은 빈말로도 도현에게 귀여운 동생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 뭐야? 누나, 말 안 할 거면 그냥 돌아가. 나 피곤해." " 설마 네가 손목을 그었으리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 100%야." 채현은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 하지만 상식적으로 자다가 갑자기 손목을 칼로 난자 당해서 병원에 실려온다는 건 좀 그렇지 않니?" " 말은 바로 해. 누나. 난자 당한 게 아니라 그냥 좀 베인 것 뿐이야. 그리고 세상엔 상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충분히 있는 법이야." " 그건 그렇지만." " 그래서 누나가 하고싶은 말이 뭔데? 사실은 내가 손목 그은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거야?" 도현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자 채현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도현아. 네가 실제로 스스로 자살시도를 했다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 가족들은 믿지 않을 거야. 네 성격을 잘 아니까." " 그런 누나가 왜 그런 말을 해? 오랜만에 내가 누워있으니까 스트레스 받게 하려고? 지금 제일 황당한 건 나야. 정말 자다가 벼락맞은 기분이야." " 미안해, 지금 피곤할 텐데 괜히 이런 말을 꺼내서." 채현이 곤란한 얼굴로 사과하자 도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내가 너무 예민해져 있는 것뿐이니까 누나도 어서 가서 공부라도 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도현이 눈을 감아버리자 채현은 동생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 정말 아무도 없어도 괜찮겠어?" " 혼자 있는 게 편해. 지금 왼쪽 손목을 못쓰긴 하지만 금방 나을 테니까 상관없어. 지금 난 그저 잠을 자고싶을 뿐이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너스콜을 할 테니까 누나는 걱정하지마." " 알았어." 결국 도현의 말에 못 이겨 채현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채현이 병실에서 빠져나가자 병실은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도현은 그제서야 눈을 떴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본의 아니게 소리를 지른 탓에 어지러움도 상당했지만 도현은 지금 도저히 잘 기분이 아니었다. 누나에게는 세상에는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도현이 그 말을 가장 믿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도현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자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최악의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정말 최선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도현은 한 번 태어난 이상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끝까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살에 관한 생각이야 그렇다 쳐도 자다가 갑자기 생살이 갈라지는 경험을 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에 출연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도현의 가족이야 도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 아니라고 말한다면 믿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과연 이런 상처를 보고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가 분명하다. 도현은 저절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살다보면 별의 별 일을 다 겪게 된다지만, 이런 일은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앞으로 며칠간은 입원을 해야 할 텐데, 아직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불미스러운 일로 결석을 한다는 것은 도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현기증만 사라지면 퇴원한다고 해야지....." 중얼거리며 도현은 멀쩡한 오른손으로 눈을 가렸다. ----- 병결로 이틀을 결석하고 나서 다시 학교에 나갔을 때, 반장인 희원이 손을 들고 도현을 반겼다. " 병원에 입원했었다면서?" " 아. 응." 도현은 잠시 두꺼운 붕대에 감싸인 왼손을 내려다보고 대답했다. 학교에 가서 의심 사지 않으려면 깁스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누나의 제안을 거절하고, 손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붕대로만 감싼 채 학교에 나왔다. " 뭐야, 한껀 했냐?" 희원은 도현의 왼손에 감긴 붕대를 흘긋 쳐다보더니 가볍게 말했다. " 미쳤냐?" 도현이 차가운 어조로 쏘아붙이자, 희원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 농담, 농담." " 그냥 사고였으니까, 빨리 잊어야지." 도현은 시큰둥하게 말하고 나서 책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 책상 서랍에 넣었다. 아직 실밥도 풀지 않은 상태여서 약간이라도 충격을 받으면 상당히 아팠지만, 겨우 이런 문제로 일상 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도현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머리 속으로 정한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그 시간까지도 거의 정확하게 정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정해놓은 것에서 어긋난 일이 생기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이틀 동안 병원에서 시간을 보낸 관계로 맡았던 번역 일에 차질이 생길 지도 모른다. 잠을 줄이고 여가 시간을 조금 줄이면 그 정도는 충분히 만회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정해진 대로 보내던 일상에 약간의 잡음이 끼여든 것은 불쾌했다. " 오늘 학교 끝나고 놀러갈 건데 같이 갈래?" 희원은 활발하고 말도 잘 하고 공부도 상위권을 유지하는 괜찮은 녀석이다. 반장이 된 것도 입학 초부터 워낙 성격이 좋아 급우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덕분이었다. 고등학생씩이나 되어서 반장이 되지 못해 안달을 하는 녀석도 물론 없었지만. " 오늘은 패스. 뜻밖의 사고 때문에 당분간은 집에 일찍 들어 가야돼." " 그럼 할 수 없지." 희원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지만 곧 다른 녀석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도현은 1교시 준비를 위해 시간표대로 책을 꺼내 두고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이틀 동안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이번 일에 대해 생각하며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누군가가 몰래 방에 들어와 말도 안되지만 무슨 원한을 가지고 도현의 손목을 그어버린 거라면 손목을 그어 버리고 나서 다시 모습을 감출 때까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도현의 방은 2층에 있었고, 집에는 SECOM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니 누가 침입해서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것은 정말 만화 같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로 도현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일은 한 적이 없었다. 사실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평범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현의 비범함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범주에 속했다. 바로 천재라는 단어로 말이다. 그러나 천재라고는 해도 도현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다른 17살들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언어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고 그 덕분에 천재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것은 언어에 국한된 것이었다. 다른 암기 과목은 상위권 정도였고, 수학은 중간 정도, 체육도 보통. 가족들 자체가 모두 수재 정도는 되는 범주에 속해서 특별하게 태교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현이 천재로 태어난 것도 사실 지나칠 정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형인 기현은 30살도 넘지 않았는데 지금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게임 회사의 사장이다. 부모님도 성공한 부부사업가에 누나 역시 사법고시를 준비중이니 가족 모두가 비범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도현이 가장 튀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지만 그런 가족 사항이나 도현의 특기사항을 다 떠나서 이번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는 도저히 알아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초자연현상이나 초능력 같은 건 믿지 않는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자살이라도 하듯이 손목이 그어졌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손목이 갈라질 때의 그 섬뜩하고 선명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잠 속에 빠져있었지만 그 차가운 감각은,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은 저 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의식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코끝을 자극하던 자신의 피 냄새와 너무 선명한 붉은 색. 인간의 몸 속에 어느 정도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마치 수도관이라도 끊어진 것처럼 쉴 새 없이 흐르던 피를 떠올리면 지금도 섬뜩했다. 겉으로는 벌써 잊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학교에도 나왔지만, 쉽게 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분명 이 흉터가 손목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볼 때마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리겠지. 천재라고 불리며 타인들의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에 노출되는 것도 사양이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연루되는 것 역시 사양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일을 잊을 수 있도록 일상 생활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경험도 잊혀질 것이다. 도현은 교과서를 넘기며 글자를 억지로 읽었다. 학교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가방을 내려놓고 교복을 벗은 후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간단하게 씻고 나서 부엌으로 내려가자 식탁 위에 간단한 볶음밥이 놓여 있었다. 보통 때라면 도현이 집에 있는 재료로 그 정도는 해서 먹었겠지만 지금은 팔을 움직이기가 힘들기 때문에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랩으로 덮여 있는 접시 오른쪽 식탁유리 위에는 깔끔한 글자의 메모가 놓여 있었다. 「 도현아, 시간이 없어서 볶음밥으로 준비해놨어. 마음에 안 들더라도 먹어.」 누나인 채현의 글씨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누나는 확실히 도현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도현은 볶음밥이 담긴 접시를 전자 렌지에 넣은 후 데우기를 누르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오른손잡이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손목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꽤 고생을 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리 편하지는 않지만 도현은 적어도 다친 것이 왼손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전자 렌지가 가동을 멈췄다. 도현은 전자 렌지 위에 있는 장갑을 끼고 접시를 꺼낸 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숟가락을 꺼내 들고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볶음밥을 맛보았다. 있는 재료로 만든 것이지만 누나의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한참 자랄 때여서 인지, 아니면 며칠 전에 잔뜩 피를 흘려서 인지 도현은 볶음밥 한 접시를 금새 비워 버리고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한잔을 가득 따라 마셨다. 식사도 마쳤으니 이제 번역을 해야 한다. 현재 맡은 일은 국내에 발매되고 있는 외국 서적의 번역이었다. 일본어로 된 소설책과 영국 작가의 글쓰기에 관한 책. 그 외에도 꽤 여러 나라의 책들을 맡아서 번역하는 것이 도현의 일이었지만, 이번 달 중순까지 번역을 마쳐야 하는 것은 두 권이었다. 언어에 있어서 도현은 천부적인 감각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면, 언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해야하는 지도 모른다. 보통 하나의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언어 역시 그 감각 덕분에 쉽게 익힌다고 한다. 그런데 도현이 가지고 있는 그 언어 감각이라는 것이 외국어에도 마치 모국어처럼 작용하는 점이 도현을 천재라 불리게 만들었다. 현재 도현이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는 모두 12개. 그 외에도 상당히 여러 나라의 언어를 익히고 있었다. 도현의 그런 특징이 알려지자 상당히 여러 곳에서 연락이 들어왔지만 도현의 부모님은 어린아이를 언론의 흥미 거리로 내보내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덕분에 도현은 보통 아이처럼 자랐다. 보통 아이와 달리 어릴 때부터 몇 개 국어를 구사하고 혼자서 공부를 하거나 학원에 다녀 외국어를 익힌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할까. 학교에는 도현이 부모님의 사업 때문에 외국에서 몇 년씩 지내다 온 탓에 영어와 일본어등을 잘 한다고 이야기해 두었다. 친구들도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가진 약간 다른 재능을 떠벌리고 다니거나 그것을 자랑한 적은 없었다. 도현의 책상 위에는 수십 개에 달하는 외국어 사전이 죽 늘어서 있었고, 의뢰 받은 책 두권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아무리 언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우리말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는 것처럼 외국어 역시 그렇다. 게다가 도현은 알고 있는 단어라도 의심이 생기면 다시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책상 위와 책장에 꽂힌 사전의 개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번역하던 파일을 불러낸 후 도현은 원본 책을 펴들었다. 왼손이 불편한 관계로 번역해서 타자를 치는 데에도 평소의 두 배는 시간이 걸렸지만 도현은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도현아." 살짝 문이 열리고 장신의 인물이 들어섰다. " 어, 형." "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젊어도 쉴 때는 쉬는 게 좋아." " 이 정도는 무리도 아니니까, 상관없어." 도현은 책상 위에 책을 올려두고 의자를 빙 돌렸다. 아직 양복 차림인 형 기현이 도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뭔데?" " 이번 주말 일본에서 게임 박람회가 열리는데 통역으로 가 줄 수 있겠어?" " 토요일 아침 비행기인가...?" 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이번 주 토요일은 CA니까 형이 학교 쪽에 서류나 보내 줘." " 매번 고맙다." 기현은 미소지었다. 기현은 도현과 형제답게 닮은 얼굴이었지만 도현 쪽이 동양인치고 상당히 흰 어머니의 피부를 이어받은 대신 기현은 아버지를 닮아 건강해 보이는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키도 185로 크고 몸도 평소 헬스로 잘 가꿔두어서 남자가 보기에도 잘생기고 멋진 남자라는 인상을 풍겼다. 도현은 얼굴형이나 눈은 기현과 비슷했지만 피부색이나 분위기 때문인지 남자라는 느낌보다는 소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 손은 좀 어때?" 기현은 평소보다 훨씬 창백해 보이는 동생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피부가 흰 편인 탓에 보통 때에도 그렇게 건강해 보이지 않는 동생이었지만, 이틀 전의 그 일로 인해 지금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하게 느껴졌다. " 괜찮아. 나도 꽤 튼튼하잖아. 남들이 괜히 병약해 보인다고 착각하는 거지." 도현은 다친 왼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 일본에서 열리는 거면 꽤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오겠네. 형쪽은 예의 신작인거지?" " 네가 통역으로 가주면 별다른 설명도 필요 없고 알아서 잘 해주니까 정말 좋아. 내가 동생 하나는 잘 뒀다니까." 밖에서는 28세의 젊고 유망한 사장님이지만 집에서는 형의 얼굴로 돌아오는 기현은 웃음 띈 얼굴로 대답하고는 동생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흩트려 놓았다. " 그럼 나는 이만 씻으러 간다." " 응." 기현이 문을 닫고 나가자 도현 역시 잠시 멈췄던 번역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 일본에 가야 하니 지금 번역을 많이 해 두는 것이 좋다. 사실 그 일을 당한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움직이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닐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사실보다도 이상한 사건을 잊을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분명 기현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도현에게 통역 제의를 한 것이 분명하다. 피를 이은 가족이지만 형이나 누나, 부모님들이 도현을 약간 어려워한다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보통과 다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곧잘 거부감을 일으킨다. 형이나 누나는 부모님에 비해 그런 요소가 적었지만 그래도 도현을 마냥 동생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현 역시 가족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가족이라고 해도 자신 역시 한 개체인 이상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정해진 범위 내에서 서로에게 맞추며 살아가는 것. 도현은 그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토요일 오전 8시, 인천 국제공항. 도현은 기현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함께 공항에 들어섰다. 티켓팅을 끝낸 후 입국 수속을 하기 전 도현과 기현은 나란히 공항 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일찍 나오느라 하지 못한 식사를 위해서였다. 게임 박람회 관련으로 기현의 회사에서 파견된 담당자들은 이미 며칠 전에 일본에서 준비중이었고, 당일인 오늘 통역을 위해 도현만 출발하는 것이다. 사장인 기현도 처음에는 직접 박람회나 게임쇼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국내에서 회사 일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기 때문에 도현을 데려다 주기 위해 공항에만 함께 들어왔다. 산채 비빔밥을 시켜 놓고 먹으며 기현과 도현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게임 박람회는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동경 빅사이트에서 열린다. 개관 시간이 11시이기 때문에 9시 30분에 비행기가 출발하면 빅사이트에 도착하는 시간은 빠듯하다. 그러나 현지에도 물론 통역이 있으니 도현이 약간 늦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 말 안해도 잘 해주리라 믿는다." 식사를 마친 후 도현이 출국 수속을 위해 간단한 짐가방을 들고 들어갈 때 기현은 인사를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 돌아오면 한 턱 쏴. 형. 오랜만에 랍스타가 먹고 싶어졌어." " 그래." 미소지으며 전송하는 형을 뒤로하고 도현은 짐가방을 검색대 위에 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현은 아직 같은 자리에 서서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 여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헌칠한 키와 눈에 띄는 용모를 가진 형을 도현은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검색대를 지나쳐 면세점이 잔뜩 늘어서 있는 탑승 대기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도현은 다시 한번 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9시가 되자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었다. JAS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앉아 일본 신문 하나를 펴들고 도현은 내용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내용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곧 이륙하겠으니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안내 방송이 몇 개국어로 흘러나왔다. 도현은 허리에 안전벨트를 매고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 가지 주의 사항과 항공사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들을 귓가로 흘려보내고 있는 사이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간의 거북한 느낌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했다. 귀가 약간 멍멍해졌기 때문에 도현은 펼치고 있던 신문을 접어서 앞쪽에 꽂았다. 비행기에서 느껴지는 진동 때문인지 왼쪽 손목에서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상처난 손목을 가슴 위로 올리고 도현은 눈을 감았다. 일본은 그리 먼 것도 아니고 형의 일 때문에 많이 방문해서 외국 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나라였다. 같은 동양권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게임쇼나 박람회에는 각국에서 관계자들이 오기 때문에 게임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사업상의 장소가 된다. 기현이 경영하는 게임 회사는 한국에서 몇 년 째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외국에서도 인지도가 있는 기업이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형의 일을 어릴 때부터 옆에서 지켜봐 온 덕분에 도현은 기현의 직원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져 있었고 인정받고 있었다. 비행을 시작한 지 40분 정도가 되었을 무렵, 기내식 준비를 위해 승무원들이 옷을 바꿔 입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 일본인이라기에는 상당히 큰 키의 늘씬한 여자 승무원들이 미소짓는 얼굴로 좌석을 돌아다니며 어떤 음료를 마실 것인지 묻고 있었다. 도현의 앞에도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승무원이 다가와 일본어로 물었다. 사과 주스를 고르자 여승무원이 환하게 웃으며 주스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얼음이 담긴 시원한 주스를 마시며 도현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선명하게 푸른 하늘과 그 위를 떠다니는 구름 덩어리가 하늘 가득 펼쳐져 있었다. 이미 해안선은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창 밖에 시선을 던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비행기가 예고도 없이 흔들렸다. 놀란 사람들이 경악성을 내거나 낮게 투덜거렸다. 퍼스트 클래스에 탑승한 것은 사업가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중년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소란은 크지도 않았고 그리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다. ' 뭐지...?' 비행기에서 느껴진 흔들림이 보통 난기류 때문에 흔들리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도현도 놀랐지만 흔들림은 잠시 후에 멈췄다. 안내 방송으로 난기류 탓에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는 사과 방송이 나왔다. 난기류라기에는 진동이 너무 심했지만 그래도 다시 안정을 찾아 다행이었다. 도현의 상처를 염려해서 일부러 형이 퍼스트 클래스 표까지 사준 마당에 괜한 일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은 왼쪽 손목을 다친 사건으로도 충분했다. 도현은 반쯤 남아있던 주스를 다 마시고 빈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도현은 검은 연기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연기......?' 구름 따위는 아니었다. ' 저건....' 도현이 막 승무원을 부르려고 했을 때, 비행기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흔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사람들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수납되어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 대체...." 갑작스런 흔들림 때문에 앞좌석 시트를 세게 움켜쥐고 있던 도현은 왼쪽 손목에서 느껴지는 시큰한 통증 때문에 눈쌀을 찌푸렸다. 붕대 사이로 피가 약간 배어 나와 있었다. " 젠장..." 그러나 도현의 투덜거림은 비행기에서 나는 굉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몸이 정신없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안전벨트 덕분에 의자에서 구를 염려는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비행기는 확실하게 추락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고 도현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항공사 중에는 고급스럽다고 소문난 JAS에 비행기 테러범이라도 탄 건지 아니면 기체 결함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자신이 탄 비행기가 이런 꼴이라니. 재수가 없는 건지 어떤 건지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기체 결함으로 추락하는 건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안전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로 유명한 곳이 일본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런 도현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펑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무언가 터지는 소리였다. ' 거짓말이지?!!' 그 소리가 들린 직후 비행기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온 몸으로 공포를 느꼈다. 이제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현은 억지로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려고 했지만 무언가가 날아와 이마를 때리는 바람에 앞좌석에 머리를 박았다. 어찔하는 현기증이 일어났다. 또 다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소리도 들렸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승무원들도 바닥에 쓰러져서 기절하거나 정신없이 의자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었다. 그제서야 도현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꿈 따위가 아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며칠 전 손목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그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사람이 죽는 건 정말 한순간이라고 하더니, 예상도 하지 못한 순간에 사고는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죽는 건 말도 안돼, 농담이 아니라고...! 도현은 사색이 된 얼굴로 시트를 꼭 붙잡았다. 형의 말을 거절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라고 순간적으로 생각했지만,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도현이 정신을 잃은 후에도 비행기는 격렬하게 흔들리며 속도를 더해 추락해 갔다. 창문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해수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150여명의 승객을 태운 인천발 나리타행 여객기가 갑작스런 엔진의 폭발로 일본 오키 제도 인근 해안에 추락한 사건이 보도된 것은 오전 10시 45분 경이었다. 그 사고로 50여명의 사망자와 70여명의 중 경상자, 10여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남자는 정신을 잃어버린 소년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창백하게 질려버린 얼굴은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어서 시체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미하게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고 추격한지 반나절만에 소년의 모습을 찾아낸 곳은 영지 최남단에 있는 해변이었다. 두 발로 뛰어서 도망친 것이 겨우 이곳이라니. 그 가엾은 발버둥을 보고는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 말했잖아. 너는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물에 빠져 정신을 잃어버린 듯한 소년은 남자에 의해 해변으로 끌려나왔다. 왼쪽 손목에 감긴 붕대에서는 피가 배어 나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이마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흰 셔츠는 군데군데 찢겨있는 데다 핏물이 묻어 있기도 했고, 검은 색의 바지 역시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남자는 창백한 소년의 얼굴을 한동안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미소지었다. " 두 번 다시 도망칠 생각 따윈 할 수 없게 만들어 주지." 남자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소년의 옆에 앉았다. 신발이 벗겨진 맨발 위에 손을 올리고 나서 남자는 매끈한 다리를 쓰다듬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남자의 손끝은 발목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남자는 정신을 잃어버린 소년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양손으로 오른쪽 발목을 붙잡고 세게 비틀었다. 두둑. 엄청난 악력에 의해 발목뼈가 비틀려 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꺾였다. 소년의 몸이 잠시 경련했지만, 남자는 상관하지 않고 남은 왼쪽 발목 역시 마찬가지로 꺾어 버렸다. 그러나 소년은 깨어나지 않았다. " 더 이상 도망치려 하지마.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아...." 작게 중얼거리며 소년의 이마에 배어난 피를 손으로 닦아내고 나서 남자는 축 늘어진 소년의 몸을 안아 들고 말 위에 올라탔다. 남자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Part 2. twisted 귓가에서 벌떼가 웅웅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무슨 소리인지 귀를 기울이려 했지만,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두드려 맞은 듯이 아프고 상처가 나 있던 왼쪽 팔목은 열을 품기라도 한 것처럼 뜨거웠다. 게다가 양쪽 발목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당히 아팠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점차 엷어졌다. 도현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뜨려고 해도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작은 동작 하나도 너무나 힘겨워서 의지대로 할 수가 없었다. 손끝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피부에 맞닿은 감각으로 지금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살아남은 것 같다. 몸을 못 움직이기는 해도 살아서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이라면 안심이다. 형의 얼굴이 보이면 원망의 말이라도 한마디 해 줘야겠다고 도현은 속으로 마음 편히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무거운 눈을 뜨지 못하고 도현은 다시 잠이 들었고,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워져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둑어둑했다. 건너편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지만 촛불처럼 희미해서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도현은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헉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온 몸이 다 쑤시듯이 아파서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발을 살짝 움직이려 했지만 발목 역시 힘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아파서 신음을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현은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시선을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발목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계속 해서 통증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고 때문에 부러진 것 같았다. 발목과 손목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그래도 멀쩡한 것 같아서 도현은 겨우 안심했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만 하더라도 이대로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도현은 흐릿한 빛에 의지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침대 주변에 드리워진 커튼 때문에 이곳이 어느 병원인지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도현은 문득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그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환자복이 아니었다. 도현은 호텔 등에 비치되어 있는 가운 차림이었다. 도현은 잠시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팔에 링거조차 꽂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발목도 깁스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붕대가 두껍게 감겨 있을 뿐이었고, 팔목에 감긴 붕대 역시 익숙하게 봐 오던 붕대 천이 아니다. 대체 이곳은 어디지....? 도현의 머리 속에 그런 의문이 떠오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병원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병원이 아니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도 나지 않았고, 침대 역시 병원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달랐다. 침대의 모양은 마치 유럽에 있는 중세풍의 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침대 같았다. 다리만 움직일 수 있었어도 당장에 일어나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상체를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살아있다는 것에 기뻐한 것도 잠깐, 이제는 알 수 없는 장소에 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병원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일본도 아니다. 고급 호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통 비행기 사고로 다친 사람을 호텔로 호송하지는 않는다. 대체 그때로부터 얼마나 지난 것일까. 정말로 살아있기는 한 것일까. 도현은 피어오르는 의문 때문에 얼굴을 굳힌 채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분석해 보려고 애썼다. 누군가가 지금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준다면 좋겠지만 시간이 지나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자신이 이런 곳에 있게 된 것인지, 어째서 가족들의 모습이나 의사나 간호원도 보이지 않는지.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희미한 불안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하나 풀리지 않는 의문이 되어 도현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도현은 그렇게 침대에 누워 눈만 뜬 채로 밤을 지새웠다. 몸은 죽도록 피곤했지만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 정도로 도현의 신경은 두껍지 않았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었다. 말소리가 귓가에 닿았을 때 도현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창문 너머로 동이 트고 그 빛이 침대 주위를 감싼 커튼에 드리울 무렵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와 중간 정도 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런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듯이 들리던 그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커튼이 젖혔다. 메이드 같은 차림새를 한 젊은 여자가 눈을 뜨고 있는 도현을 발견하고는 놀란 얼굴로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남자가 뭐라고 대답하며 여자의 옆에 와서 섰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메이드복 차림의 여자와 안경을 쓴 의사처럼 보이는 흰 가운의 남자는 말없이 도현을 쳐다보다가 뭐라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도현은 그 사실에 경악했다. 분명 그들이 하는 말은 영어나 불어 같은 류의 발음이었지만, 도저히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지금 들리는 언어는 도현이 알고 있는 어떤 언어와도 달랐다. 도현의 얼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공포였다. 그런 도현의 표정을 뭐라고 판단했는지 의사로 보이는 남자가 부드럽게 표정을 바꾸며 뭐라고 말을 건넸다.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도현이 한마디도 하지 않자 남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옆에 서 있던 메이드 복장의 여자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어딘가로 가고 나자 남자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침대 옆에 놓고는 거기에 걸터앉았다. 단발보다 조금 더 긴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이지적인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천천히 설명하듯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도현은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다. 사태는 절망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현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도현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발음이나 입 모양을 보고 조금이라도 아는 단어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집중했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록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찾아낼 수 없었다. 도현은 한숨을 내쉬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서 이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반복했다. 도현의 입술 사이로 알지 못하는 언어가 연달아 나오기 시작하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도현은 천천히 정확한 발음으로 25개의 언어로 말했지만 남자는 도현이 꺼낸 말 중에 단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 자신은 꿈을 꾸는 지도 모른다. 도현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아니면 이미 죽어서 사후의 세계에 와 있거나. 지구상에서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세계 공용어라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곳은 없고, 만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영어라는 것쯤은 알텐데, 남자는 경악한 표정으로 도현을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죽었다면 이렇게 몸이 아플 리도 없고, 침대에 고이 모셔져 있을 이유도 없지만, 이곳은 도저히 도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곳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말이 통하지 않아서 곤란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도현의 자만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놀란 얼굴이던 남자는 갑자기 도현에게 빠르게 뭐라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도현이 대답도 하지 않고 알아들은 듯한 눈치도 없자 그는 놀랐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서양사람 치고는 상당히 섬세해 보이는 외모지만 동양인으로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얼굴은 특이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메이드 복장의 여자도 이 남자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도현은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꿈이라면 깨버리고, 죽은 거라면 스스로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 도현의 가장 큰 바램이었다. 리사가 수프를 가지고 방안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라메르 백작가의 주치의인 노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닫고 나왔다. 가주의 동생인 라딘이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사실과 동생에 대한 가주의 집착은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불과 1주일 전에 라딘은 자살을 기도했고 그 상처를 돌본 것은 당연히 노스였다. 하지만 이틀 전 라딘은 백작이 잠시 저택을 비운 틈을 타서 도망쳤고, 그날 오후 동생의 실종을 알아차린 백작의 손에 붙잡혀 되돌아왔다.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는 라딘은 정신을 잃은 데다가 몇 군데 타박상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양쪽 발목의 뼈가 모두 부러져 있었다. 그것은 백작의 손으로 만든 상처였다. 계속 도망치려는 동생을 보다 못해 분노한 백작이 부러트린 것이다. 발목에 난 손자국을 보고 노스는 그 사실을 모두 알았다. 하지만 백작에게 충고할 입장은 되지 못했다. 아무리 10년 이상 알아온 사이라고 해도 라메르 백작가에서 라딘에 대한 일은 모두 금기였다. 그리고 노스는 주치의로서 해야 할 일을 하면 그걸로 의무를 다한 셈이다. 평민인 노스는 백작에게 함부로 충고를 할 입장은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그 벌인가.... 노스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방금 알아차린 사실을 테이드 백작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스는 2층에 있는 백작의 집무실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답을 확인하고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잔뜩 찌푸린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 보고있는 테이드가 보였다. " 백작님." 노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자 그제서야 테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는 상당히 흉폭하게 빛나고 있었다. " 라딘님의 일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 자네는 잠시 나가 있어." 테이드는 곁에서 업무를 돕고 있던 집사를 내보내고 노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 무슨 일이지?" 노스는 자리조차 권하지 않는 테이드를 보며 잠시 쓴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 라딘님께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라딘님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 무슨 소리지?" "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큰 증거로 이곳의 언어조차 잊으셨습니다." 테이드는 그 말의 진의를 확인하듯 미간을 찌푸리며 노스를 노려보았다. "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 저도 처음에는 라딘님이 단지 입을 열고 싶지 않은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 가서 확인해보겠다." 테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걸어가는 테이드의 뒤를 따랐다. 집사인 파드웰 역시 조용히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라딘의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선 테이드는 침대 위에 상체를 일으킨 자세로 앉아 물을 마시고 있는 라딘을 조용히 멈춰선 채 응시했다. 그러나 침묵은 그리 길지 못했다. 라딘이 갑자기 들고 있던 물컵을 내던지고는 반가운 듯한 표정으로 테이드를 향해 말을 걸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테이드를 자진해서 부르거나 반가운 얼굴로 펴다본 적이 없던 라딘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라딘은 테이드를 부르고 있었다. 테이드가 굳어진 얼굴로 침대 근처로 다가가자 라딘은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몸을 돌려 테이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방안에 있던 노스를 비롯해 파드웰과 리사까지 완전히 굳어졌다. 라딘은 테이드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라딘이 테이드를 반기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확실히 형이었다. 표정이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이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히 형이다. 도현은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피를 이은 형제라고 해도 형을 마음속으로부터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알 수 없는 곳에서 형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기쁘고 마음 속 깊이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만은 자신이 처한 입장이나 모든 것을 떠나서 순수하게 17살의 동생으로 되돌아가 형에게 매달리고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현은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분명 부드러운 어조로 뭐라고 말을 건넸을 것이 분명한데 기현은 마치 굳어진 듯이 가만히 서 있을 뿐, 움직이지도 않았고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한 동안 형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도현은 아무 말도 없는 형이 이상해서 겨우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도현은 이질적인 것을 확인했다. 녹색....? 기현의 눈동자가 녹색이 되어 있었다. 얼굴이나 키나 체격 모두 기현과 똑같았는데 눈동자의 색깔이 검은색이 아니라 녹색이다. 게다가 기묘하게 굳어진 듯한 저 표정은 너무나 낯설었다. " 형...?" 도현은 의아한 목소리로 형을 불렀다. 그러나 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게다가 도현을 향한 표정은 어느새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냉각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엄청난 박력이 몸에서 풍겨 나오는 바람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아니, 그것은 박력이라기 보다 노골적인 감정의 표현이었다. " 왜 그래?" 여전히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도현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이곳은 꿈속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저런 얼굴의 형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망연하게 기현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기현이 낮게 중얼거리듯이 말하며 도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마주친 눈동자가 너무나 차가워서 도현은 순간 얼어붙었다. 이런 눈은 절대로 형의 눈이 아니다. 도현에게 거리감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기현은 나이 어린 동생을 늘 보살펴주었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얼굴은 같지만....눈앞의 남자는 형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혔던 문제의 해답처럼 그 사실이 머리 속에 경종을 울리며 인식되었다. " 당신....누구야.....?" 목소리가 떨려왔지만, 도현은 그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붙잡힌 어깨에 힘이 들어가 고통스러웠다. 기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는 추궁하듯이 뭔가를 말하며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도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고통과 혼란이 뒤섞여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여긴 어디야! 소리 없는 절규가 도현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리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라딘의 몸이 축 늘어지자 그제서야 테이드는 손을 놓았다. 힘없이 늘어진 몸은 침대 위에 창백하게 널브러졌다. 노스는 혀를 차며 쓰러진 라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충격을 받았는지 몸에 열이 올라 있었다. 몸의 부상 때문에 가뜩이나 하루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지금 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것이리라. " 백작님께서도 지금은 잠시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딘님은 제가 돌보겠습니다." 테이드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대답도 하지 않고 파드웰의 부축을 받아 방을 나섰다. 확실히 조금 전의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반가운 표정으로 테이드를 끌어안는 라딘이라. 노스는 고개를 저으며 라딘을 다시 침대 위에 제대로 눕혔다. 테이드와 라딘 형제의 불화는 상당히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것은 주변에서 어떤 노력이나 조언을 해도 바뀌지 않는 본질 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테이드는 라딘을 증오하고 있었고, 라딘은 테이드를 두려워했다. 언제나 겁먹은 듯한 창백한 얼굴로 라딘은 테이드를 겨우겨우 올려다보곤 했다. 테이드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라딘이 자살을 기도한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숨막히는 증오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누구나 자살을 꿈꿀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불행이라고 자책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테이드에게도 충격인 것이 분명하다. 모든 기억을 잃은 것처럼, 아니, 언어 능력 자체를 잃어버리다니. 확실히 테이드를 알아보며 뭐라고 부른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라딘의 기억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보면 물 속에 들어가서 자살이라도 할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그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니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노스는 불행을 짊어진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컵을 정리하는 리사에게 말을 걸었다. " 리사. 라딘님이 너도 알아보지 못했겠지?" " 아...네. 수프를 먹여 드리면서 계속 말을 걸었는데 제 말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뭔가를 물으셨는데, 저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구요. 저도 중부지방이나 북부 지방에서 쓰는 말은 알고 있지만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는 건 분명해요." 노스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라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 대륙 어디에서도 쓰이는 말이 아니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을까. 분명 바닷가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라딘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 대체 무슨 일이 생긴걸까요...." 그것은 노스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라메르 백작가에는 17년 전부터 계속 나쁜 일만이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의 유력 귀족이었던 라메르 백작가가 이런 변두리로 쫓겨나고, 나쁜 일만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모두 17년 전부터. 바로 라딘이 태어난 후부터였다. 라메르 백작가의 고용인들은 모두 라딘을 불행을 몰고 오는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이름을 듣는 것조차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 리사, 오늘은 라딘님이 밤새 열을 내실 게 분명하니 물수건을 준비해서 간호해 드려. 발목이 다 나으려면 한 달은 걸릴 테니 그 동안은 네가 수고해줘야겠다." " 수고는요. 어차피 제 일인 걸요." 리사는 미소 띈 얼굴로 대답하고 나서 수프가 담겨있던 접시와 물컵을 들고 방을 빠져나갔다. 리사가 아니었으면 아마 라딘의 시중을 들어줄 하녀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메르 백작가의 영지 내에 퍼진 라딘에 대한 소문 때문에 백작가에 고용된 하녀들 중에서 라딘의 시중을 들겠다고 말하는 하녀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마을에서 새로 고용된 리사가 자청해서 라딘의 시중을 들겠다고 한 것이다. 라딘의 곁에 있으면 자기도 불행해 진다고 여긴 것인지 영지내의 사람들이나 고용인들 중에서 라딘을 똑바로 쳐다보거나 말을 붙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저 소년이 불행을 몰고 다닐 리는 없는데 말이야....." 노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우연한 일이 겹쳐서 일어났다면 모를까 죄 없이 세상에 태어난 소년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확실히 제대로 된 처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라메르 백작가의 작위를 이은 테이드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마당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웠다. 노스는 벌어진 라딘의 가운을 잘 여며주고 나서 시트를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 주었다. 발목을 살짝 손으로 감싸자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아무리 라딘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동생의 발목을 손으로 부러트려 버리다니, 테이드도 너무 했다. 만약 제정신으로 그런 일을 당했으면 놀라서 기억에 혼란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 설마...." 생각을 거듭하던 노스는 라딘이 발목이 부러지는 충격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라딘은 평소에도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고, 불안해했다. 특히 자살을 시도했던 1주일 전부터는 눈에 띄게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라딘을 탓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 속에서 17년을 보내왔으니 그 속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확실히 무리한 이야기였다. 라딘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고, 늘 방안에서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은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노스가 권하기도 했지만 라딘은 고개를 저었다. 라딘도 사람들이 자신을 꺼려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노스가 알지 못하는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상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어디에서나 희생양은 필요하다. 사람은 누군가 미워할 존재를 만들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 바로 라딘이었다. 처음부터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증오만을 받으며 살아온 소년.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창백한 얼굴의 소년은 가족들에게조차 보호받지 못했다. "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라." 노스는 발목에 감긴 붕대를 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괴로웠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조금이나마 행복할 지 모른다. 분명 다시 어두운 분위기에 먹혀버리겠지만 최소한 그 전까지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소년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 지금은 귀족 집안의 주치의라는 평민으로서는 꽤 높은 지위에 오른 노스였지만, 지금은 어렸을 때 부모님께 왜 귀족으로 낳아주지 않았냐는 투정을 부렸던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귀족이란 결코 겉보기처럼 빛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민들은 그저 그날 그날의 먹을 것을 걱정하는 대신 작은 행복 속에서 웃을 수 있지만, 귀족에게 그런 일상의 작은 행복 같은 것은 평민이 바라는 사치만큼이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노스는 귀족가의 주치의가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라메르 백작가의 주치의가 된 것은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처음으로 의사 면허를 받고 일자리를 구하던 중에 스승이었던 자한님의 소개로 라메르 백작가의 주치의가 되었다. 예전에는 중앙의 엄청난 귀족이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지방의 영주에 불과한 보통의 귀족. 가문은 몰락했을지 모르지만 그 내부에는 오래된 귀족의 분위기가 지나칠 정도로 짙게 남아 있었다. 전대 가주와 부인이 죽고 백작가에 남은 것은 젊은 가주인 테이드와 2년 전에 공작가에 시집을 간 루사벨라, 그리고 라딘 뿐이었다. 노스가 막 라메르 백작가의 주치의가 되었을 때, 18살이었던 테이드는 이미 3년 전에 백작 작위를 물려받고 백작이 되어 있었다. 부친과 모친의 사후에 급격하게 기울어진 가문을 일으켜 세운 것은 테이드였다. 그는 어린 나이라고는 볼 수 없는 수완으로 백작 가문을 일으켰다.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라메르 백작가를 지방 귀족으로서는 상당한 지위에 올려놓았다. " 상당히 심한데요?" 물수건을 가지고 돌아온 리사가 노스에게 말을 걸었다. 붕대를 다 풀어놓고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노스는 리사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라딘의 발목을 살폈다. 붉게 부어오른 발목은 그냥 눈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아파보였다. 정신을 잃은 라딘은 작게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 수건 하나는 내게 주고 넌 얼굴을 닦아 드려. 리사." 리사가 짧게 대답하고 노스에게 적신 수건을 건넸다. 노스는 그것을 받아들고 열이 피어오르는 발목에 가져다 댔다. 어느 정도 열을 식힌 후에 약을 바르고 다시 붕대로 감싸지 않으면 밤새 고통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 내일부터는 우리 둘이서 라딘님께 말을 가르쳐 드려야겠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날 수도 있지만 그때를 기다리다가는 우리가 더 지칠 테니까." " 네. 그렇게 해요." 리사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제는 조금 얼굴이 익숙해진 리사라는 이름의 아가씨에게 도현은 화장실을 설명하기 위해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다. 이름 정도는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로를 가리키며 이름을 말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리사는 고집스럽게 도현을 라딘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이름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이 곳 사람들은 모두 도현을 라딘이라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도현은 그렇게 부르도록 내버려두고 그녀의 시중을 받았다. 그녀는 헌신적으로 식사 시중을 들어주고 몸을 닦아주고,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다. 게다가 이것저것 가리키며 말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도현이 언어에 재능이 있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조금씩 말을 가르쳐 주자 간단한 단어는 금방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다리가 멀쩡하면 일어나서 스스로 찾으면 되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걸려서야 리사는 겨우 도현의 의사를 이해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유리로 된 병을 가져다주었다. 그 병을 받아 들고나서 도현은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진 상태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가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리사가 침대에 커튼을 쳐주고 나자 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들추고 겨우 일을 봤다. 하필이면 다리를 다쳐서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참으로 난감한 기분이었다. 옷을 다시 추스르고 침대 옆에 있는 낮은 탁자 위에 병을 올려놓았다. 쳐다보기가 조금 껄끄럽지만 그렇다고 계속 손에 들고 있는 것도 우스웠다.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앉자 커튼이 살짝 열리고 가느다란 손이 들어와 유리병을 가져갔다. 지금은 말이 안 통하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젊은 여자에게 저린 시중까지 들게 만들다니 기분이 묘했다. 이곳이 병원이라면 그런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을 텐데. 어제 기현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를 본 이후로 상당히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많이 안정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뭔가가 이상하다. 의사라고 생각되는 남자 노스도 그렇고 리사도 그렇고 도현을 라딘이라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고, 그것은 기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사실 아직까지도 그 남자가 기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아무리 닮은 사람이 존재한다고 해도 저렇게 똑같은 얼굴에 체격까지 가질 수 있을까?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심지어는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단지 다른 것이라고는 눈동자 색뿐이었는데 단지 그것만으로 형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할까? 도현은 몇 번이나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나오는 결론은 같았다. 하루 빨리 이곳의 말을 배워 무슨 일인지 직접 알아보는 것. 지금으로서는 짐작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어떤 곳의 말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 있을 리가 없다. 분명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 지금 무엇 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얼마 후 리사와 함께 노스가 방을 찾아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 도현은 자신을 빤히 관찰하듯 바라보는 둘에게 점심때까지 리사에게 배운 단어를 떠올리며 책을 달라고 말했다. 언어를 배울 때 물론 듣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기억하려면 글자와 함께 배우는 것이 제격이었다. 특히 도현은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문자를 보고 공부하면 속도가 더욱 빨랐다. 노스는 흥미롭게 눈을 빛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갔다. 겨우 이틀째였지만 침대 위에 누워있기만 하자니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평소에도 그다지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양쪽 발목이 온전하지도 않은 상태여서 아무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다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리사가 라딘 어쩌구하면서 말을 걸었다. 도현은 주의 깊게 그녀의 말을 들었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몇 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 상으로 보아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묻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도현은 작게 미소지었다. 말은 안통하고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계속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그녀가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도현의 미소를 보고 리사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을 때, 문이 열리며 노스가 책 몇 권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가져온 책을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 중에서 두께가 조금 얇아 보이는 책을 건네주었다. 왼쪽 손목에 생겨났던 상처는 이제 대충 아물었다. 하지만 아직 왼손을 격하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도현은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책을 받아들었다. 리사가 조금 낮은 쿠션 하나를 다리 위에 올려 주었다. 눈치 빠른 그녀에게 다시 감사의 미소를 지어 보이자 이번에는 노스의 표정 역시 놀라운 것을 봤다는 듯이 바뀌었다. 도현은 황당한 기분이 되었다. 사람 웃는 것을 처음 보는 건지, 아니면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보이기라도 하는 건지. 뭔가 한마디 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아직 말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이니 어쩔 수 없다. 도현은 둘에게서 신경을 끄고 책을 펼쳤다. 그 책은 어린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기 위한 것인 듯 맨 첫장을 펼치자 알파벳과 비슷해 보이는 글자가 일렬로 죽 쓰여 있었다. 잠시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노스였지만 도현이 책을 펼치자 침대 옆에 걸터 앉아서 글자를 하나 하나 짚어가며 발음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 라딘님은 훌륭한 학생입니다." " 알던 말을 잊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아닌가?" 테이드는 비꼬인 듯한 말로 되물었지만 노스는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받아넘겼다. " 아직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기본적인 회화는 가능해졌습니다. 다리가 다 나을 때 쯤이면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제대로 내 말을 알아듣게 되면 찾아와라. 그 전에는 치료나 잘 해줘. 단, 발목은 되도록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알아서 치료해라." " 네. 백작님." 부목을 제대로 대고 좋은 약을 쓰면 깨끗하게 부러진 발목 정도는 금방 치료할 수 있었지만, 테이드는 그럴 목적으로 라딘의 다리를 부러트린 것이 아니었다. 되도록 오래 그 상처가 남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테이드가 원하는 바였다. 두 번 다시 도망칠 수 없도록 말이다. 지금은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라딘이지만 기억이란 것은 언제 되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노스는 문득 라딘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미소를 떠올렸다. 노스가 기억하기로 10년 전부터 라딘은 미소다운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가라앉은 듯한 시선으로, 굳게 다문 입술로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을 뿐,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는 표정을 지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무거운 백작가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리 귀족이고 집안 사정이 복잡하다고 해도 어린 아이가 미소를 잃어 버리고 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후의 라딘은 곧잘 환하게 미소지었다. 늘 음침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렇지 라딘 역시 라메르 백작가의 핏줄이었다. 미소짓는 라딘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제도에까지 소문나 있는 테이드의 외모를 생각하면 라딘의 미소가 그렇게 선명해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테이드와 라딘의 모친은 비록 죽은 후였지만 지금까지도 제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라고 불리고 있었다. 노스는 자신이 본 것을 테이드에게 말할까 하다가 생각을 접어버렸다. 테이드가 품고 있는 라딘에 대한 감정은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쉽게 풀릴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 그런데, 백작님." 노스는 그대로 집무실에서 나가려고 하다가 말을 꺼냈다. 이 사실만은 테이드에게도 알려두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라딘님께서는 기본적인 말을 하실 수 있게 되고 나서 계속 이 말을 반복해서 하시더군요. 자신은 라딘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테이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노스 역시 그것만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라딘이 라메르 백작가의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말조차 완전히 잊은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은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 어디까지 도망치려는 거지...?" 테이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러트렸더니 이제는 모든 기억을 잃고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었다. 라딘이 조금이라도 당당하게 굴었다면 사태는 나아졌을 지도 모르지만, 라딘은 언제나 주눅든 얼굴로 테이드의 시선을 피하고, 언제나 피해자인 것처럼 경직된 표정만을 지었다. 테이드는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피하는 것만이 최선인 것처럼, 자신이 절대적인 약자라고 변명하는 것처럼 구는 라딘을 용서할 수 없었다. " 이제 가봐." 끊듯이 말하는 테이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서 노스는 백작의 집무실에서 빠져 나왔다. " 고집이 센 건지, 귀족의 자존심인건지...." 노스는 작게 투덜거리며 1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평민인 노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귀족들의 자존심은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었다. 하긴 노스가 귀족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같은 인간이기는 하지만 귀족과 평민은 인종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관이나 마법사나 기사들과는 다른 인간이었다. 명예와 가문에 얽매여, 그 피에 얽매여 평생을 살아가는 귀족의 삶. 그 속에 어떤 희생과 비틀린 광기가 뒤섞여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래된 가문일수록 그 비틀림은 더 했다. 몰락한 가문을 자신의 힘으로 일으켜 세우고, 불행을 불러오는 동생을 가둬둔 채 계속 증오하는 테이드나 도망치기만을 바라다가 결국 기억까지 잃고서 자신의 안에 파고들어 버린 라딘은 노스에게 있어서는 불가해한 영역에 속한 사람이자 동정을 느낄 상대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노스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 노스. 로라가 칼에 손가락을 베었는데 피가 좀 많이 나요. 좀 봐줘요." 노스보다 훨씬 오래 라메르 백작가의 하녀로 일해온 중년의 고용인, 마틸라가 막 1층으로 내려온 노스에게 말을 걸었다. " 부엌에 있나요?" " 지금 피를 멈추게 한다고 앞치마로 꼭 싸매고 있어요." " 약을 챙겨서 갈 테니까 마틸라가 옆에서 잘 보고 있어요. 더러운 걸로 상처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것 잊지 말아요." 노스는 빠르게 말하고 나서 거의 뛰다시피 하며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원래대로라면 백작가의 피를 이은 사람들의 건강 관리만 하면 되는 것이지만 테이드는 건강해서 정기 검진 이외에는 노스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스는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하면 치료해 주었다. 테이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저택의 고용인들은 병이 나거나 다치거나 하면 노스를 부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노스가 약과 붕대가 담긴 가방을 들고 부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마침 리사도 와 있었다. 로라의 손가락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며 노스는 리사에게 말을 걸었다. " 라딘님께 드릴 식사를 준비하는 건가?" " 네. 이제 수프 말고 뭔가 씹을 수 있는 걸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라딘의 이야기가 나오자 부엌 안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하녀들이나 노스에게 치료를 받고 있던 로라까지 표정이 굳어졌다. 노스와 리사는 거의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리사는 재빨리 빵과 수프를 챙겨서 부엌에서 나갔다. "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노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로라의 손가락을 붕대로 감아 마무리하고는 쓰던 약을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 " 그러니까 나는 라딘이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현은 딱 부러지는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리사는 한숨을 내쉬었을 뿐, 그 말을 조금도 수긍한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을 라딘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렇게 대답했지만 누구 하나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한 명 미친 사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는 것인지 몰라도 이곳의 말도 하지 못하던 도현을 이방인이라고 의심하기는커녕, 기억을 잃은 상태이니 억지로 떠올리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충고까지 해 주었던 것이다. " 한 시간 후에는 노스가 올 거에요. 그 전까지는 조금 쉬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하는 말은 이제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메이드로 일하고 있으니 하는 말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노스는 확실히 의사가 맞았다. 그것도 백작가문이라는 이곳의 주치의라고 했다. 노스에게 라딘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몇 가지 들었다. 기현과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백작가의 주인이며 형이라는 것도, 이곳이 리카도 제국의 남단에 있는 백작가의 영지라는 사실도. 그 사실을 듣고 도현은 망연함을 한동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무슨 영화나 소설도 아니고 백작이며 제국이라니. 확실히 이곳이 말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이렇게까지나 동떨어진 곳일 줄은 몰랐다. 상황을 알기 위해서 정말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단어를 외우고 책을 뒤적였던 것이 허무해 지는 순간이었다. ' 꿈이겠지....' 도현은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느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꿈이라면 이렇게 길게 이어질 리도 없고, 실제로 음식을 먹고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리도 없고, 육체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지금 사태는 도저히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 비행기에서 구조됐지만 식물인간이 된 건지도 몰라.' 정말 절망적인 상상이었지만 도현은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다. 한동안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도현은 엉망으로 뒤섞여 버린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결국 침대 옆에 놓아둔 책을 펴들었다. 이제는 꽤 익숙하게 여겨지는 문자를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도현은 한동안 공부에 몰두했다. " 몸은 많이 나아지신 것 같군요." 싹싹해 보이는 인상의 노스가 웃는 얼굴로 방안에 들어섰다. " 네, 그럭저럭. 그런데 다리는 언제쯤이나 되어야 낫는 건가요?"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말도 알아듣지 못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현의 발음은 깔끔하게 들렸다. 그 사실에 노스는 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꽤 훌륭한 학생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언어 실력은 단순히 이전에 알던 언어를 다시 배우고 있기 때문에 잘한다는 느낌과는 달랐다. " 죄송합니다. 저희 영지에는 약이 풍부하지 않아서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최대한 다리를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라딘님." 도현은 그 말을 듣고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바로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 저는 라딘이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지 궁금하군요." "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노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묻자 도현 역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 난 한도현이고, 이곳 사람이 아닙니다. 비행기 사고를 당한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이런 곳에서 라딘이라는 사람으로 살아갈 생각은 없어요. 구해주고 치료까지 해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단어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노스는 곧바로 반격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 그렇다면 스스로 왼쪽 손목에 남긴 상처나, 테이드님을 기억하고 계신 것은 어떻게 설명하실 생각이십니까?" " 그 사람은 내 형이 맞아요. 하지만 절대로 이곳 사람은 아니에요." 도현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 그건 제대로 된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라딘님." " 라딘이 아니라니까!" 도현은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반말로 소리치고 말았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와 말하는 것은 답답함만을 가중시킨다. 말이 통해도 소용이 없다. " 부모님의 얼굴은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도현은 나지막한 노스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며 방을 나간 노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초상화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유화로 그려진 듯한 초상화에는 남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도현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에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 색이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 돌아가신 전대 백작님과 백작부인 입니다. 라딘님의 부모님이십니다." 도현은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이 다 정상인 것인지도 모른다. 녹색 눈동자를 가진 형의 얼굴도 이미 돌아가셨다는 부모님의 얼굴도 모두 도현이 기억하는 가족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도현의 표정에서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읽어내고 나서 노스는 알 수 없는 승리감에 취했다. " 그럼.....누나는.....?" 도현이 묻자 노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루사벨라님께서는 2년 전에 결혼하셔서 지금은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루사벨라님은 제도에 있는 취드린 공작님과 결혼하셔서 지금은 공작 부인이십니다." ' 대체....' 이제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두 살아있다. 이곳에 함께 존재한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나 다른 장소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살아있는 거지? 아니면 내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다 꿈이었나....? 도현은 엄청난 쇼크 때문에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머리 속이 혼란스럽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같은 얼굴이 3개 존재한다던가, 우주는 다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던가, 전생이 있다던가 하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 현상에 대한 말들도 많았지만 도현은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도현이 해야할 일은 많았고, 도현은 현실에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언어에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 재능으로 일해서 돈을 벌고, 서로를 완벽하게 위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능력 있는 가족들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 일상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잠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손목에 칼로 그어 내린 듯한 자국이 생겨나서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부터, 무언가 현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혀 알 수 없는 장소에 와 있는 지금에 와서는 대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이곳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꿈이라고 믿어버릴 텐데, 단순히 길고 오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텐데, 이곳에는 가족이 존재했다. 라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기억 따위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고 그 사실을 인정할 수도 없지만, 이곳에는 분명 자신의 가족이 있다. 그리고 도현을 동생이라고 생각하는 형도 있고, 모두들 도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 라딘이라고....불러도 좋아요...." 도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머리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17년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생생한 17년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지 않은가. 분명 어딘가에 해답이 있을 것이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쳐 있었다. " 오늘은 이만 쉬고 싶습니다...." 도현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노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초상화를 들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도현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돌아누웠다. 억지로 움직인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 통증이 반가울 정도였다. 현실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나 혼란스럽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인 줄은 몰랐다. 아니,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을 스스로 의심하고 부정하는 지금의 생각 자체가 이상하다. 여기는 어딘가 비틀려 있다. 가족들이 이곳에 있다고는 하지만,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도현은 자신이 초상화를 보고, 가족 구성원이 같다는 사실 때문에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는 다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수한 다차원 우주에는 지구와 같은 생명체가 살고 있는 별이 얼마든지 있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워낙 광활하고 한 세대에게 주어진 시간으로는 죽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해도 그 비밀을 모두 알 수 없다. 어렸을 때 보통 아이들처럼 우주비행사가 되겠다거나 하는 평범한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금방 현실에 눈을 돌리고 나서는 그런 것들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기억 한구석으로 밀어두었다. 하지만.... 정말로 꿈같은 이야기이고 실제로 증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믿을 생각도 없었지만 어쩌면 이곳은 일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다차원 세계의 어딘가 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렇다면 이곳에 도현의 가족들이 또 한사람 존재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생각을 비웃었다. ' 하지만 그런 거짓말 같은 일이...생길 리가 없잖아?' 게다가 그런 것은 정말 의견이나 주장일 뿐이지 누구 하나 증명해내지 못한 단순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대형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실종자들이 발생하고 그들의 행방을 찾았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했을 때라던가, 대구에서 발생했던 여러 가지 지하철 사고들, 미국의 무역센터 건물 테러사건 등에서도 실종자 수에 비해 찾아낸 시체나 생존자 숫자는 터무니없이 적었었다. 하지만 그런 사건들과 가미가쿠시 같은 실종 사건을 억지로 결부시키는 것도 우스웠다. 신비스러운 소문들은 그냥 소문으로 여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도현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고 믿어왔다. 지금은 단지 리사나 노스의 말만을 들었을 뿐이다. 초상화도 확인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하루 빨리 다리가 나으면 직접 조사하고 움직여서 반드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래 있어야만 할 장소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곳은 도현을 환영하는 평화로운 꿈속이 아니다. 그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날 밤. 늦게까지 서류에 매달려 있던 테이드는 자신의 방으로 가기 전에 2층 가장 구석에 있는 라딘의 방을 찾아갔다. 라딘이 테이드에게 반가운 얼굴로 매달린 이래 처음으로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문 앞에 선 테이드는 잠시 문 앞에서 망설였다. 라딘은 잠들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들어간다고 해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반갑게 매달리는 라딘의 얼굴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으로 바뀌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증오해야 마땅할 동생. 라딘은 죽음의 자유나 망각으로 현실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백작가가 몰락해 버린 것도, 부모님의 비참한 죽음도, 팔려가듯 나이 많은 공작과 결혼해야 했던 여동생의 수치도 모두 라딘의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10년도 넘게 쌓여온 증오는 쉽게 사라질만한 것이 아니었다. 테이드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고 등을 돌렸다. ----- 한 달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처음에는 낯선 곳에 대한 경계심과 말도 통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신이 없었고, 그 후에는 말을 배우기 위해 다른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한가지에만 몰두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도현이었지만, 몸은 어느 정도 상황에 적응했어도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직 다친 다리는 다 낫지 않았다. 이제는 다리를 움직여도 예전처럼 심각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걸어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휠체어라도 있으면 그것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을 텐데, 여기에는 그런 문명의 이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사용해오던 휴대전화나, 컴퓨터, TV나 자동차가 없는 세상을 도현은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직도 모든 사람들이 도현을 라딘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도현 역시 이름에 관해서는 포기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기억이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확신처럼 굳어졌다. 말도 안 되는 일로 인해 이런 곳에 오게 되었지만, 도현은 분명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본능처럼 자리잡은 확신이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라딘이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이곳에 가족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 라딘님, 식사하세요." 화사하게 웃으며 리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한참 책에 열중하고 있던 도현은 들어서는 그녀에게 미소로 대답하고 책을 덮었다. " 정말 대단하세요. 벌써 그런 책을 읽을 정도가 되시다니." 감탄하는 리사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도현은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침대 보다 높은 탁자 위에 가져온 음식을 올리고 나서 리사는 그 탁자를 도현의 앞으로 옮겼다. 김이 피어오르는 수프와 갈색의 부드러운 빵, 야채 샐러드, 그리고 작은 크기의 스테이크가 먹음직스럽게 눈앞에 펼쳐졌다. 리사는 직접 짜서 만든 오렌지와 비슷한 맛의 과즙을 컵에 따라서 도현의 앞에 내밀었다. " 영어랑 비슷하니까...." 작게 대답한 도현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리사였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도련님이 가끔씩 이상한 말을 한다는 것을 지난 한 달 동안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 몸은 많이 나아지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얼굴 색도 많이 좋아지셨어요." 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빵을 잘라서 수프에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음식이 입에 맞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김치나 불고기 같은 것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입에 맞는 음식을 먹으며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운이 나빴으면 비행기에서 그대로 죽었을 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혼자서 다친 몸으로 괴로워하다가 굶어죽었을 지도 모른다. 도현은 뭐가 뭔지 모르는 일 속에 내던져져 있었지만,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었다. " 아직 기억나는 것은 없으시구요...?" 식사에 열중하는 도현을 지켜보고 있던 리사가 물었다. " 아무 것도." 도현은 스테이크 한 조각을 삼키고 나서 대답했다. 리사도 참 끈질기다. 노스라는 의사 역시 그랬지만. 도현은 라딘이 아닌데 그가 가졌을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이 사람들도 대단하지. 대체 뭘 믿고 날 라딘이라고 확신하는 건지....' 도현은 한 달을 보내면서 한가지 사실을 가정하고 있었다. 형의 얼굴이나 누나의 얼굴, 돌아가셨다는 부모님의 얼굴이 자신의 가족과 일치하고 있던 점으로 미루어 그 라딘이라는 사람 역시 자신과 같은 얼굴을 가졌을 지 모른다는 것. 가족이 모두 모여서 찍은 사진 같은 것도 없고, 초상화에도 그 라딘은 빠져있었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 여하튼 그게 시작이었어.' 도현은 문득 왼쪽 손목에 남은 붉은 흉터를 내려다보았다. 상당히 깊게 베였던 상처는 이제 모두 아물었지만 한참이 더 지나야 흉터의 색이 엷어질 것이다. 이유 없이 이 상처가 생기고 난 후에 현실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노스에게서 분명하게 들었다. 왼쪽 손목에 스스로 만든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 가족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면서 라딘이 아니라고 계속 주장할 생각이냐고. ' 나란 같은 상처를 가진 녀석이 있다는 말이지....' 도현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음식을 먹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 라딘이라는 녀석이 나타난다면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 그러면 도현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할 필요도 없고, 가족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식사를 거의 마쳤을 무렵, 도현을 찾아오는 두 명중 한 명인 노스가 밝게 인사를 하며 나타났다. 리사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고, 도현 역시 고개를 돌려 그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 확실히 많이 좋아지셨군요." 도현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 놓았다. 리사가 식사를 끝낸 것을 알아차리고 식기를 정리하는 동안 도현은 노스에게 발목의 상태를 점검 받았다. 붕대를 풀어 내리자 붓기가 많이 빠져서 평상시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는 발목이 드러났다. 하지만 노스가 손끝으로 발목을 가볍게 누르자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 아직 걷는 것은 무리겠군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겠습니다. 하지만 제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낫고 있습니다." 도현은 노스가 시원하게 느껴지는 액체를 발목에 충분히 바르고 나서 붕대를 감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데....." 도현이 입을 열고 그렇게 말하자 리사와 노스는 거의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한 달 동안이나 이 방에서 움직이지 못해서 너무 답답해요. 나는 새장 안에 갇힌 새가 아닙니다." ' 아니요, 당신은 새장 안에 갇힌 새입니다.' 도현의 말을 듣고 노스는 겉으로 내뱉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 라딘님, 그것은 제가 함부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한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건강에도 좋지 않지만...." " 한 달씩이나 돌봐주고 치료해 주는 것은 정말 고맙지만, 난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을 수가 없어요." 도현은 노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아직도 자신이 라딘 라메르님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노스의 어조에는 명백하게 질린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말이 통하게 된 이후로 라딘은 계속 자신이 라딘이 아니라고 부인해 왔다. 확실한 증거가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데도 저렇게 부인하는데는 노스도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라딘의 성격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는 확실하게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라딘이 라딘 라메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 라딘이라는 이름이건 뭐건,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것은 말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난 당신들이 아는 그 라딘이 아니에요. 당신이 말하는 대로 왼쪽 손목에 상처가 있고 가족들의 얼굴이 일치한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난 이곳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아무리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해도 자기가 태어나서 익혀온 말까지 잊어버립니까? 난 그런 경우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실어증이라면 모를까, 멋대로 생각해서 몰아붙이는 것은 그만뒀으면 좋겠군요." 노스는 길게 이어진 라딘의 말에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다물지 못하고 굳어져 있었다. 그것은 리사 역시 그랬다. 라딘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새어나온 말들은 상당히 논리적이었고, 망상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라딘은 의사들이나 사용하는 용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 라딘님. 대체 그런 말들은 어디서...." 놀란 가슴을 겨우 안정시키고 나서 노스가 묻자 도현은 피식하고 웃었다. " 이런 건 상식입니다. TV만 봐도 아니, 책만 조금 읽어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에요."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섞여 나와서 노스는 잠시 라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동자를 바라보고 표정을 관찰해도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예전의 라딘은 노스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라딘은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고, 주변에 다가오는 사람에게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명, 라딘이 반응을 보이는 상대는 형인 테이드 뿐이었다. " 대체 라딘님의 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당신이 이해 못해도 어쩔 수 없어요. 나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이곳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도현은 덧붙여 말했다. " 라딘님. 너무 침대에만 누워 계셔서 마음이 답답해지신 게 분명해요. 사람들이 오지 않는 서쪽 정원에라도 나가셔서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는 건 어떨까요?" 식기를 정리하다 말고 둘의 대화를 들으며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리사가 말했다. 노스는 테이드의 허락 없이 라딘을 함부로 데리고 나가는 것은 그의 분노를 살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라딘과 대화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만에 하나 테이드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라딘은 아직 자신의 힘으로 걷는 것은 무리다. 백작이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 그렇게 하시죠. 라딘님. 리사, 나갈 준비를 해 줘." 리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식기를 정리하며 움직이는 동안 노스는 옷장으로 가서 겉에 걸칠 만한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화가난 듯이 보이는 라딘은 대답 없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 방 한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스는 한숨을 쉬면서 적당한 옷을 골라서 다시 침대가로 다가섰다. 얇은 가운 차림의 라딘은 노스가 겉에 옷을 걸쳐주고 단추를 잠그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잠시 후, 리사가 얇은 모포와 따뜻한 우유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되돌아오자 노스는 별로 힘이 세 보이지도 않았는데 가볍게 라딘을 안아 올렸다. " 헛." 도현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 원하시는 만큼은 아닐 테지만 정원에 나가셔서 바람을 쐬고, 햇빛을 받으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실 겁니다." 도현은 노스에게 안긴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스는 맹목적으로 종교에 빠져든 신자 같았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다른 점을 발견해도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현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말싸움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지금은 한 달만에 찾아온 외출을 즐기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노스에게 안겨 서쪽 정원이라는 곳으로 움직이면서 도현은 처음으로 라메르 백작가의 저택을 관찰할 수 있었다. 중세풍의 2층 짜리 저택은 눈에 띄게 고급스럽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간간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보이는 남녀와 마주쳤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도현의 얼굴을 보고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 도현은 당혹감을 느꼈다. ' 저건 아무리 봐도.....' 노스의 말대로라면 라딘이라는 사람은 라메르 백작가의 주인인 테이드의 친동생인 것이 분명한데 저 거리끼는 태도는 대체 무엇인지. 영화에서 봐도 저택에 고용된 사람들이 주인에게 저렇게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는 장면은 없었다. 아무리 싫어도 자신들을 고용한 주인이 아닌가. 하지만 의혹에 더 파고들 사이도 없이 정원으로 이어진 길에 들어서자 도현은 그런 것들을 모두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한 달만에 피부로 느끼는 햇살의 따스함이나 부드러운 바람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한달 동안 침대 위에서만 생활했던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는지 다시 한 번 몸에 사무쳐왔다. 태양의 온기를 품고 있는 따뜻한 잔디 위에 앉아서 도현은 잠시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눈이 시릴 정도로 맑은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 위를 간간이 흘러가는 구름과 몇 마리씩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들. 바람이 품고 있는 정겨운 향기가 답답했던 마음을 일시에 녹여 버렸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도현은 진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 도현을 노스와 리사가 신기한 눈으로 응시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얼굴을 몇 번이나 보여주고 있는 라딘에게 새삼스럽게 흥미가 생겨나고 있었다. 얼굴에서 어두운 기색이나 괴로움이 사라진 라딘은 살아있다는 활기를 강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두 사람은 말없이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Part 3. invitation 화려하게 꾸며진 집무실과 연결된 휴게실에 앉아 차를 마시던 금발 머리카락의 남자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친구이자 부관인 스위드에게 말을 걸었다. " 초대장은 모두 발송했겠지?" " 어제 오전에 모두 발송을 마쳤습니다. 명단은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한 것은 긴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회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었다. 눈동자 색이 상당히 밝아서 빛 아래서 보면 은색으로 보이기도 하는 특이한 눈동자였다. " 오랜만에 옛 친구의 얼굴을 보게 되겠군." 화사한 금발에 적색을 강하게 띄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 황태자 케이스워크는 즐거운 듯이 미소지었다. 황태자라는 지위에 걸맞게 단정하고 기품 있는 외모를 가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25세가 된다. " 그때 이후로 연락조차 취하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너무 갑작스러운 초대가 아닐까요?" 스위드의 질문에 케이스워크는 글세하고 대답하고 나서 천천히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음미하듯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다시 그의 입술이 열렸다. " 문제의 소년이 얼마나 자랐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불행을 몰고 다니는 도련님으로 소문이 자자하다지?" " 라메르 백작가의 몰락과 관련된 스캔들은 유명하니까요. 게다가 황제 폐하와도 관련된 스캔들이었으니 지금까지도 소문이 무성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케이스워크의 보라색 눈동자가 순간 흥미롭게 빛났다. 황궁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족 가문중의 하나였던 라메르 백작가는 17년 전. 한 소년의 탄생을 계기로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한때 제도는 라메르 백작가의 스캔들로 시끄럽게 달아올랐었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람들은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대 귀족의 몰락은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한 흥미거리였다. 라메르 백작가의 몰락으로 인해 새롭게 대 귀족의 반열에 올라선 피요드 후작가에서는 공공연하게 라메르 백작가의 몰락이 자신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떠들고 다녔다. "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던 아기도 이제는 자라서 모든 것을 알아버렸겠지.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까?" 케이스워크는 진심으로 소년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테이드에 대한 소식은 간간이 그의 귀에도 들려왔다. 바닥까지 몰락한 백작가를 스스로 일으켜 세우고, 과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제는 귀족다운 위치에 올라 있다고 한다. 테이드는 확실히 강한 남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확고한 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점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강해진 모양이었다. 테이드는 백작가가 몰락했을 당시 11살의 어린 소년이었지만 자신의 가문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울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다. 단지, 소년답지 않게 증오에 불타는 눈으로 이를 악물었을 뿐이었다. 불행을 몰고 오는 소년의 안위도 궁금했지만, 케이스워크는 옛 친구의 얼굴도 무척 궁금했다. 과거 제도 제일의 미녀를 아내로 얻었던 전대 백작의 자식들은 확실히 모친의 피를 이어받아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사교계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테이드의 용모가 소문으로 퍼져있을 정도다. 그런 스캔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테이드는 제국의 요직을 차지해 황태자인 케이스워크를 능가하는 제도의 유명인이 되어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스캔들이 있었지만 테이드의 여동생인 루사벨라는 현재 취드린 공작부인으로서 사교계의 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결혼 상대자는 그녀보다 30살이나 많은 공작이었지만 그 팔려가듯 치룬 결혼도 그녀를 좌절시키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몰락한 라메르 백작가의 여식이 처음으로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호기심 반 흥미반으로 그녀에게 접근했지만 몰락 귀족이라고 그녀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스캔들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해도 혼자서 충분히 위로 올라올 수 있을 만큼 현명하고 강한 여자였다. 자신이 중년의 공작과 결혼을 한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루사벨라 취드린 공작부인은 명실공히 사교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 부모는 무너진 후 죽었어도 자식들은 계속해서 존재를 과시하고 있지. 과연 그 피는 대단하다는 건가. 하긴 백작의 신분으로 황제의 친구였던 역대 라메르 백작가의 가주들도 대단하긴 했지."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케이스워크의 얼굴에는 보름 후에 개최될 파티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차 있었다. " 취드린 공작부인에게 옷과 보석을 보내드려라. 물론 다른 형제들의 몫도 함께." 스위드는 대답하고 나서 가늘게 뜬 회색 눈동자로 케이스워크의 얼굴을 직시했다. 황태자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관찰하듯 바라보는 것은 상당한 무례였지만 케이스워크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스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저 단순한 흥미에 지나지 않아. 쫓겨난 개들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지가 궁금할 뿐이지. 지금에 와서 옛 정 같은 것이 되살아 날 리가 없지." 케이스워크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리자 그에 못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말을 받았다. " 타인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페히너 한 명만으로도 족해." 스위드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얼굴 역시 조금 전의 학자 같은 분위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이마에는 조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검은 색의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 그건 네가 할 말이 아닐텐데, 이제 와서 좋은 사람 흉내는 그만 둬." 음산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풍기는 스위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도 케이스워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그들을 몰락하게 만든 것은 네 힘이었잖아. 설마 그걸 부정하려는 건가?" 스위드의 흐트러진 회색 눈동자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랐다. " 아아, 그랬지. 하지만 계약이었으니까. 이미 페히너는 나의 계약자가 아니야." 현 황제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고 있는 스위드를 케이스워크는 조금 질렸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얼굴에서 지워졌다. " 너도 궁금할 테니까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나는 쓸데없는 일에 네 힘을 빌리고 싶지는 않아." 스위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 이제 집무실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목소리가 다시 평범하게 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묘한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던 스위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이지적인 청년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이마에 떠올라 있던 검은색의 문양 역시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 그래, 슬슬 일을 시작해야지." 케이스워크는 식어버린 찻잔에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테이드는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서 금색 테두리가 쳐져 있는 초대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벌써 몇 분이나 그 초대장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고급스러운 흰색 종이의 가장자리에는 황금을 녹여 붙인 테두리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종이 안에 담긴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맨 아랫 쪽에 찍혀 있는 선명한 인장은 내용을 무마시키고도 남았다. 초대장에 황금색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족들 뿐. 그리고 초대장에 새겨진 인장은 황태자를 상징하는 문자. 초대장의 발신인은 황태자 케이스워크였다. 그것은 이 달 말에 열리는 황태자의 생일 파티에 참석을 바란다는 초대장이었다. 황족이 직접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지만 테이드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제도에서 보낸 시절의 기억은 테이드에게 있어 고통 이상은 되지 못했다. 어린 황태자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오랜 옛날의 추억에 지나지 않았다. 제도에서 추방당한 이후 이런 식의 초대를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추락해 버린 새를 돌아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재미있다는 눈으로 몰락해 가는 가문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 하지만 테이드를 고민에 빠트린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초대장에는 테이드의 이름 이외에도 다른 이름 하나가 더 쓰여져 있었다. 라딘 라메르. 그 일이 있었던 후 지금까지 얼굴조차 보러 가지 않았던 동생의 이름이 황태자의 초대장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 어째서지...?' 테이드는 황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생각을 거듭했지만, 케이스워크는 이미 어린 시절의 귀엽기만 했던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25살의 제국 황태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테이드는 결코 라딘을 제도로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초대를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평생동안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누구에게도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도록 가둬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케이스워크는 마치 그런 테이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초대장을 보냈다. 파티는 앞으로 열흘 후에 열리지만 이틀 내로 준비를 해서 제도로 떠나야만 한다. 테이드는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집사를 불렀다. " 제도에 갈 일이 생겼다.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일을 맡기도록 하지. 그리고....라딘에게도 준비를 시켜." 테이드의 말에 파드웰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를 묻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테이드는 백작가의 주인이었고, 그의 행동에 대해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 출발은 언제 하실 예정이십니까?" 테이드는 잠시 대답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 이틀 후, 취드린 공작가로 간다." " 네,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파드웰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테이드는 책상 위에 놓인 초대장을 내려다보며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 제도....?"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직 발목은 혼자 힘으로 걷거나 일어설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끔 산책을 가는 것 이외에 방에서 나가는 일은 없었다. 하루빨리 이곳에서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낫지도 않은 다리로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노스의 설명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라딘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이유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제는 백작가에 속한 사람으로서 의무를 다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제도라는 곳으로 가면 의문이 풀리는 것도 아닐 테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리도 없는데다, 도현은 처음부터 얌전한 도련님처럼 그 말을 따를 생각은 아예 하고 있지 않았다. " 이 몸으로 여행을 하라는 말입니까? 제도는 마차로도 족히 사흘은 걸린다면서요?" 도현은 이 집의 집사라는 파드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처음 본 것은 기현과 똑같이 생긴 테이드라는 이 집의 주인과 만났을 때 였다. 그 후에는 두어 번 정도 상태를 살피기 위해 들른 적이 있을 뿐,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도 없었다. " 아직 몸이 낫지 않으셨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불편함이 없는 여행이 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 그 파티라는 데에 꼭 참석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라딘의 질문을 듣고 파드웰은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난감함을 느꼈다. 라메르 백작가의 집사로 일하는 동안 파드웰은 라딘이 제대로 말을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라딘은 극히 말이 적었고 타인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다. 하지만 지금 라딘은 지나칠 정도로 당당하게 말을 걸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확고한 의지까지 가지고 있었다. 사실 파드웰 역시 라딘이 테이드와 함께 제도로 가야한다는 사실이 반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테이드의 명령은 이미 내려졌고 그것은 번복할 리가 없는 명령이었다. " 아무래도 황태자님께서 직접 초청을 하신 모양입니다. 귀족으로서 황족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정도는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라딘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 걷지도 못하는 다리로 파티에 참석하라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휠체어도 없는데 무슨 수로 파티장에 들어가라는 거죠? 설마 형이 안아서 데려가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노골적인 빈정거림이 담긴 말에 파드웰 뿐만 아니라 여느 때와 같이 라딘을 방문했던 노스와 시녀 리사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한결 같았다. 라딘 님이 저런 말투를 쓸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경악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라딘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 다 죽어 가는 사람이라도 황족의 말이라면 벌떡 일어나서 움직여야 한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황족을 신이라도 된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아는 라딘도 아니고 라딘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리만 낫는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떠나드릴 테니 쓸데없는 행동은 참아 주세요." 싸늘하기까지 한 라딘의 말이 끝나자 침착하기로 유명한 파드웰조차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 라딘님...."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노스였다. ------ " 어째서 그렇게 부정하시는 겁니까? 모든 사람이 당신을 라딘님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기억이 없다고 해도 명백한 증거가 몇 가지나 있는데 부정하시려는 겁니까? 그런 건 도피밖에 되지 않습니다.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노스는 그 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고용인의 신분으로서 고용주에게 주제 넘는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라딘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물론,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일이 뒤틀려버리면 조금도 반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 도피....? 약하다는 증거....?" 도현은 기가 막혔다. 말이 안 통하는 것은 대체 누구인데, 저렇게 답답하다는 표정이라니. 제대로 된 증거라는 걸 보여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도현 쪽이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얼굴이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아무리 얼굴이 같아도 그렇지 처음에는 이곳의 말도 못했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작정 누구라고 우겨대는 건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 기억을 다 잊으셨다고 해도 라딘님은 가족의 얼굴은 기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째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겁니까?" " 그런 건 나도 몰라. 제일 황당한 건 나란 말이야. 비행기에서 정신을 잃고 나서 이런 낯선 곳에서 다리는 다 부러져 있고, 말은 안 통하는데, 형은 형이 아니고, 나를 엉뚱한 이름으로 불러대고, 가장 이 꿈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나란 말이야!" 화가 나자 도현은 반말로 마구 말을 쏟아냈다. 냉정하게 잘 정리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 천재로 태어난 데다 나이에 비해 조숙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현은 아직 17세의 소년에 불과했다. 가족도 없고, 아는 얼굴도 없는 낯선 곳에서 한 달도 넘게 침대에만 붙들린 채 지내왔다.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어느 때 보다도 열심히 이곳의 말을 익혔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원래 있었던 곳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독하게도 이 꿈은 끝나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꿈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현실감이 강해서 부정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라딘님,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세요. 피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노스의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진지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도현을 진정시키기는커녕 더욱 더 폭발시키고 말았다. " 돌아갈 거야! 돌아갈 거라고. 원래 내 집으로 갈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얼굴이 똑같다는 이유로 엉뚱한 사람 취급당하고, 차가운 형의 얼굴이나 보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이런 건 꿈이야! 꿈이라고!" 도현은 마구 소리질렀다. 그 동안 참아왔던 것들이, 응어리가 되어 가슴속에 맺혀있던 것들이 일시에 폭발해 버렸다. " 라딘님." " 진정하세요." 노스가 절규하는 도현의 어깨를 잡고서 차분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얗게 질려버린 듯한 리사는 허둥대며 찬물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고, 파드웰은 조금 지친 듯한 시선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라딘과 라딘을 달래는 노스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등을 다독이는 노스의 품안에서 라딘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라딘은 계속해서 돌아가겠다고 중얼거렸다. 어느샌가 그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변했지만, 라딘은 멈추지 않았다. " 물을 좀 드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리사가 차가운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노스는 천천히 라딘에게서 몸을 떼고 대신 컵을 받아 손에 쥐어주었다. 컵에 담긴 물을 반정도 마시고 나서 라딘은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붉어진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다시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꺼냈다. " 난...당신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떻게 그렇게 한결 같이 믿을 수가 있지....? 어째서 의심조차 하지 않지?" " 어떻게 라딘님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노스의 목소리와 표정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은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그 진심이었다. 원래 라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른다. 얼굴이 같다고 해도 그런 것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얼굴이 같고 손목에 있는 상처가 같을 지는 모른다. 하지만 다른 것이 분명할 텐데도 어째서 라딘이라고 부르며 그 사실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부정하는 도현에게 오히려 진심을 담은 말과 표정으로 설득하려 하는 것일까. 도현은 차라리 그들이 원하는 대로 라딘이라는 사람이 되어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자신의 인생이 아니다. 우연히 얼굴이 같다고 해서 도현에게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오히려 도현이 원래 있을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인생을 사는 것이 분명하다. 남의 인생 따위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 이번 파티는 중요합니다. 라메르 백작가의 명예를 위해서도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 라딘님을 위해서 목발을 준비하겠습니다." 다시 침착한 얼굴을 되찾은 파드웰이 말했다. 그러자 라딘이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 나는 참석하겠다고 말 한 적 없습니다." 흥분은 확실히 가라앉아 있었는지 말투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 거절하실 수 없는 문제입니다." " 나는 리카도 제국의 국민도 아니고 라메르 백작가의 피가 섞이지도 않았습니다. 참석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를 듣고 파드웰은 무심코 한숨을 쉴 뻔했지만,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 제도에 계시는 루사벨라님을 비롯해 라메르 백작가의 피를 이은 세분이 모두 초대된 자리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노여움을 산다면 가문에 심각한 피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라메르 백작가는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만큼의 위치를 굳힌 것도 모두 테이드 님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잊지 말아 주십시오." 파드웰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럼, 출발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라고 덧붙이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에게 대답을 하려던 도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포기는 했다지만 화가 나는 일인데, 이번에는 말도 안 되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한다. 그것도 걸을 수도 없는 이 다리로.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현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끔찍할 정도로 의심이 없는 그들의 태도.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고 점점 더 복잡한 일이 생기기만 한다. " 라딘님...." 노스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지만 도현은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 저는 오히려 라딘님이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고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비록 지금 라딘님이 아니라고 말하고 계시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런 과거와 결별할 수 있다면 평생 기억하지 못하셔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노스의 말에 리사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노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 태어나면서부터 불행한 아이는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본인이 그 말에 묶여서는 안 됩니다."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라딘 본인이 아니니 기억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잊어버릴 과거 따위가 있을 리도 없다. 라딘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비참하고 우울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알고 싶지도 않고 상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선일텐데, 뚜렷한 무언가가 드러날 조짐은커녕 이 알 수 없는 현실만이 점점 더 넓어져만 갔다. " 오랜만에 루사벨라님을 만나고 오십시오. 파티에 참석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누나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세요. 2년 만이니까 분명 기뻐해 주실 겁니다." 도현은 노스에게 거절하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섞여 있던 누나라는 말에 입이 다물어져 버렸다. 사법고시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다친 동생을 위해 볶음밥을 만들어 주었던 누나 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인데다 천재라는 수식어까지 붙어 다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말투로 찔러대듯 말을 내뱉던 동생이었지만 누나는 알게 모르게 작은 배려를 해 주었다. 도현은 문득 채현이 만들어준 볶음밥을 먹었던 것이 그녀와 이어졌던 마지막이었다는 생각에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갑자기 누나의 얼굴이 미치도록 보고싶어졌다. 그 목소리가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비록 도현이 알고 있는 채현이 아니라고 해도, 테이드처럼 형과 똑같은 얼굴로 굳어진 표정을 짓는다고 해도 누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 .....알았어." 도현은 작게 대답했다. " 네?" " 알았다고." 이번에는 좀 더 소리를 높여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노스가 안도하는 듯이 숨을 내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누나 때문이야. 내가 가는 건 누나 때문이라고.' 도현은 스스로에게 설명하듯 계속 그 말을 반복했다. " 그럼, 쉬십시오." 고개를 돌린 도현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노스와 리사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도현은 한동안 문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다가 사방이 완전히 고요해지고 나서야 침대 위에 털썩하고 드러누웠다. 똑바로 천장을 보고 누운 채 도현은 천장에 새겨진 무늬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때로부터 한 달이 조금 지났다. 비행기가 추락한다고 느꼈을 때는 거짓말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 낯선 천장이 도현을 맞이했다. 그리고 웃기지도 않는 상황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잠이 들 때마다 얼마나 바랬던가. 다음에 눈을 뜰 때는 병원 천장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몇 달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익숙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다시 눈을 떴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꿈같은 세계에서 도현은 매일 눈을 떴다. 다리는 여전히 낫지 않았고, 시중드는 사람이 있는 낯선 방에서 하루를 보낸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아직 낯선 언어로 들리는 목소리가 말을 걸어오면 그제서야 정신을 되돌릴 수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겨우 깨닫고 있었다. 그 동안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던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아직 어리면서 혼자서는 소리지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어린아이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가족들의 사랑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이런 곳에서 살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동안 부모님이 얼마나 자신을 신경 써 주었는지 형과 누나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달았다. 바보처럼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닳을 수 없는 곳에 머물게 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돌아간다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족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고 어리광을 피울 것이다. 나이에 맞게, 그보다 훨씬 유치하다고 해도. 눈 꼬리를 타고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바보 같긴....." 도현은 중얼거렸지만 눈물을 참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망망대해에서 혼자 표류하고 있어도 이런 기분은 아닐 텐데. 세상에 단 혼자만 남겨졌다는 것.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는 것. 돌아가는 방법조차, 아니 돌아갈 수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너무나도 슬펐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현은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문 속에서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의 답은 나오지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갔다. ---------------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파드웰이 준비해 준 목발은 병원에서 익히 봐 왔던 목발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 튼튼해 보이는 지팡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 그것을 받자 마자 도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저런 것으로 낫지 않은 두 다리를 지탱하고 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경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가지고 있는 주제에 목발 하나 제대로 못 만들다니 하는 불만이 마음속에서 뭉실거리며 피어올랐다. " 이제 한 동안은 뵐 수 없겠네요. 잘 다녀오세요." 리사가 아쉬운 듯이 말을 건넸다. 도현은 작게 미소지어 보였다. 그녀에게는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짜증을 낼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싫은 얼굴을 보여 준 적이 없었고, 언제나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었다. 아무리 돈을 받고 한다고 해도 그녀처럼 헌신적으로 움직이기는 힘들 것 같다고 도현은 항상 생각했다. " 무리해서 움직이시지만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생각 같아서는 저도 함께 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안타깝군요." 노스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고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하지만 둘과 당장 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노스는 라딘을 부축해서 저택 입구에서 대기중인 마차까지 움직였고, 리사 역시 마차 안에서 먹을 간단한 음식과 비상 약품이 담긴 바구니를 준비해서 들고 따라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노스의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는 라딘을 테이드는 지켜보고 있었다. 깔끔한 외출복을 걸치고 밖으로 나온 라딘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창백해 보였지만 예전처럼 병적인 창백함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아픈 듯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테이드는 조용히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차의 받침대 앞까지 라딘이 다가오자 먼저 마차에 올랐다. 노스가 거의 안아 올리다시피 해서 라딘을 마차에 태우고 의자에 앉는 것을 돕고 다시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라딘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고, 그것은 테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차 문이 닫히고 채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거리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이 끄는 마차를 타본 것은 15살 때, 미국에 놀러갔을 때였다. 여름 휴가로 가족 전원이 함께 간 여행이었다. 그 후로는 가족이 모두 함께 여행을 갈 기회는 생기지 않았지만 별 아쉬움은 느끼지 못했었다. 도현은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밖을 내다보며 몇 년 전의 여행과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바로 눈앞에도 기현의 얼굴이 있었지만 그쪽은 얼굴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기현이 저런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 제도라니.....어떤 곳일까. 사실 이곳도 제대로 모르는데.....' 누나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으로 갈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제도에 있을 황궁, 그것도 황태자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니 그 생각만 하면 머리에서 현기증이 일어날 것 같았다. 황궁에서 주최하는 파티라면 분명 무도회도 있을 것이고 무도회에서는 당연히 춤을 춰야 한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인사도 해야 할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외국어에 재능을 보였던 도현은 타인과 말하는 것에는 능숙했다. 게다가 형을 도와 통역 일을 하게되고 나서는 사업적인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런 것과 파티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여겨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리를 다쳐서 춤 같은 건 추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 ' 형이라면 분명 이런 곳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자리를 잡아나가겠지.' 도현은 기현의 당당하고 수완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테이드를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채 도현과는 반대편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테이드의 옆얼굴은 아무리 봐도 기현과 똑같았다. 잘 정돈된 검은색 머리카락은 살짝 귀를 가리고 있었고, 목까지 여며져 있는 옷은 양복과 비슷했지만 기능성은 조금 떨어져 보였다. 그래도 기현이 입어서 그런지 모델이 입고 있는 것처럼 잘 어울렸다. 여자들이 신랑감 1순위로 뽑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젊은 사업가인 기현은 남자가 보기에도 멋진 남자였다. 언제나 가족으로서 형제로서 곁에 있었던 탓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현의 얼굴을 살피게 되자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한동안 테이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시선을 눈치챈 듯 고개를 돌렸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도현은 새삼스럽게 그가 자신의 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저렇게나 똑같은데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이러니 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독하게 차가운 눈으로 도현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표정 덕분에 도현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 저런 사람은 절대 형이 아니야.' 도현은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거북한 침묵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싫어한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눈을 마주보고 싶은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예고 없이 다가온 손이 아플 정도로 세게 턱을 쥐고 억지로 고개를 돌려세웠다. 경멸하는 듯한 녹색 눈동자가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 이거 놔." 도현은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하지만 테이드는 손을 놓지 않았다. 도현은 화가 나서 억지로 그 손을 떼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쾅. 테이드가 망설임 없이 비어 있던 다른 손으로 도현의 얼굴을 잡고 마차 벽에 찍어 버렸다. 머리 속에서 순간적으로 새하얀 섬광이 지나간 것 같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고 어지러웠다. 도현은 한순간 신음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테이드의 손에 붙잡힌 채로 늘어져 있었다. "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네가 건방지게 구는 것을 받아줄 생각은 없다." 싸늘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머리를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던 어지럼증이 멎었다. " 황태자의 초대가 아니었으면 널 제도로 데려가지도 않았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말썽을 피우거나 멋대로 구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 말을 잃고 있던 도현은 너무나 황당해서 방금 전에 테이드가 자신의 머리를 가차없이 마차 벽에 밀어붙였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당신의 동생이 아니야. 당신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이유 따윈 없어!" 테이드의 입술이 가느다란 선을 그렸다. 쾅. 다시 한번 테이드가 도현의 머리를 벽에 밀어 붙였다. 이번에는 아예 손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도현은 벽에 세차게 머리를 부딪혔다가 의자 위에 털썩하고 쓰러져 버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머리가 아팠다. 귓가에 웅웅거리는 이명이 맴돌고 머리는 하얗게 비어 버린 채 타오르는 것 같았다. " 으으....." 도현은 작게 신음하며 왼손으로 눈을 가렸다. 흔들거리는 마차의 진동을 몸으로 느끼며 도현은 깨질 것 같은 머리의 통증이 조금이나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 다시 한 번 같은 소리를 해 봐." 차가운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지만 도현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도현은 겨우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머리는 아직도 지독하게 욱신거렸지만 어떻게든 상체를 일으켜 벽에 기대앉을 수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 미쳤어.....' 도현은 입 밖으로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사람을 무자비하게 폭행 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동생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도현은 테이드가 기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형과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는데 계속 그렇게 자기 암시처럼 중얼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형이 아니더라도 얼굴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으로 믿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테이드는 그런 도현의 기대를 가차없이 배반해 버렸다. 녹색 눈동자가 아무리 경멸의 빛을 담고 있어도, 적어도 동생으로 인정하고 있다면 이렇게 마구 대할 리는 없을 텐데. 도현은 테이드가 형인 기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에서 통증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아직도 기억이 되돌아 온 것 같지는 않군. 머리에 충격을 주면 기억이 되돌아 올 수도 있다던데 아직 부족했나?"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은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 ....돌아올 기억 따위....." 도현은 그 말에 작게 웅얼거리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채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테이드가 죽일 듯한 증오가 섞인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도현은 묻고 싶었지만 눈빛이 너무 강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당한 폭력 때문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걸을 수만 있으면 당장에 마차 밖으로 뛰어 내리고 싶을 정도였다. "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곧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하게 될 거야. 제도에 가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보고 수군거리겠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잊지 않는다."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엄청난 과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도현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얼굴이 똑같다고 해서 그 사람이 될 리가 없으니까. 장본인의 기분이나 마음 같은 걸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테이드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나 차가운 말을 들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제도에 갈 이유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도현은 입을 열지 못했다. 도망칠 수도 없는 마차 안에서 또 다시 폭력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반드시 했었지만 지금 그렇게 행동하다가는 맞아서 기절할 지도 모른다.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라딘을 테이드는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검은색의 눈동자는 동요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결코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겁에 질려 시선을 피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기억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저런 것이었나. 불리한 기억 따위, 고통스러운 과거 따위가 지워져 버리면 저렇게 당당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이었나. 테이드는 라딘의 얼굴을 집요할 정도로 계속 응시했다. 제도에 가면 분명 테이드와 라딘, 루사벨라의 등장에 사람들이 관심을 드러낼 것이다. 루사벨라는 2년 전부터 사교계에 진출해 얼굴을 알렸지만 테이드와 라딘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7년 전의 대스캔들 이래로 몰락해 버린 라메르 백작가의 자식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사람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황태자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테이드는 일부러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초대장은 황태자의 이름으로 보내온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태자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라메르 백작가가 몰락하기 전에는 황궁 정원에서 3살 어린 황태자와 함께 놀았던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오랜 과거에 불과한 것이었다. 현 제국 황제인 페히너와 얽혀서 벌어졌던 스캔들은 라메르 백작가 만을 철저하게 무너트렸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게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남아 있는데, 라딘은 지금 그 고통에서 혼자서만 도망쳤다. 고통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계속해서 괴로워해야 할 장본인이 도망쳐 버린 것이다. 테이드는 그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조금전의 일로 인해 라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힘이 드는 것처럼 간신히 등을 기대고 있었지만 여전히 검은 눈동자는 테이드에게 확실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테이드가 하는 말은 믿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마차는 번화한 도시에 들어섰다. 돌로 포장된 길을 쭉 따라가다가 마차가 멈춰선 것은 깔끔해 보이는 한 여관 앞이었다. 마부가 바닥에 내려서 마차의 문을 열자 테이드가 먼저 내려섰다. 그는 차갑게 안을 노려보고는 먼저 여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걷는 것이 힘든 도현은 입술을 깨물며 마차 구석에 놓여 있던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발목이 통증을 호소해왔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문앞에 선 마부의 도움으로 어찌해서 내려설 수 있었다.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머리 속에서 현기증이 일어나는 바람에 도현은 잠시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마부가 거북한 시선을 던지고 다시 마부석에 올라 마차를 이동시키는 동안 도현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인어 공주가 다리를 얻어서 걸어다녔을 때의 느낌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걸을 때마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 나쁜 놈 같으니, 다친 사람인데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나? 형이랑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성격은 최악이야.' 도현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느릿느릿 여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몇 분이나 걸려서 몇 계단 안 되는 여관 계단을 올라 입구에 들어섰을 때는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와 있었다. 한쪽 다리만 다쳤으면 한발을 들고 그냥 뛰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양쪽 발을 다 다친 탓에 걷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고문이 되었다. 도현이 안에 들어서자 깔끔한 카운터와 한산해 보이는 식당이 보였다. 문이 열려 있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식당은 유럽풍의 평범한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였다. " 라딘님이십니까? 방은 2층에 있습니다. 2층에 올라가서 바로 오른쪽에 있는 두 번 째 방입니다. 일행분은 먼저 올라가셨습니다." 인상 좋아 보이는 30대 중후반의 주인이 미소 띈 얼굴로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꽤 길어 보이는 계단을 본 순간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경직되어 버렸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온갖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2층이라니. 입에서 욕이 절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 백작가라면 시종 한 둘은 데리고 다녀야 하는 것 아니야? 백작가의 주인을 비롯해서 마부도 그렇고 다친 사람을 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야!' 도현은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점점 창백하게 변하는 도현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피던 주인이 말을 걸었다. 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 다리를 좀 다쳐서 그러는 데 2층까지 부축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다. 이 사람에게라도 도움을 받지 않으면 2층까지 올라가는 데 10분은 걸릴 지도 모른다. 주인은 도현의 말을 듣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제 어깨를 잡으세요." 도현보다 약간 작은 키의 주인이 카운터에서 걸어 나와 도현의 옆에 섰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쥐고 왼손으로는 주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도현은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상당히 아팠지만 계속 어물쩡거리면서 통증을 지속시키기보다는 한 번 확 아프고 만 것이 낫다는 생각에 도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다 올라갔을 때에는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도현은 친절한 주인의 도움을 받아 테이드가 먼저 들어갔을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좁은 거실 같은 것이 보였고 왼쪽에 문이 두 개, 오른 쪽에 또 문이 하나 있었다. " 왼쪽이 침실, 오른쪽이 욕실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불러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주인은 조용히 문을 닫고 방에서 나갔다. 도현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거실에 놓인 긴 쇼파로 걸어가 그 위에 털썩 하고 주저앉았다. 마치 마라톤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이마에 배어 나온 식은땀을 닦아내고 나서 도현은 지쳐서 쇼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몸을 눕히고 조금 쉬고 나자 이번에는 배가 고파왔다. 마차 안에서 먹으라며 리사가 간단한 도시락을 싸주었지만 테이드와 분위기가 험악해진 바람에 그런 것을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바구니도 마차 안에 그대로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하지만 다시 움직일 기분은 들지 않았다. 도현은 그대로 쇼파 위에 몸을 맡기고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얼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도현은 눈을 떴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테이드가 도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도현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 또 무슨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조심하는 편이 이롭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네 방은 저쪽이다." 귀찮다는 듯이 말을 내뱉으며 테이드는 입구와 가까운 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도현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테이드는 고개를 돌리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밥 먹으라는 말도 안 하네...." 도현은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결국 일어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마차에 시달린 것도 그렇고, 테이드의 폭력에 당한 몸도 그렇고, 조금 전에 억지로 걸어다녀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피부가 하얗고 몸이 가는 편이어서 겉보기에는 약해 보여도 도현은 사실 건강체였다. 잔병치레를 한 적도 없고,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계속 몸이 좋지 않았다. 이래서는 완전히 병약한 소년이다. 도현은 너무 한심한 상황 때문에 피식하고 웃었다. 배는 고프지만 지금은 잠을 자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쇼파 가장자리에 기대어 세워놓았던 지팡이를 잡고서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찌푸리며 걸음을 옮겨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흰 시트가 덮여 있는 침대가 보였다. 도현은 씻을 생각도 못하고서 침대 위에 털썩 하고 몸을 던졌다. 그렇게 푹신하지는 않았지만 깨끗한 침대에 눕자 금방 잠이 밀려왔다. 1층에 내려가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라딘은 이미 침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겨우 움직인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으로 옷도 벗지 않고 신발만 벗은 채 침대 위에 엎드리듯 쓰러져 있었다. 테이드는 라딘의 침실 입구에 선 채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잠이 들었을 때야 비로소 본연의 모습을 내보인다. 라딘 역시 그랬다. 어머니를 닮은 섬세한 얼굴은 어둠 속에서 더욱 창백하게 보였다. 고요하게 보이는 그 얼굴을 주시하는 동안 마음속에서 금방이라도 목을 졸라 부러트려 버리고 싶은 적의가 피어올랐다. 모든 것이 저 얼굴 때문이었다. 저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때문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라메르 백작가의 핏줄임을 드러내는 증거가 모든 것의 원흉이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배속에서 사산되어 버렸다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라딘은 태어났고, 라메르 백작가는 무너졌다. 비웃음과 노골적인 조롱이 담긴 시선 속에서 자존심은 부서져 내리고 재산은 타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테이드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고개만을 옆으로 돌린 채 잠든 라딘은 피곤했는지 테이드가 목에 손을 가져가도 깨어나지 않았다. 가느다란 목을 한 손으로 잡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쉽게 부러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테이드는 힘을 가하지 않고 목에서 손을 떼버렸다. 그리고 라딘의 몸을 살짝 들어 올려 바르게 눕히고 나서 겉옷을 벗기고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주었다. 이불을 가슴 위로 덮어주고 나서 테이드는 몸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갔다. 어깨에 닿는 타인의 손의 감촉에 깜짝 놀라 눈을 뜨자 냉랭한 얼굴의 테이드가 깔끔하게 옷을 갖춰 입은 채 도현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 ....아침...?"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멍한 시선을 들어 올려 도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고, 화창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 " 5분 후에 출발한다." 테이드는 그렇게만 말하고 나서 방을 나가버렸다. 도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번쩍하고 정신이 들었다. 5분 후에 출발이라니. 제대로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빠듯한 시간인데, 다친 사람에게 5분 동안 모든 준비를 하라고? 잠시 기가 막혔지만 지금은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도현은 다리만 멀쩡했으면 당장에 도망쳤다고 뿌득거리며 이를 갈았다. 고통을 무릎 쓰고 억지로 일어나 문을 열고 욕실로 갔다. 통증 때문에 조금 흐릿하던 신경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해졌다. 어제 아침 이후로 밥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파 복통이 일 지경이었지만 우선 씻고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은 발목의 통증을 참아내며 세수를 하고 다시 침실로 돌아오자 발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아파왔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바지를 걷어올리자 발목 부위가 척보기에도 상당히 심하게 부어 올라 있었다. " 젠장, 역시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했어." 이곳에는 아무런 도구도 없으니 빨리 마차에 돌아가서 붕대로 테이핑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뼈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선인데 억지로 움직여서 덧난 것이 분명했다. 한 달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했는데 잘못되어서 몇 달 동안 더 고생하게 되거나, 최악의 경우 평생 불구가 되어 산다거나 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도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언제 벗었는지 모를 겉옷을 걸치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방을 나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식은땀을 흘리며 어찌어찌해서 겨우 계단을 내려갔다. 스스로의 의지에 탄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카운터에 서 있던 주인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다가 하얗게 질린 도현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며 달려와 부축을 해 주었다. " ....감사합니다." 도현은 인사를 하며 그의 부축을 받아 문 앞에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마차 안에는 이미 테이드가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도현은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자 마자 의자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던 바구니를 끌어 당겼다. 그 안에는 유리병에 담긴 식어버린 주스와 딱딱해져 버린 빵과 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칸막이로 나누어진 다른 한 쪽에는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물약과 조금 뻣뻣한 천을 잘라 만든 붕대가 있었다. 도현은 먼저 물약을 꺼내 한 모금을 마셨다. 쉬어빠진 포도주 같은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도현이 약병을 다시 바구니에 넣고 막 붕대를 꺼냈을 때,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도현은 한쪽 다리를 억지로 들어올린 후 입술을 깨물며 발목에 테이핑을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었지만 실습 몇 번하고 끝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대로 감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풀었다가 감았다가 하는 사이에 겨우 오른발에 테이핑을 마칠 수 있었다. 왼쪽은 조금 수월하게 끝냈다. 욱신거리며 열기를 전하는 발목과 공복 때문에 잠깐 움직였을 뿐인데 힘이 다 빠져버렸다. 도현은 마차 창 문 쪽으로 비스듬히 기댄 채 바구니 안에서 미지근한 주스를 꺼내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아직 입안에 약 맛이 남아 있어서 처음에는 상당히 시큼했지만 다시 한 모금을 마시자 그럭저럭 주스 본연의 맛이 느껴졌다. 병 뚜껑을 닫고 바구니에 집어넣었을 무렵, 도현은 그제서야 테이드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조금 기묘한 시선으로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의 그 냉랭한 시선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도현은 울컥하고 화가 치밀었다. 밥 먹으라는 소리도 하지 않고, 부축도 해 주지 않아서 발목 상태는 더욱 나빠진 데다 몸에 힘도 없고, 어제 부딪힌 머리는 내출혈이라도 일으켰는지 혹이 났는지 벽에 살짝 기댄 것만으로도 아팠다. ' 젠장...' 도현은 시선을 돌리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 귀족이란 게 원래 저렇게 싸가지가 없는 거야?' 낡은 가죽으로 감싸인 시트에 시선을 던지며 도현은 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마음 같아서는 입 밖으로 꺼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어제의 일은 도현에게 뼈저린 교훈을 새겨 주었다. 묘하고 거북한 침묵 속에서 도현은 계속 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런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 4일 동안 계속된 마차 여행은 도현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식사를 챙겨주기는커녕 부축조차 해주지 않는 테이드와 마부 덕분에 도현은 리사가 챙겨준 굳은 빵과 주스로 연명을 해야 했고, 계속 움직인 발목은 악화되었다.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약도 3일째 되던 날 다 떨어져 버려서 취드린 공작가의 저택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도현은 통증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차의 덜컹거림도 상태 악화에 한 몫을 해 주었다. 마차 안의 긴 의자에 가로로 누워버린 도현의 얼굴은 초췌하고 창백했다. 누가 봐도 그 얼굴은 병자였다. 도현은 비몽사몽간에 마차가 멈춘 것을 알았지만, 그것에 기뻐할 여유도 몸을 일으킬 힘도 없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인사를 하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렸지만 점점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거의 실신 상태에 이른 라딘을 보고 테이드는 마중 나온 취드린 공작가의 집사에게 동생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나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의 시선이 테이드의 얼굴에 달라붙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고 안내를 받아 루사벨라와 취드린 공작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선명한 푸른색의 드레스 차림인 루사벨라는 응접실에 테이드의 모습이 나타나자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포옹했다. 화사한 얼굴 표정을 보고 테이드는 조금 안도했다. " 어서 오게, 라메르 백작." 온화한 인상의 취드린 공작이 루사벨라가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인사를 건네왔다. 테이드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루사벨라와 함께 응접실 테이블에 앉았다. 하녀가 다가와 차와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테이블 위에 늘어놓는 동안 취드린 공작과 루사벨라는 그의 안부를 물었다. " 오랜만이지만 역시 변한 것이 없어 보이네요. 이번 파티 때는 여자들의 시선이 오라버니께 몰리겠군요." 루사벨라는 24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스무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확실하게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은 그녀는 갈색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려 보석 핀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드러난 목덜미는 섬세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드레스에 감싸인 늘씬한 몸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 글세...." 테이드는 관심 없다는 듯이 짧게 대답했지만, 루사벨라는 그의 말에 함축된 뜻을 확실하게 읽어냈다. 가벼운 대화가 오고가던 중에 빛 바랜 회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긴 늙은 집사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와 인사했다. " 라딘님은 방으로 모셨습니다.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의사를 불러 조치하도록 했습니다." 집사의 말에 취드린 공작의 주름진 얼굴에 잠시 흥미로운 표정이 떠올랐지만 금새 사라졌다. 하지만 테이드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 저런, 마차 여행이 무리였던가 보군요. 파티가 열릴 때까지는 나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 지금 라딘은 다리를 다쳐서 걸을 수가 없습니다. 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큰 일입니다." 테이드의 대답에 루사벨라는 약간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고, 취드린 백작은 더 이상 흥미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집사에게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 아,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 선물....?" 테이드가 의아하게 묻자 루사벨라가 대답했다. " 무도회에서 입을 만한 옷과 보석류에요." 그 말을 들은 순간 테이드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황태자는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었다. 몰락한 라메르 백작가의 자식들에게 옷과 보석을 보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무도회에 입고 나올 만한 옷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심 쓰듯 그것들을 보낸 것이 분명하다. 실제도 라메르 백작가가 테이드의 노력에 의해 일어선 것은 사실이지만 사치스러운 물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도까지 오는 여행도 말 두 마리가 끄는 낡은 마차를 타고 왔고, 시중을 드는 사람도 마부 한 명밖에는 데리고 오지 않았다. 도중에 묵은 여관도 결코 귀족들이 묵을 만한 수준의 여관은 아니었다. 예전에 대 귀족이라 불리던 시절에는 결코 상상도 못했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면서 살기에 현실은 냉정했다. 루사벨라는 테이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 것을 알아채고 얼른 화제를 바꿨다. " 그나저나 라딘의 몸이 좋지 않다니 걱정이군요. 어렸을 때부터 그리 건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때에 다리를 다치다니." 테이드의 표정은 금방 평상시대로 돌아왔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마차 안에서 내내 봐 왔던 라딘의 얼굴과 행동, 말투가 지워지지 않았다. 17년이나 봐 왔는데도, 요 며칠간의 일이 과거의 기억들 보다 훨씬 선명했다. " 그리고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 만나 보고 놀라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 저런...." 취드린 공작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테이드도 루사벨라도 잘 알고 있었다. 겉모습은 온화한 중년인이지만 그는 속에 칼날을 숨기고 있는 인물이었다. " 저녁때 한 번 찾아가야 겠군요. 얼굴을 본 지도 2년이나 되었으니까." 루사벨라의 말대로 라딘은 2년 전 취드린 공작과 루사벨라의 결혼식 이래로 그녀와 만난 적이 없었다. 테이드는 가끔 공작가에 들러 그녀와 만나기도 했지만, 라딘은 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그녀와 만날 일도 없었다. 30분 정도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테이드는 머물 방으로 안내 받았다. 목욕을 하고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나자 방으로 식사가 운반되었다. 여행의 피로를 생각한 루사벨라의 배려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나서 테이드는 라딘이 머물고 있는 방을 물었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복도 반대편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흰 천개가 드리워진 침대에 잠들어 있는 라딘이 보였다. 편안해 보이는 모슬린 잠옷으로 갈아 입혀진 라딘은 흰 시트에 푹 파묻혀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그런 라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테이드의 입가에 가드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여행 내내 테이드는 일부러 라딘이 다리를 혹사시키도록 만들었다. 제대로 치료를 해주지 않았지만 부러진 발목은 빨리 나아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부러트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테이드는 일부러 라딘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첫날 마차 안에서 대들었던 라딘은 테이드의 폭력에 겁을 먹었는지 그 후에는 얌전해졌다. 배가 고플 것이 분명했는데도 식사를 요구하지도 않고, 마차 안에서 식어빠진 주스와 빵을 먹으며 4일을 버텼다. 기억을 잊었다고 해도 쓸 데 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쟁이에 언제나 주눅이 들어있는 주제에 이상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는 라딘이었다. 테이드는 황태자가 라메르 백작가의 혈육들을 무슨 의도로 초대했는지 확실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뜻에 따라 움직여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백작가의 명예를 위해 황태자가 보내준 옷은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라딘을 그대로 파티장으로 데려가 과거의 대 스캔들을 다시 되살릴 생각은 없었다. 현재 라딘의 상태라면 파티장에서 황태자에게 인사를 하는 정도도 힘들 것이다. 테이드는 최대한 빨리 라딘을 파티장에서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다. 라딘의 존재 자체가 소문을 불러일으키고, 과거를 되살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테이드는 지금까지 라딘을 저택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천개를 살짝 들어올린 채 잠든 라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테이드는 이윽고 손을 떼고 등을 돌렸다. " 라딘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군요." 생각에 잠긴 탓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테이드는 작게 속삭이듯 말하는 루사벨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장거리 여행은 오랜만이었으니까." 루사벨라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라딘이 태어나고 채 1년도 되지 않았을 무렵 라메르 백작가는 제도에서 지방으로 쫓겨나듯 거처를 옮겨야 했다. 고풍스러운 성에서 작은 저택으로 거처가 옮겨지고 백 명이 넘던 고용인들도 10명 이하로 줄었다. 루사벨라는 그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발목이 상당히 부어 올라 있어서 당분간 걷는 것은 무리라고 하던데, 파티에 참석할 것이 걱정이네요." " 어떻게든 해야겠지." " 방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세요? 아니면 이곳에서 라딘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실 건가요?" 테이드가 막 입을 열고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 누나....?" 천개 안쪽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라딘이 작은 목소리로 루사벨라를 불렀다. " 누나....?" 얇은 천 너머로 누나의 얼굴이 보였다. 선명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누나 채현의 실루엣이 틀림없었다. 도현은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어떤 상황인지는 제쳐두고 상체를 일으켰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까닭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누나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 라딘. 몸은 좀 어떠니?" 천개가 오른쪽으로 거둬짐과 동시에 짙은 푸른색 드레스 차림의 채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 누나!" 도현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 누나의 얼굴을 보고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파티장에서나 어울릴 법한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위화감은 잠시 접어두었다. " 누나, 그렇게 입으니까 공주님 같은데?" 도현은 웃으며 어깨에 내려앉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도현을 어렵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채현은 항상 도현을 염려해 주었다. 지난번에 손목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칼자국이 생겼을 때도 그랬다. 그 당시에는 그런 채현의 염려가 쓸데없는 참견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니?" 채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런데, 발목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아서 파티장에 갈 일이 걱정이야. 제대로 걷지도 못할텐데." " 난 파티에는 안 가. 누나 얼굴 보러 왔을 뿐이니까." 도현의 대답에 놀란 루사벨라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 그게 무슨 소리지?" 루사벨라의 뒤쪽에 조용히 서 있던 테이드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순간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경직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해야할 말을 삼키고 싶지는 않았다. " 이제 겨우 알았으니까. 이곳에 아무리 내 가족들이 있다고 해도 여긴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이상은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로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나도 당신들을 내 형이나 누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무리야. 이렇게나 똑같은데 타인이라고 여긴다는 것 자체가 너무 우스운 일이지. 하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니까." " 라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루사벨라의 얼굴이 기묘한 의문으로 굳어져 있었다. 도현은 차분한 시선으로 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보석핀으로 고정시키고, 몸에 잘 맞는 드레스를 입은 채현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 색이 자연스러운 갈색이라는 사실만 빼면 눈앞의 아가씨는 어떻게 봐도 채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절대 채현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테이드가 기현이 아닌 것처럼 루사벨라 역시 채현이 아닌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누나와 형을 끌어안고 그 동안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도현의 친형제가 아닌 타인이었다. " 이래서야....평행우주가 있다는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잖아...." 도현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런 식으로 도망칠 생각이냐, 라딘?" 싸늘하게 식어버린 테이드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 도망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야. 정말로 친형제라면 얼굴이 같다는 이유로 친동생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지. 난 기억 따윈 잃어버리지 않았어. 처음부터 잃어버릴 기억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당신들이 아무리 그렇게 되길 원한다고 해도 나는 라딘이 될 수 없어. 난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동안 도현은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지난 한 달 동안은 말도 통하지 않고, 부상까지 입었던 상태여서 정말 약해져 있었지만. 게다가 어쩌면 이 상황은 꿈일 지도 모른다고, 아니라면 기억에 혼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사실을 이제 확실하게 깨달았다. 테이드가 말하는 도피라는 것은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 상황 속에 안주하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폭력 때문에 그런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사람에게는 죽어도 지켜야할, 받아들여야 할 진실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도현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테이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루사벨라 역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 도현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도현은 간단하게 웃으며 농담이었다고 말 할 생각은 없었다. --------------- " 어떻게.....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루사벨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 어째서 이곳에는 아무도 내가 다른 사람이란 걸 알아채는 사람이 없는 거지? 얼굴이 똑같아도 말투나 성격이나 모조리 다를 텐데, 뭐가 쓰이기라도 한 거야?" 투덜거림 같은 도현의 말은 테이드와 루사벨라의 얼굴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었다. " 네가 부정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난 널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으니까." " 그건 당신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에요." 도현은 일부러 딱딱하게 존댓말로 말했다. 테이드는 도현이 당신이라고 부를 때마다 더욱 더 차가운 눈이 되었다. 그 눈빛은 오싹 할 정도였다. 그래서 도현은 더욱 더 테이드가 형이 아닌 완전히 다른 타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현이라면 저런 눈을 하지 않을 테니까. "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를 못 믿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내가 그 상황에 놓여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 미안하지만 난 당신의 동생이라는 라딘이 아니고, 라메르 백작가의 피는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어. 이곳에 유전자 감식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면 당장에 문제가 해결되겠지만...큭.." 도현은 갑자기 숨이 턱하고 막혀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테이드가 어느새 손을 뻗어 도현의 목을 내리 누른 것이다. 도현은 가해진 힘 때문에 침대에 박힌 채 괴롭게 숨을 쉬고 있었다. " 크......대..체.. 말..로.. 못..하면..폭력..이야..." 도현은 겨우겨우 말을 꺼냈지만 목에 가해진 힘이 더욱 세게 변해서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 테이드 오라버니!" 도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루사벨라가 테이드의 팔에 매달려 억지로 팔을 떼어냈다. 콜록콜록. 목을 누르고 있던 손이 풀리자 도현은 격하게 기침을 하며 몸을 구부렸다.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혀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 네가 아무리 벗어나고 싶다고 해도 넌 라메르 백작가의 아들이고, 네 성은 라메르다."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차가운 어조였다. 도현은 몇 번이나 기침을 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는 것은 머리 속에서 용납하지 않는다. " 세상에 부모를 선택해서...태어날 수 있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어.... 부모와 자식을 이어주는 것은 몸 속에 섞여있는 피지만.... 사람 말을 믿지도 않고 무턱대고 화내는 건 그만 두지 않겠어? 한 가문의 가주라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꼴불견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이에 맞게 좀 더 제대로 행동하지 않겠어? 형이랑 같은 얼굴로 그렇게 움직이지 말라고! 형에 대한 이미지까지 나빠진단 말이야!" 소리를 지르자 목이 상당히 아팠지만 도현은 참을 수가 없었다. 마차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도움의 손길조차 주지 않고, 배려조차 해주지 않는 테이드를 보면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굳어버린 빵을 억지로 먹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백작가의 저택에서는 괜한 미련 때문에 밍기적 거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리 부상 따위를 핑계 대지 말고 떠나야 한다. 더 이상 이런 곳에 남아있다가는 돌아버릴 지도 모른다 " 보통은 사람이 이렇게 부정하면 의심이라도 해본 다고! 상식을 모르는 것에도 정도가 있단 말이야!" 도현이 갈라지기 시작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테이드는 조금도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차가워진 표정과 눈빛으로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는 마치 할 말은 그걸로 끝이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루사벨라만이 무척 놀라서 침대 구석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 이번에는 발목이 아니라 목이라도 꺾어 줄까? 다시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안부인사라도 건네는 것처럼 평이한 어조여서 도현은 처음에는 테이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귓가에 맴도는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 생각하자, 얼굴이 질려 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 당신...이야? 당신이 그랬어...?" 테이드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지만, 도현은 눈에서 이미 그 답을 읽었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쳤다. 이 남자는 미쳤다. 지독하게 냉정해 보이는 녹색 눈동자는 지독한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같은 얼굴이라는 안도감과 형에 대한 호감 때문에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마차 안에서 사정없이 머리를 벽에 박아버렸을 때도 그랬지만,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도현은 순간적으로 굳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오라버니....." 순식간에 질리고 지쳐버린 듯한 안색으로 루사벨라가 고개를 돌려 테이드를 불렀다. " 이제 그만해요..." 루사벨라의 말에 테이드가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 라딘이 지금 어떤 말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예전부터 저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이제 그만 라딘을 놓아주세요." " 루사벨라." 테이드는 기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루사벨라를 응시했다. 도현은 상체를 약간 일으켜 세운 채 조심스럽게 둘을 관찰했다. " 이미 17년이 지났어요. 라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오라버니도 알고 있잖아요. 어머니가 낳은 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지나치게 빼 닮은 것이 죄가 되나요? 라딘은 아무 것도 몰랐잖아요.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는 거에요. 이미 시간이 너무나 흘렀고, 라딘은 충분히 고통받았어요. 모든 걸 잊었다면 차라리 그냥 놓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루사벨라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공작부인의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인 어머니의 얼굴과 비슷하게 보였다. 테이드와 루사벨라의 모친은 가문의 몰락 후에도 당당했다. 아버지가 무너져버린 것과는 반대로 그녀는 섬세하고 여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몰락해 버린 가문이지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했다. 테이드가 정식으로 가문을 물려받기 전까지 그녀가 분발했기 때문에 라메르 백작가는 완전히 몰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 우리 모두가 잘못한 거에요. 너무나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웠으니까 모든 책임을 라딘에게 돌렸잖아요. 심지어는 어머니까지도 라딘을 돌볼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라딘에게 책임을 미루기 전에 생각을 했었어야 했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둔 결과가 지금 이거에요. 오라버닌 이런 결과를 바랬나요?" "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라. 지금은 좀 쉬는 게 좋겠다." 테이드가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루사벨라는 테이드의 손을 거절했다. " 제 잘못이에요. 도망친 건 저에요.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서, 몰락의 증거가 너무나도 확실한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서 취드린 공작의 청혼을 받아들였어요. 오라버니는 굴욕적인 결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 만족해요. 적어도 이곳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으니까요." " 루사벨라 넌..." " 더 이상은 라딘을 책망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사랑은커녕 관심도 받아보지 못한 가엾은 아이에요. 전 오히려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지금 라딘의 모습에 만족해요.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 않은 라딘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오라버니도 알고 계셨죠....?" 테이드는 침묵했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둘 사이는 끼어들 수 없는 장막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현은 방관자의 입장에서 테이드에게 애원하는 루사벨라와 도현에게는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짓는 테이드를 보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둘의 대화는 분명 자신을 가운데에 두고 오고가는 것이었지만 정작 대화의 화제가 된 도현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완전한 타인이었다. 사람들의 태도나 반응에서 미루어 보건데 라메르 백작가에는 뭔가 커다란 일이 있었고, 그 일에는 도현과 같은 얼굴을 가진 라딘 이라는 사람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끈적한 거미줄 같은 분위기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자살을 시도하거나 성격이 음침해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하지만....과거는 결코 바꿀 수 없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연 테이드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테이드의 표정에 엷은 고통의 빛이 떠올라 있어서 도현은 조금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는 하지만 이런 표정도 짓는 구나 하는 묘한 감탄이었다. " 황태자 전하의 이번 초청을 계기로 삼는 거에요.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곳에서 다시 매듭을 짓는 거에요. 무슨 의도로 우리 셋을 모두 초대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적어도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황태자라는 이름이 나오자 테이드의 표정이 다시 딱딱해졌지만, 루사벨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 과거는 바꿀 수 없어도 남은 시간은 바꿀 수 있잖아요." 대답 없는 테이드에게 루사벨라는 미소 띈 얼굴을 보여 주었다. " 조금씩이라도 바꿔나가요. 오라버니. 그리고...라딘 너도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 루사벨라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말을 걸어온 바람에 도현은 깜짝 놀랐다. 영화 관람객에서 갑자기 주연배우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 그렇게 말해도 기억이 돌아올 리가 없다니까....." 루사벨라는 손을 뻗어 도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 그 동안 미안했어..... 이 세상에 단 세 명뿐인 형제인데 말이야..." 그 목소리가 너무나 따뜻해서 도현은 순간적으로 채현이 말을 건네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 그 사과는 진짜 동생이 돌아오면 해. 나는 잠깐 맡아두기만 할 테니까." 도현은 쑥스러움을 감추며 그렇게 말했다. " 루사벨라. 넌 이만 돌아가라. 나는 라딘과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 루사벨라는 테이드에게 고개를 돌려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미소 지으며 일어났다. 물기를 가득 담은 채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는 처음 나타났을 때 보여주었던 자신감과 우아함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 라딘이 걸을 수 있도록 약이라도 구해볼게요. 너무 오래 계시지는 마세요. 오라버니도 이제 쉬셔야죠." " 그래." 온화한 눈으로 루사벨라를 전송하던 테이드의 표정은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는 루사벨라의 말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자, 이제 이야기를 계속 해 볼까?" 도현은 기가 막혔다. 명배우가 따로 없다. 누나 앞에서 보여주는 얼굴과 도현에게 보여주는 얼굴이 완전히 다르다. 조금 전에는 루사벨라를 안도시키기 위해서 그녀의 말을 듣는 척 했던 것이 분명하다. " 믿지도 않을 거면서 무슨 얘기? 또 말하라고 해 놓고 때리거나 목을 조를 려고?" 자신이 듣기에도 빈정거림이 역력한 말투였지만 도현은 참기에는 이미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 네가 라딘이 아니라면 원래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도 좋아. 하지만 그런 곳이 어디에 있지?" 테이드 역시 빈정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 질문에 도현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테이드의 지적은 도현의 약점을 찌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돌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이곳이 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지, 지구가 맞기는 한 건지...아니면 도현이 살고 있던 3차원의 세계이긴 한 건지.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도현이 살아있다는 것,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찾아낼 거야. 난 내 인생을 살 거야. 남의 인생을 살 생각은 없어. 가족들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거야. 반드시." 도현은 테이드의 녹색 눈동자를 힘있는 눈으로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말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 Part 4. A precious stone 황궁 대 연회장에 속속 초대객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지위가 낮은 귀족들이 먼저 도착하고 지위가 높은 귀족일수록 도착 시간은 뒤로 미뤄진다. 오랫동안 황궁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아온 노련한 시녀장과 시종장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파티 진행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시녀와 시종들을 닥달해 움직이게 만들었다. " 피요드 후작님과 후작부인 이십니다." " 룬드 남작님이십니다." 귀족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큰 목소리와 함께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연회가 시작되고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연회장 입구에 몇몇 귀족 무리가 도착했다. " 취드린 공작님과 공작 부인이십니다." 뒤이어 시종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 라메르 백작님과 라딘 라메르님이십니다." 그 소리가 퍼진 순간 연회장안이 순간적으로 술렁였다. 소문으로 라메르 백작가의 남은 세 명이 이번 파티에 초대 되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지만,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 정식으로 사교계에 진출해 있는 취드린 공작 부인을 제외하면 남은 두 아들이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메르 백작의 작위를 이은 테이드의 얼굴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스캔들의 원흉이 된 막내 아들 라딘 라메르의 얼굴은 오늘 처음으로 보게 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하던 행동을 모두 멈추고 연회장의 입구를 주시했다. 귀족이라는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17년 전에 일어났던 라메르 백작가의 스캔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만큼 그들의 관심은 지대한 것이다. 화려한 꽃처럼 화사하게 보이는 취드린 공작부인이 취드린 공작과 나란히 들어서고 그 뒤를 검은색의 예복 차림인 테이드와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길다란 나무 지팡이 같은 것을 끼운 채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소년이 보였다. 다리를 다친 것인지 원래 다리를 쓸 수 없는 것인지 그 또래의 소년치고는 꽤 큰 키를 가진 테이드와 닮은 얼굴의 소년은 나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저쪽이...." " 어머니의 얼굴을 빼닮았군." 이곳 저곳에서 작은 속삭임이 오고갔다. 연회장에 퍼져 가는 술렁임은 그 화제의 장본인이 된 테이드나 라딘에게도 느껴질 만큼 소요가 컸다. 하지만 화제의 장본인인 소년은 그런 그들의 반응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한 충격으로 모든 걸 잊었다기엔 네 태도가 너무 다르다. 하지만 난 널 알아보지 못할 만큼 눈이 나쁘지 않아." 노려보는 도현에게 테이드가 건넨 말이었다. 도현은 코웃음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동생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로 오만하게 말하는 사람이 정작 진짜 동생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그 눈은 삐뚤어진 게 아니냐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 하지만 세상에 같은 사람이 둘이나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지 않는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테이드의 말은 도현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지당한 말이었다. 이런 상황을 직접 겪지만 않았더라도 도현 역시 그런 질 나쁜 농담은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이런 종류의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적인 말싸움은 질색이다. 하지만 테이드를 납득시키지 않으면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가 힘들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누나와 같은 얼굴을 가진 루사벨라는 놓아주라고 눈물 섞인 호소를 했지만 테이드는 조금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사실쯤은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그래서 당신은 날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그렇게 동생이라고 밀어붙이면서 미워하잖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이번에는 테이드가 입을 다물었다. 직설적으로 그런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동생을 증오하는 형과 소심한 동생이라니,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리는 배합이야. 안 그래? 하지만 난 당신의 증오를 받을 이유가 없어." 테이드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 라메르 백작가에서 지낸 시간은 한날 남짓하지만 그 시간만으로도 알 수 있었어. 그곳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나 날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쯤은. 그런 분위기에서 산다면 누구나 미쳐버릴 거야." " 하지만 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다." 계속 되는 그렇다와 아니다의 무한 반복. 자기 자신이 누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가 이렇게 힘들 날이 오리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 당신이 뭐라고 말해도 난 파티 같은 데 나갈 생각도 없어. 이곳에 와서 확실하게 깨달았을 뿐이야. 당신들은 내 가족이 아니라고. 단지 얼굴만 같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을 뿐이라고." " 지금은 말이 통하지 않는군. 오늘은 쉬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도현은 화가 났다. 언제 그런 걸 배려해주기라도 한 것 같이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마차에 시달리는 내내 몸을 부축해 주는 작은 배려 하나 해주지 않았던 주제에. " 지금 말해. 어차피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없었던 기억이 생길 리도 없고, 당신이 내 형이 될 리도 없으니까." 테이드의 눈은 도현의 말이 거듭될 때마다 점점 더 차가워졌다. 도현은 얼마 안 되는 경험 속에서도 그 눈빛이 보여주는 위험 신호를 읽었다. 침대 위에서 도망칠 곳을 찾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린 순간 테이드가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격렬한 타격음과 함께 고개가 오른쪽으로 휙하고 돌아갔다. 뺨이 얼얼한데다 순간적으로 혀를 깨물었는지 입안에서 아릿한 통증과 함께 피 맛이 느껴졌다. 도현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정말로 발전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었지만 너무나 한결같은 그 성격 때문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 때려도 소용없어." 도현은 얼얼하게 부어오른 왼쪽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렸다. " 설사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난 당신의 동생이 될 수 없어. 원래 당신 동생이라는 사람은 벌써 죽었을 지도 모르지. 이런 당신에게 질려서 말이야." 빈정대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맞았다는 사실 때문인지 기막힘 때문인지 저절로 빈정거리는 말이 새어나왔다. 처음에는 부당한 폭력에 겁을 먹었지만,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억지로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데 그것이 두려워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인정하게 해 주지. 증거도 보여줄 수 있다." 차갑게 굳어버린 얼굴로 테이드는 기계적으로 말했다. " 파티장에서 그 증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 명백한 증거는 지겨울 정도로 많이 남아 있으니까." " ....마음대로 해 봐..." 그만두지 않으면 밤이 새도록 이어질 것 같은 말싸움을 하는 것에도 이제 지쳐버렸다. 도현은 힘없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테이드는 의외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곳에 온 이후로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이 하는 말을 믿어준다면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현이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도현 혼자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도현을 의심하지 않는다. 도현이 설령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도현을 라딘이라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주지 않는다. 몸은 지나칠 정도로 무겁고 머리는 멍하고 공복이 계속된 속은 쓰렸지만 도현은 침대 위에 누운 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사이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 되어 있었다. 침대를 둘러싼 천개 너머로 누군가가 방에 들어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실루엣으로 미루어 보아 여자였다. 아마 리사와 같은 시녀일 것이다. 도현은 둔통이 느껴지는 배 위에 오른 손을 올린 채 상체를 일으켜 천개를 걷었다. 그러자 청소를 하고 있었는지 테이블 위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던 30대 정도로 보이는 메이드 복장의 여자가 놀란 듯한 시선을 들었다. "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그녀는 곧 자세를 바로 하고 도현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수프 종류로 부탁 드립니다." 며칠 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다른 음식을 먹었다가는 더욱 몸이 안 좋아질 것이 뻔했다. 도현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도현은 방안을 제대로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바닥에는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페트가 깔려 있었고 벽에는 황금으로 보이는 촛대와 고풍스러운 가구들, 건너편에 있는 테이블 역시 라메르 백작가에서 보던 것과는 질 자체가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곳은 정말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고급스러운 저택임이 분명하다. 한동안 방안을 둘러보던 도현은 고개를 숙여 발목을 살펴보았다. 발목에는 단단하게 붕대가 감겨 있었고, 약 냄새도 나는 걸로 보아 치료는 해 준 것 같았다. 혹시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가 도현은 쿡하고 쑤시는 통증에 일어서는 것을 포기했다. 저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한 채 흘려보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조금 전에 방을 나갔던 시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바퀴가 달린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백작가에서 리사가 손으로 쟁반을 들고 다녔던 것과 큰 차이가 나서 확실히 이곳과 그곳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곳까지 타고 왔던 마차 역시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 크림 수프와 부드러운 빵을 준비했습니다. 음료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홍차와 과일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 우유는 없나요?" " 따뜻한 우유로 준비해 드릴까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트레이를 도현의 앞에 놓아주고 나서 다시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난 후 도현은 트레이 위에 놓인 스푼을 들고 수프를 한 숟갈 마셨다. 따뜻한 수프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더욱 허기가 졌지만 도현은 서두르지 않았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가는 당장에 배를 안고 뒹굴 것이 분명하다. 부드러운 빵을 작게 찢어서 수프에 적셔서 꼭꼭 씹어 먹었다. 그렇게 반정도 비웠을 때 조금 전의 시녀가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는 엷은 분홍빛이 도는 드레스 차림의 루사벨라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 몸은 좀 괜찮니?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을 발목에 발라두기는 했는데 통증은 없는 지 모르겠구나." " 걷지만 않으면 괜찮아." 도현이 식사중인 트레이 위에 따뜻한 우유가 담긴 컵이 놓였다. 도현이 컵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는 동안 루사벨라는 시녀가 준비해 준 의자에 앉아 도현을 마주보았다. 루사벨라가 앉은 탁자 위에 홍차 포트를 옮겨 차를 준비하는 동안 루사벨라는 줄곧 시녀 쪽을 바라보았다. 도현의 식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배려를 해 주는지 루사벨라는 한 동안 차를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현이 수프 한 접시를 비우고 나서 천천히 미지근한 우유를 마시고 있자 루사벨라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 오라버니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줘. 네가 미워한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오라버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었을 거야." 도현은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 지 잠시 고민했다. 어제는 테이드 때문에 마구 소리를 질렀지만 채현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루사벨라에게는 차마 그렇게 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전히 착각을 하고 있다. 물론 테이드에게 부당한 폭력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그를 미워할 리는 없다. 원래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닌 것이다. 도현이 대답하지 않자 루사벨라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걸었다 " 기억을 잃었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나는 잘 몰라. 하지만 네가 얼마만큼 괴로워했는지, 그리고 누구 하나 그 괴로움을 이해해 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아. 모두의 잘못이었으니까." " 누나... 누나라고 불러도 되겠지?" 도현은 루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누나는 내가 파티에 나갔으면 좋겠어?"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이나 상황 설명은 모두 그만 두고 도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눈앞에 닥친 일은 황태자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느냐 아니냐가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 라딘...그건..." 루사벨라는 당연한 일이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빛이 이전에는 단 한번도 보인 적이 없는 진지한 것이어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 이유는 필요 없이, 누나가 가자고 하면 갈게." 그 말을 듣고 루사벨라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 비록 다른 사람에게나마 그 동안 못했던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루사벨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설명을 하며 도현은 빙긋 웃어 보였다. " 종이와 펜을 부탁합니다." 도현은 루사벨라에게 종이에 간단한 그림과 설명을 곁들여 목발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기묘한 모양을 그려주면서 튼튼한 나무로 그것을 만들어 달라는 도현을 루사벨라는 조금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웅웅거리는 소음처럼 하나도 명확하지 않았다. 시야 또한 흐려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뚜렷하게 무언가를 볼 수는 없었다.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끼운 목발에 몸을 의지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도현은 계속해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 테이드는 황태자에게 인사를 하고 나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 약속만 아니었으면 도현은 마차 안에서 테이드가 억지로 입술을 밀어붙이고 혀를 깨물어 버렸을 때 당장에 뛰어내렸을 것이다. 입안에 뜨거운 불을 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리는 통증이 달렸다. 그 열기는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제대로 생각하는 것을 방해했다. " 황태자 앞에서 헛소리를 하면 안 되니까." 갑작스런 격렬한 입맞춤과 피가 멈추지 않을 정도로 혀를 깨물어 버린 행동에 놀란 도현이 하얗게 질린 채 굳어져 있자 테이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도현의 입가에 피가 배어 나오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예복에 피를 묻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안에 고인 피를 삼켜버렸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피 맛은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마차가 멈춰서자 테이드는 창백하게 굳어 있는 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부축해주지 않았던 손이 다가오자 도현은 조금 놀랐다. 하지만 한가하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피가 흘러나오도록 깨물린 혀는 지독하게 아팠고 발목도 욱신거리고 있었다. 도현이 손을 잡지 않자 테이드는 두 손을 모두 움직여 도현이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부축했다. 마차 구석에 놓여 있던 목발을 도현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그 후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연회장으로 입장해야했다. " 연회장의 수군거림이 여기까지 전해지는 듯하군." 연회장 근처의 황족 휴게실에 앉아서 케이스워크는 즐거운 듯이 말하고 있었다. 조금 전 라메르 백작가의 세 명이 연회장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었다. " 게다가 라딘은 다리를 다쳤다지? 옛 친구의 동생을 위해 어의라도 보내줘야겠군." 깔끔해 보이는 흰색 예복을 갖춰 입은 스위드는 황태자의 뒤쪽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케이스워크는 그런 사실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 그럼,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군. 너무 기다리게 만드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 연회장으로 가시겠습니까?" 케이스워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 황태자 전하께서 연회장으로 입장하신다. 준비를." 스위드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시종장에게 전달하자 휴게실 벽 한쪽에 장식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대기 중이던 시녀들과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게실 문이 활짝 열리고 케이스워크는 스위드를 대동한 채 연회장을 향해 걸었다. " 리카도 제국 황태자 전하이신 케이스워크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장이 큰 소리로 외치자 연회장에 흐르던 음악이 바뀌었다. 황족이 입장하자 연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입구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케이스워크는 미소 띈 얼굴로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장 한 쪽 구석에 서 있는 검은 예복 차림의 두 남자를 발견했다. 그 순간 케이스워크의 눈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케이스워크가 입장하고 나서 상석에 마련된 의자에 가서 앉자, 다시 음악이 바뀌었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한 태도로 케이스워크는 입을 열었다. " 오늘 이렇게 초대에 응해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 난 케이스워크는 파티가 다시 재개되자 작은 소리로 스위드에게 말을 걸었다. "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겠어. 저렇게나 눈에 띌 줄은 몰랐는데?" " 백작가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군요." 스위드 역시 입술만을 움직여 대답했다. " 내가 불렀으니 인사를 하러 가야겠군. 아무래도 저쪽에서 먼저 다가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케이스워크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고위 귀족들 몇 명이 다가와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케이스워크는 간단하게 그들의 인사에 답하며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연회장의 한쪽 벽면을 향해 걸었다. 황태자가 그들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사람들은 더 이상 황태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들 역시 궁금했던 것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대 귀족이자 대대로 황가와 인연을 맺어온 라메르 백작가문의 몰락한 후예들이 황태자를 보고 어떤 얼굴을 할 지가. 게다가 스캔들의 원인이 된 라메르 백작가의 막내 라딘 라메르를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그들은 놓치려 하지 않았다. 넓은 연회장을 가로질러 케이스워크는 테이드와 라딘 형제에게 다가갔다.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멈춰서자 테이드가 고개를 숙였다. "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상하게 생긴 나무를 겨드랑이에 끼고 창백한 얼굴로 테이드의 옆에 서 있던 소년은 지친듯한 시선으로 잠시 케이스워크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곧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얼굴색이 상당히 좋지 않아서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 오랜만이군, 테이드. 역시 제도 제일의 미녀를 어머니로 둔 탓인지 바로 알아 봤지. 그 동안 잘 지냈나?" " 전하의 배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테이드의 대답은 예법에 따른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스캔들과 결부시켜 생각하면 그 대답은 빈정거리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 이쪽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대의 동생인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물었지만 테이드는 담담한 얼굴로 동생을 소개했다. " 동생인 라딘 라메르입니다. 지금 몸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하는 것을 사과드립니다." " 이런...내가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을 괜히 불러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힘들어 보이는데 의자에라도 앉는 것이 좋겠어." 케이스워크의 말이 떨어지자 테이드는 시종이 준비해준 의자에 라딘을 앉혔다. 목발을 의자 옆에 걸쳐서 세워 놓고 나서 테이드는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사람들의 무수한 시선 속에서도 테이드는 의연했고, 라딘은 몸 상태가 나빠서인지 입 한번 열지 않은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어의를 불러 진찰을 받는 것이 어떤가?" " 허락하신다면 취드린 공작가로 돌아가 동생을 쉬게 하고 싶습니다." " 아니, 황궁 휴게실에서 쉬는 것이 좋겠어. 다시 마차를 타고 움직일 만큼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 "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테이드는 내키지 않았지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 라딘, 내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다." 케이스워크가 말하자 라딘이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흐릿해 보였다. 창백하던 얼굴에서는 이제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몸이 아프다고는 하지만 황태자가 말을 건네는데도 대답을 하지 않는 라딘에게 비난하는 듯한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창백한 얼굴의 소년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이 분을 휴게실로 모셔라." 케이스워크가 시종에게 명령하자 시종들은 라딘을 양옆에서 부축해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바로 그때였다. 라딘의 얼굴이 뭔가를 억지로 참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울컥하고 피를 토해냈다. 턱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을 보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케이스워크 역시 조금은 놀라서 시종들에게 라딘을 어서 휴게실로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라딘이 거의 안기다시피 해서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과 소란의 중심은 단연 라딘이었다. 케이스워크는 황태자라는 신분과 파티의 주최자라는 입장 때문에 눈으로만 라딘과 테이드를 배웅하고 연회장에 남았다. 스위드에게 휴게실로 가서 라딘을 돌보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서 그는 다시 소란스러운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라메르 백작가의 둘째 아들에 대해 궁금해 하던 많은 사람들은 조금 전의 광경을 화제 삼아 이런 저런 말들을 하고 있었다. 17년 전. 부모를 빼닮았다는 극히 당연한 이유로 백작가에 몰락을 가져온 소년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테이드와 닮았지만 조금 더 부드러워 보이는 라딘은 모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죽음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제도 제일의 미녀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전대 라메르 백작부인 데라인 라메르. 이곳저곳에서 라메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을 즐겁게 들으며 케이스워크는 상석을 향해 걸어갔다. 루사벨라는 피를 토하고 나서 연회장에서 빠져나간 라딘을 걱정하며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라딘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녀는 루사벨라 라메르이기 이전에 취드린 공작부인이었다. 다친 것은 분명 다리뿐이었다. 마차에 타기 전까지만 해도 라딘은 미소 띈 얼굴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피까지 토하다니. 종이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린 동생의 얼굴을 상기시키며 루사벨라는 최악의 사태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이미 17년 전에 끝나버린 스캔들을 화제삼아 떠들어대는 귀족들의 악의 섞인 목소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동생 분의 몸이 좋지 않으신가보군요. 그 동안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건 요양하고 있었기 때문인가요?" 동생을 걱정하는 루사벨라의 마음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주위에 있던 귀부인들은 루사벨라의 곁에 모여들어 예의를 가장한 호기심 섞인 질문을 던졌다. " 확실히 그쪽 공기는 맑다고 들었어요." 지금까지는 취드린 공작가의 이름 때문에 함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녀들이었지만 오늘 만큼은 마음껏 악의 섞인 말들을 토해냈다. " 그런 일이 있었는데 사교계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곤란하지 않은가요?" 루사벨라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그 동안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던 루사벨라를 꺾어 버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루사벨라는 젊고 아름다운데다 당당한 태도와 유려한 말투를 가지고 가문의 이름 때문에 그녀에게 호기심으로 접근하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들을 눌러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잘못되면 동생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현실을 잊게 만들었다. " 부인, 라딘에게 가보는 게 좋겠소."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취드린 공작이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의 아내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루사벨라를 부축해 취드린 공작은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 이건 아무리 봐도....." 휴게실의 긴 소파에 몸을 눕힌 라딘을 살펴보던 어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망설이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상처는 아무리 봐도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 혀를 깨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위드는 눈을 감은 채 기절 직전의 상태로 몸을 늘어트리고 있는 라딘을 조용히 응시했다. 파티에 초대 받은 것이 그렇게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의가 상처 지혈을 위해 가루로 된 약을 먹이고 또 다른 약을 꺼내는 것을 바라보다가 스위드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동생이 피를 토했음에도 불구하고 테이드는 묘하게 안정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고 동생을 염려하는 표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 통증을 없애기 위해 약간의 마비 효과가 있는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중년의 어의는 그렇게 말하며 엷은 푸른색 물약을 라딘에게 먹였다. 조금 괴로운 듯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라딘은 순순히 약을 받아 마셨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자 통증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라딘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리고 나서 라딘의 눈이 뜨였다. 빛이 돌아온 검은 눈동자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테이드를 발견하자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의자 등받이를 짚고 상체를 일으킨 라딘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빈 약병을 집어 들고 테이드에게 집어 던졌다. " 내....눈앞에서.....사라져...!" 테이드는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간 약병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바닥에 떨어진 약병이 파삭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얼굴을 찌푸리는 라딘에게로 시선이 몰려들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라딘의 성격은 무척이나 의외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놀람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라딘은 테이드만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스위드가 묘한 흥미를 느끼며 관찰을 계속하고 있을 때 휴게실 안으로 두 명이 새로 들어왔다. " 라딘!" 여성의 높은 목소리에 라딘과 테이드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이 깨졌다. " 대체 무슨 일이야? 출발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잖아." 루사벨라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라딘에게 다가와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루사벨라가 등장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테이드를 잡아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던 라딘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루사벨라는 우아한 공작부인의 모습을 던져 버린 채 동생을 걱정하는 누나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새하얗게 탈색된 동생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왜 항상 너만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거야....." 루사벨라는 장소도 잊은 채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라딘이 태어나던 그 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과연 라메르 백작부인이 낳은 아이는 누구를 닮았을지. 10시간이 넘는 산고 끝에 백작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몸을 씻기고 백작부인의 품에 안긴 아이가 눈을 떴을 때 그 눈동자는 짙은 검은 색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은 백작가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막 아이를 출산한 산모는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기도 전에 절망을 맛보았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버려진 아이. 불행을 불러일으킨 아이. 모두 라딘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이미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그것이 라딘의 책임이지? 라딘은 단지 아무 것도 모른 채 태어나기만 했을 뿐인데. 루사벨라는 조용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의 얼굴을 질리지도 않는 지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온정의 손길로 아이를 쓰다듬듯이 그렇게. " 누나...." 라딘이 마비된 듯한 혀를 움직여 어눌하게 들리는 발음으로 루사벨라를 불렀다. 열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혀는 이곳 저곳이 찢겨 있었다. " 말...... 했잖아. 그런...표정은 동생을 위해 남겨두라고...." 루사벨라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소리 없이 눈물 방울을 떨구었다. 라딘은 자신이 라딘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루사벨라에게는 라딘의 말이 기억을 잃은 지금의 나는 누나가 기억하는 라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기억이 있거나 없거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라딘은 루사벨라의 하나 뿐인 동생이었고, 언제나 불행에 휩싸여 갇혀 지냈던 작은 동생이었다. 휴게실 안에 모인 사람들은 백작가의 치부를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당당하던 루사벨라의 얼굴만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무너질 듯한 그녀를 보고 놀랐고, 스캔들의 주인공인 라딘의 등장은 그 자체가 화젯거리였다. " 루사벨라."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던 테이드가 이름을 부르자 루사벨라는 고개를 돌렸다. 테이드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루사벨라는 테이드의 눈빛에 담긴 뜻을 읽어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루사벨라는 눈물을 닦아내고 표정을 되돌렸다. 무너지는 모습을,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가족들 사이에 있을 때만 해도 충분하다. 스캔들 따위에 휩쓸려서야 지금까지 버텨온 세월이 우스워질 뿐이다. " 라딘, 너도 일어나라. 공작가로 돌아가자." 라딘은 테이드에게 여전히 험악한 시선을 보냈지만 대답하지 않은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 황궁에서 쉬십시오. 황태자 전하께서 아프신 분을 그대로 되돌려 보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위드가 입을 열자 시선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차분하고 지적인 용모를 가진 황태자의 부관 스위드는 황궁 내에서 꽤 유명했다. 테이드가 거절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스위드가 시종에게 방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황태자 전하께서는 옛 친구분과 조용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테이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표정이었다. 스위드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라딘 역시 뭐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테이드가 먼저 대답하자 휙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 백작가에서 공작가. 그리고 이제는 황궁이라니. 이건 놀러 다니는 게 아니라고!' 도현의 의사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채 사람들은 도현이 머물 장소를 정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끌려 다닐 바에는 차라리 백작가에 있는 방에서 그나마 마음 편한 리사나 노스와 이야기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그들은 도현의 의사를 존중해 주니까. 방을 준비하겠다는 말을 들은 직후 도현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어느 곳에 시선을 둬야 할 지도 모른 채 바닥만을 내려다보았다. 혀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둔감되자 자신에게 닿아있는 노골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휴게실에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도현의 행동이나 말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신분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물론 시녀나 시종들까지 도현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사람의 시선이 닿는 느낌이 피부를 찔러대는 감각을 이런 식으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나치게 민감한 체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선 때문에 질식해 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요한 시선들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바보 같은 소리만 해대고 말이야. 대체 황궁에 오면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한 건 무슨 뜻이었지? 사람들이 날 이런 식으로 관찰할 거란 뜻이었나?!' 당장이라도 테이드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당분간은 그와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기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렇게 격렬하게 입술을 맞부딛힌 것도 그렇고 실제로 혀를 물어뜯어 버리는 키스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밥 먹다가 잘못해서 혀를 깨물거나 해도 정말 아픈데 피가 멎지 않을 정도로 깨물린 후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테이드는 그런 것을 모두 예상한 듯이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 미친 자식! 나중에 형 얼굴을 어떻게 보라는 거야!!' 테이드가 원망스러웠다. 100번 말해도 테이드는 자신이 본 것만을 믿을 것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을 인정할 것이다. 처음에는 테이드의 행동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휴게실 안을 지배하는 기묘한 침묵 속에서 도현은 처음으로 라딘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과 같은 얼굴을 가졌을 소년을 떠올렸다. 라딘은 무슨 이유로 손목을 그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라딘에게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도현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미루어 보면 라메르 백작가의 저택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루사벨라가 살고 있는 공작가의 저택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확실했다. 그저 그런 보통 귀족의 아들일 뿐인데 어째서 연회장 안에 있던 무수한 사람들이 모두 도현의 얼굴을 알아보고 수군거린 것인지 도현으로서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공작가에서 있었던 루사벨라와 테이드의 대화를 통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라딘이라는 소년이 상당히 불행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라딘이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살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것은 도현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도현은 아무리 힘들어도 자살이라는 수단으로 삶을 포기하는 행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도현은 자신이 새긴 것도 아닌 왼쪽 손목의 상처를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빠졌다. 우연인지 아니면 재수가 없어서인지는 모르지만 도현은 어쩌다가 라딘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과 같은 얼굴을 가졌을 뿐이다. 그리고 더 불행한 일이라면 그 라딘이라는 소년의 자리에 떨어져 버린 것이지만.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뭐란 말인가. 라딘이라는 소년에 대해 생각하던 도현은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 내가 왜 엉뚱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야 하지?' 지금 자신에게 닥친 일을 해결하는 것만 해도 벅찬데 다른 사람의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도현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하지만 끈적거릴 정도로 달라붙는 시선은 정말 짜증이 난다. 마치 수십 명이나 되는 스토커가 은밀하게 관찰하는 시선을 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난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야! 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도현은 금방이라도 입밖으로 터져나올 것 같은 불만의 소리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테이드가 한 협박은 아직 유효했다. 황태자나 황궁 안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지 말라고 테이드는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그리고 도현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혀를 물어 뜯은 것이다.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기현과 같은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차분한 인상에 능력 있는 사업가처럼 보인다는 말인데 그런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 그런 짓을 하다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머리 속은 도현의 의지를 거부한 채 계속해서 테이드가 했던 행동을 반복해서 흘려 보내고 있었다. 마치 고장난 텔레비전 같다. " 방이 준비되었습니다." 스위드의 입에서 전달된 그 말이 도현에게는 마치 구원의 말처럼 들렸다. 스위드는 직접 도현의 몸을 부축해서 방으로 안내했다. 테이드와 루사벨라도 함께 움직였다. " 너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거라. 루사벨라." 도현이 침대에 눕는 것을 확인하자 테이드는 루사벨라에게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것 같았지만 기다리던 취드린 공작과 함께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 라메르 백작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연회장으로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 저는 이곳에서 동생과 함께 있겠습니다." " 그렇다면 연회가 끝난 후에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하실 겁니다." 스위드는 인사를 건네고 방에서 빠져 나왔다. 문이 닫힌 순간 단정하던 그의 입가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 재미있게 됐는데.....?" 그리고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라앉아 있던 회색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눈빛이 변한 것만으로 스위드는 평소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연회장으로 돌아온 스위드는 케이스워크에게 보고했다. 휴게실에서 벌어졌던 일들과 세 남매의 행동. 그리고 라딘이라는 소년에 대해서 알아낸 것을. " 흐음..." 의자에 앉아서 지루한 듯이 연회장을 둘러보던 케이스워크는 한순간 흥미 있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것은 스위드가 말한 라딘에 대한 어떤 것을 듣고 난 직후였다. " 그게 사실인가?" " 그렇습니다." " 정말 재미있게 됐군." 케이스워크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흥미를 느꼈다. 라딘의 왼 손목에 남아있다는 자살을 시도한 흔적과 그에게 과거의 기억이 없다는 것. 스위드의 보고를 받았던 라딘의 과거는 스캔들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여겨질 만큼 비참했다. 케이스워크의 초대가 없었다면 아마도 계속해서 그 낡은 저택에 갇혀 있어야했을 것이다. " 지루한 파티 따위는 제쳐두고 당장이라도 이야기를 나누러 가고 싶지만..." 뒷말을 꺼내지 않아도 스위드는 그가 하려는 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만약 케이스워크가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했다면 스위드가 막았을 것이다. " 붙잡아둘 구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케이스워크는 미소지으며 엷은 노란빛이 나는 술잔을 집어들었다. ----- 지금까지 누워본 침대 중에서 최고급이라고 할 만한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도현은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침대 건너편에 놓인 긴 의자에는 여전히 테이드가 앉아 있었고, 통증은 많이 사라졌지만 혀는 평소처럼 말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만큼 상처가 생겼다. ' 이제 정말 이런 상황은 질렸어.' 도현은 푹신한 깃털 베개에 고개를 파묻은 채 속으로 생각을 거듭했다. 어떤 방법을 쓰던 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끌려 다닐 것이 분명하다. 형이랑 얼굴이 같으니까, 누나랑 얼굴이 같으니까 하는 이유로 스스로에게 계속 변명만을 반복해온 것이다. 아직은 조금 더 머물러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말로 위안하면서. 하지만 계속 이 자리에 안주해 있다가는 결국 도현은 라딘이라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하고 싶지 않았다. 라딘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는 순간 17년 동안 한도현으로서 살아온 시간들이. 열심히 외국어를 공부하고 어린 나이부터 자신이 설자리를 만들어온 도현의 노력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도현을 천재로 만들어 주었던 뛰어난 외국어 실력 같은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이곳의 언어를 익히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 살아가는 데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급우들이 취미로 배운다던 무술 종류라도 배워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때려눕히고서라도 이 곳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아직도 혼자서 걷는 것은 무리다. 테이드는 정말로 철저하게 발목을 부러트려 놓은데다 이곳의 의술은 도현이 아는 것과는 달라서 제대로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진통제 종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지만. 도현은 낯선 세상에서 눈을 뜬 이후로 벌어졌던 일들을 떠올리며, 한도현으로 살아왔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어떻게 하면 지금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지 고민했다. " .....어제 일 처럼 확실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 물론, 옛친구에 대한 일이니까." 분명히 고민거리를 떠 안고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는데 깜빡 잠이 들어버렸는지 멀리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안에는 도현 이외에는 테이드 밖에 없었다. 조금 더 소리에 신경을 쓰자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조금씩 명확하게 들려왔다. "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지. 라메르 백작가에 몰락을 가져온 원흉이 그 기억 전부를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저 목소리는 분명 그 황태자라는 사람이 분명하다. " 저희 가문의 일을 흥밋거리로 삼을 생각이시라면 그만 두십시오." 황태자의 앞에서도 테이드의 말투는 단호했다.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이 흠이었지만 도현은 등을 돌린 자세를 유지한 채 계속해서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나는 단지 사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어쨌든 그대의 가문이 몰락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버님이기도 하니까 말이지. 만약 그런 일이 없었고, 라메르 가문에 아들 한 명만이 있었다면 그대와 나는 분명 지금까지도 좋은 친구로 남았겠지. 그것은 무척 아쉽게 여기고 있다. 그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여기까지도 소문이 퍼져 있으니까." "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어조 자체에는 조금도 감사의 마음은 담겨 있지 않았다. 황태자라면 상당히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인데, 이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는 테이드에게 도현은 조금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마음속으로 당연하다고 납득하는 부분도 있었다. 기현의 사업 수완을 떠올려 보면 형과 똑같은 모습을 가진 테이드가 무능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 그대의 동생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몸이 좋지 않다니 아쉽군. 하지만 시간은 아직 충분히 있으니, 이곳에 머물면서 몸을 치료하는 데만 전념하면 될 거야. 어의들을 계속 보내도록 하지." "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그런데, 어의의 말을 들어보니 혀를 깨물었다고 하던데, 자살이라도 할 생각이었던 건가?" 도현은 그 말을 듣고 발끈해서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헛소리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어쨌든 자는 척 하기로 했으니 움직여서는 안 된다. " 그것은 아닙니다. 마차 안에서 약간의 사고가 있었습니다." " 혹시 기억을 잃은 동생을 형이 닥달하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말에 테이드의 대답이 멈췄다. 도현은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이 정말로 아쉬웠다. 황태자가 상당히 눈치가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로만 황태자의 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 전하께서 그렇다는 대답을 원하신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나 테이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아버님께서는 이미 옛 친구에 대한 우정이나 추억 같은 건 모두 잊고 계신 것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그대들을 이렇게 초대한 것은 단지 파티에 참석하라는 뜻에서만은 아니지." 처음부터 여유 있는 음성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던 황캐자 케이스워크는 이미 대화의 주도권을 확실히 쥐고 있었다. 테이드가 밝히기 싫어하는 라딘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음은 물론, 황족을 상징하는 선명한 금발이나 적자색 눈동자를 볼 때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만들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도 자신의 지위나 입장을 잘 이용할 줄 알았던 케이스워크였다. 이미 25살이 된 지금은 권력까지 움켜쥐고 있어서 테이드로서는 상대조차 할 수 없었다. " 무엇 때문에 라딘까지 초대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테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케이스워크는 개의치 않고 스위드를 불렀다. " 스위드, 상자를." 스위드가 명령을 받아 작은 보석함 같은 것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투박하게 생긴 검은색의 상자였다. 꽤 낡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상자를 이루고 있는 재질은 무척 구하기 힘든 흑철이라는 것이었다. 케이스워크가 눈짓을 하자 스위드는 테이블 위에 손바닥 크기 만한 작은 상자를 올려놓고는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 이것은......" 테이드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케이스워크는 그것을 즐기듯이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 이제 일어나는 것이 어떤가. 자는 척 하는 도련님?" 시선은 여전히 테이드의 얼굴에 고정한 채로 케이스워크가 말하자 도현은 확실히 놀라긴 했지만 작게 툴툴거리며 상체를 일으키고 몸을 돌렸다. " 당사자를 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 " 당사자가 아니니 별 상관없습니다." 둔하게 느껴지는 혀의 움직임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도현은 대답했다. " 스위드, 부축해서 이쪽으로 모셔와라." 도현이 황태자와 테이드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와서 앉을 때까지 테이드는 열린 상자안의 무언가를 보고 놀란 얼굴로 굳어져 있었다. 도현은 대체 무엇을 봤길래 테이드가 저렇게 놀란 얼굴인지 궁금해서 탁자에 앉자 마자 열려 있는 상자 쪽으로 고개를 돌려 살펴봤지만 그렇게 놀랄 만한 것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상자 안에 담긴 것은 엄지손가락 한마디 정도 되는 크기를 가진 희뿌연 돌 하나에 불과했다. " 작은 돌 하나를 가지고 괜히 놀란다는 듯한 표정이로군?" 황태자의 말에 도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을 맞추다니. 금발에 보라색 눈이라는 상당히 귀족적인 용모에 척 보기에도 신분이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가진 케이스워크는 미소지으며 도현과 테이드를 번갈아 응시했다. " 하지만 기억을 잃은 그대와 달리 그대의 형은 저 돌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도현이 테이드를 쳐다보자 그는 아까 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 저 돌에 손을 가져가 보도록 해. 표면을 살짝 만져봐도 좋다." 안 그래도 만져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도현은 잘됐다 싶은 심정으로 우유빛처럼 탁하게 보이는 돌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돌은 예상과는 달리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있었고, 무척이나 매끄러웠다. 잠깐 동안 돌을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떼었을 때였다. 갑자기 돌에서 빛이 화악하고 피어오르더니 도현이 멍하게 어...하는 소리를 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 도현이 멍하게 중얼거리자 갑자기 테이드가 손을 뻗어서 도현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는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현의 입을 억지로 벌리더니 혀에서 상처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뗐다. " 무슨 짓이야!" 도현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상처가 순식간에 나았다! 부러진 발목의 상처는 물론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물지 않아서 억지로 피를 삼키게 만들었던 찢어진 혀의 상처까지도 완전히 사라졌다. 도현은 여우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도현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상자 안의 보석을 바라보는 것을 케이스워크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 내 예상이 정확했군. 빛의 돌이 선택하는 사람은 세상에게 버림받은 자,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라는 문헌대로야." " 그게 무슨 소리야!" 도현이 노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소리치자 케이스워크는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황태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반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 그대가 이 돌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다. 라딘 라메르." 도현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무의식적으로 테이드를 쳐다보았다. 테이드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초조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테이드는 돌을 노려보고 있었다. " 제발 이제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좀 해달란 말이야. 마법처럼 상처를 낫게 해주는 돌이라니.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니...." 도현은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게 눈앞에 나타난 데다 실제로 그 효과를 몸으로 체험하고 나자 더더욱 이 현실이 확실하게 다가온 것이다. 꿈이 아니라 정말로 현실인 거라고 확신하게 만든 것이다. 컴퓨터가 있고, 핸드폰과 지하철, 비행기가 있던 세상에서 돌을 만진 것만으로 상처가 치료 되고 가족들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타인들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니. 이런 세상에서 엉뚱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다니 정말 이런 건 농담이 아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져서 도현은 오른손을 이마 위에 올린 채 정체불명의 하얀 돌을 노려보았다. 세상이 도현 혼자만을 놓아두고 모두 미쳐버린 것 같았다. 이런 게 현실이라니.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겪자 도현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다 내던지고 싶어졌다. 한 달도 넘게 도현을 괴롭히던 상처가 사라졌다는 기쁨보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더 크다.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런 장난을 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왜 자신을 현실에서 밀어내 이런 곳으로 던져 넣었느냐고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 제가 이 돌의 주인이라면 마음대로 해도 되겠죠?" 도현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케이스워크에게 묻는 것과 동시에 흰 돌을 상자에서 꺼내 오른손으로 꾹 쥐었다. 당장 이 돌을 어딘가로 집어 던져서 깨트려 버리고 이곳에서 나가버릴 생각이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장소에 더 이상 발을 붙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도현이 그렇게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을 걸었을 때였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돌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점점 뜨겁게 변했다. 깜짝 놀란 도현이 손바닥을 펴고 돌을 던지려 했지만 돌은 마치 피부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손바닥에 달라붙어서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 이...이게 뭐야....!" 도현은 손바닥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와 점점 녹듯이 사라져가고 있는 돌을 뜯어내려고 했지만 돌은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도현의 손바닥 안에서 녹아버렸다. 그리고 돌이 완전히 사라지고 빛이 사라졌을 때, 도현은 심장을 태우는 듯한 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꺾고 말았다. 숨을 쉴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도현을 케이스워크는 관찰하는 듯한 냉담한 시선으로, 스위드는 무감동한 눈으로, 테이드는 굳어진 눈동자로 응시하고 있었다. ----- 신이 지상에 남겨둔 여섯 개의 보석. 힘을 상징하는 빛깔을 띄는 여섯 개의 보석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 지금까지 한 시대에 여섯 개의 보석 전부가 주인을 택한 적은 없었지만, 남아 있던 마지막 신의 보석이 주인을 선택했다. 마지막 신의 보석이자, 지금까지 단 두 명의 주인을 가졌던 빛의 보석의 주인이 된 라딘은 4일 전 보석을 흡수한 후로 정신을 잃은 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보석의 주인은 국가의 재산으로 취급한다. 라딘이 빛의 보석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테이드와 스위드만이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라딘의 몸이 무척 쇠약해 져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케이스워크의 집무실에서 스위드는 평소처럼 서류를 살펴보는 그의 보좌 역을 하며 불쑥 질문을 던졌다. " 리카도 제국이 가진 두 개의 보석과 사이드 공국, 크레이슨 왕국, 센 왕국, 피요드 공국이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는 보석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은 어떨까. 신이 지상에 남겨둔 힘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궁금하지 않나?" " 저는 당신의 계약자입니다." " 널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은 없어. 스위드. 게다가 네가 보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건 아버지와 나 뿐이니까." 황태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까딱였다. " 아버지로 인해 몰락했던 백작가가 내 덕분에 다시 위세를 찾는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케이스워크는 라딘의 몸에 흡수된 빛의 보석을 떠올렸다. " 아버지는 친구를 질투했었는지도 모르지. 제국 최고의 미녀를 아내로 얻고 늘 행복하게 웃는 친구를 말이야." 케이스워크는 피식하고 웃었다. " 역시 남자들 사이에 문제가 되는 것은 미녀인가. 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던 마다하지 않는 것이 남자들이긴 하지.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거야." " 아름답지만 독을 품은 꽃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스위드의 대답에 케이스워크는 소리내어 웃었다. " 그대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 " 이제 라메르 백작가를 다시 제도로 불러 들여야겠군요." 스위드는 자기 자신에 관한 화제는 피한 채 다시 라메르 백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 그래, 보석의 주인이 속한 가문을 지방에 내버려둘 수는 없지. 테이드는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 당연한 일입니다." " 아무렇지 않게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라딘이 내 동생이었다면 테이드는 불명예를 안은 채 백작가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을 멈췄던 케이스워크는 곧 입가에 웃음을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 아직, 도련님이 깨어났다는 소식은 없나?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지. 하지만 기억이 없다는 건 참 속편한 일이군." " 깨어나면 바로 이쪽으로 연락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는 사람이 바뀐 것처럼 보였습니다." " 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을 테니까." 케이스워크는 책상 위에 널려 있던 종이 하나에 싸인을 해서 스위드에게 넘겨주었다. " 하지만 중요한 건 버려졌던 개가 이제는 중요한 보석이 되었다는 거야. 아버지의 당혹한 표정이 정말 재미있었어.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아버지로서도 정말 의외였겠지. 신의 선택이란 그런 거니까." 이제 곧 황제의 시대는 가고 케이스워크의 시대가 온다. 스위드 역시 아버지가 아닌 케이스워크를 선택했다. " 신의 보석을 양손에 쥐고 제국의 정점에 서겠다. 재미있지 않나, 스위드?" " 신의 보석이 제게 머물러 있는 한 저는 당신의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저를 그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으니까요." 보석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아닐 때의 스위드는 착실하고 성실한 보좌였다. 17년 전, 황제는 친구를 잃었고 라메르 백작가는 권력과 재산을 잃었지만 케이스워크는 스위드를 얻었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멍한 기분이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 역시 깨달은 상태였는데도 도현은 어딘지 모르게 현실에서 이탈해 있는 듯한 기분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지금은 잘 기억할 수 없었다. 뭔가 뜨거운 것을 쥐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 생각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멍한 상태로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도현은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문득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에 선 채로 도현을 내려다보고 있던 것은 기현의 얼굴을 가진 테이드였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생이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사정없이 마차에 찍어버리거나 망설임도 없이 거칠게 입을 맞추며 혀를 물어뜯는 차가운 광기와는 다른 침묵이 담긴 눈이었다. 무엇이 테이드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도현은 멍하게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관심도 없었지만 테이드의 묘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자 기현과 오버랩이 된 것이다. 분명 기현도 도현이 병원 침대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저런 눈으로 바라봤었다. " 돌아가고 싶어...." 도현은 무심코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작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자 테이드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했지만 결국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이드는 신의 존재를 믿고 있지 않았다.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부조리를 보고도 그대로 내버려 두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은 세상을 창조하고 지켜보는 위치로 돌아갔지만 지상에 남아있는 인간들을 위해 절대적인 힘을 남겨두었다. 신의 보석이라 불리는 여섯 개의 보석들이 그것이었다. 각각 빛의 보석, 어둠의 보석, 바람의 보석, 불의 보석, 물의 보석, 대지의 보석이라 불리는 신이 남긴 조각들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고 선택된 주인에게는 신이 남긴 힘을 주었다. 보석들이 각각 무엇을 기준으로 주인을 선택하는 지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몇몇 문헌에 약간의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완전하게 보석의 선택이 무엇으로 인해 결정되는 지 알려주지는 못했다. 테이드도 소문을 통해 신의 보석이 주인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테이드와는 상관없는 먼 곳의 이야기였다. 테이드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골몰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신의 존재나 신이 지상에 남기고 간 흔적 같은 것을 되새길 여유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믿고 있지도 않았던 신의 보석 중 하나가 라딘을 주인으로 선택했다. 언제나 웅크리고 앉아서 흐릿한 시선으로 자신을 가둬두고 있던 라딘을 선택했다. 황태자가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이상 황제에게도 그 사실은 알려졌을 것이고, 그들은 라딘에게 손을 뻗을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라딘은 예전의 생활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라딘으로 인해 몰락했던 가문은 이제 다시 라딘으로 인해 부흥할 것이다. 평생의 숙원으로 삼고 있던 가문의 부흥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게 되자 오히려 그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제 라딘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다. 문득 그 사실을 깨닫자 테이드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지난 17년간 테이드의 정신을 지배해 온 감정의 주체가 눈앞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이미 17년이 지났어요. 라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오라버니도 알고 있잖아요. 어머니가 낳은 아들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지나치게 빼 닮은 것이 죄가 되나요? 라딘은 아무 것도 몰랐잖아요.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는 거에요. 이미 시간이 너무나 흘렀고, 라딘은 충분히 고통받았어요. 모든 걸 잊었다면 차라리 그냥 놓아주세요." 루사벨라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처럼 반복되어 들려왔다.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라딘은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빼 닮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진하게 라메르 백작가의 피를 이은 아이. 본래대로라면 분명 축복 받았을 탄생이었다. 대 귀족인 라메르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자 부모의 용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사랑스러운 동생으로서 자라났어야 했다. 하지만 테이드의 모친이 라딘을 가졌던 10개월 동안, 라딘이 태어나는 그 날까지 백작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아이가 금발을 가졌기를, 그렇지 않으면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나기를 기원했다. 라메르 백작부인이 낳을 아이가 황제의 사생아이기를 기원했다! 하지만 기대를 배반하고 태어난 것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 라메르 백작부인이 낳은 아이가 황가의 상징을 어느 것 하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황제는 비웃음이 담긴 보라색 눈동자로 라메르 백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 그대가 말했던 대로 10개월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 사생아는 태어나지 않았지. 친구여, 그대는 날 모욕했다. 내가 그대의 아내를 범하고 탐냈다고 모함하며 날 모욕했다.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황가와 라메르 백작가의 인연도 여기까지다." 황제의 말에 어느 누구도 대답 할 수 없었다. 황제는 라메르 백작부인을 탐했고, 그녀를 억지로 안았지만 태어난 것은 황제의 핏줄이 아니었다. 명백한 증거 앞에서 어느 누구도 부정의 말을 내뱉지 못했다. 라메르 백작가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다. 신은 황제의 손을 들어주었다. " 라메르의 성을 가진 모든 자들을 제도에서 추방한다. 재산과 영지도 몰수한다." 흔들림 없는 황제의 목소리를 들으며 라메르 백작은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듭니다." 비참함을 곱씹는 부친의 음성을 테이드는 똑똑하게 들었고,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책임은 황제에게 있었다. 황제가 모친을 탐하지 않았다면, 제도 최고의 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면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그 불행의 씨앗이 되어버린 라딘을 누가 용서할 수 있었을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볼 때마다 죽이고 싶은 분노를 억누르며 어째서 금발로 태어나지 않았냐며 윽박지르고 싶은 것을 참아냈다. 그런데 이제 라딘에게 신의 보석이 찾아왔다. 라딘을 주인으로 선택했다.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고정시킨 테이드는 멍하게 잠겨 있던 라딘의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되돌아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라딘은 신의 대리자가 되었다. 보석이 머무르는 동안 라딘은 불사의 몸을 가진다. 많은 사람들이 라딘의 눈에 들기 위해, 라딘을 얻기 위해 손을 내밀겠지. " 어째서지...?" 테이드가 희미하게 중얼거리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라딘은 빛이 돌아온 눈으로 테이드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감정의 잔여물이나 흔들림 같은 것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지독할 정도로 순수한 눈동자를 보며 테이드는 갑자기 솟구쳐 오르는 충동을 억눌렀다. 저 목을 조르고 싶다. 목뼈를 부러트리고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하게 만들고 싶다. " 어째서지...?" 이번에는 조금 더 명확한 목소리로 말하며 테이드는 천천히 라딘에게로 손을 뻗었다. 라딘은 마치 테이드의 손에 이끌리기라도 하듯이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하얗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손을 가져간 테이드는 동생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라딘은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며 받아들였다. 맥박치는 피부의 온기를 느끼며 테이드는 입을 벌렸다. 목덜미에 이를 세우고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흠칫 하고 경련하는 몸을 세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채 깊게 이를 세우고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입안이 피로 가득 찼다. 신음 소리를 내는 라딘의 입술에 그대로 피 묻은 입술을 가져가 키스했다.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워하던 라딘은 테이드의 입안에 고여있던 자신의 피를 들이키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테이드는 라딘이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워해도, 몸을 떼기 위해 손으로 그를 힘껏 밀어내도 라딘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신음하던 라딘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지자 테이드는 그제서야 입술을 떼고 정신을 잃은 동생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마치 짐승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피는 이미 라딘의 상체를 적시고 있었다. " 널 놓아 줄 수는 없어....." 테이드는 나직하게 속삭이며 동생의 뺨을 쓰다듬었다. Hidden Part. Cross 기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두 달이 다 되도록 눈을 뜨지 않는 동생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도 동양인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흰 피부가 이제는 탈색된 듯한 색으로 변해 있었고, 몸은 눈에 띌 정도로 말라 버렸다.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고 영양제로만 연명하는 날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 도현아...." 기현은 그 때 도현에게 통역을 부탁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그렇게 하지만 안았어도 도현은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채로 창백하게 잠든 모습만을 볼일도 없었겠지. 채현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책망하지 말라고, 슬프고 괴로운 건 가족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죽어서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하며 기현을 위로하려 애썼다. 죽어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는 잘 알고 있다. 도현이 탔던 비행기 기체는 무척 심하게 파손되어서 사상자도 상당히 많이 나왔다. 그런 와중에 도현은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도 눈은 뜨지 못하고 있지만. 하지만 죽은 것과 별다르지 않은 상태로 언제 깨어날 지 기약도 없는 동생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심정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도현의 사고 소식을 접한 어머니 채현진은 쇼크를 며칠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무뚝뚝해 보이던 아버지 역시 한동안 망연한 표정을 벗어 던지지 못했다. 두 달이 지난 지금에는 조금씩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족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는 거두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집 안 곳곳에 남아 있는 도현의 흔적들을 볼 때마다, TV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외국어를 들을 때마다 가족들은 도현을 떠올렸다. 아직 17살에 불과한데, 천재로 태어났지만 도현이 막내이며 소중한 자식이자 동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현실은 그들에게서 가차없이 등을 돌리고 도현을 빼앗아가 버렸다. 천재 적인 재능을 가진 동생은 필요 없다. 모든 것을 잊었다고 해도 그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만 와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기현은 절실하게 생각했다. 기업의 오너로서 회사에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기에 퇴근 후에 병원에 들러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동생의 야윈 얼굴을 내려다보며 기현은 매일같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또 자책하며, 도현이 깨어나게 해 달라고 빌었다. " 도현아...." 기현은 야윈 동생의 손을 꼭 붙잡고 괴로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 손이 움직이기를. 두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움찔. 그러던 어느 순간, 도현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현은 깜짝 놀라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도현은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벌써 깨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조적인 미소를 짓던 기현은 다시 미약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감각을 느꼈다. 떨려오는 손을 떼고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손을 내려놓자 이번에는 확실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기현은 흥분을 감추며 전화기를 들었다. " 507호 환자가 손에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차분하게 울렸지만 흥분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기현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도현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도현의 눈꺼풀이 살짝 열리고 몽롱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이 부신 듯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던 도현은 어느 순간 기현의 얼굴을 보고 놀란 듯이 얼굴을 굳혔다. 그러다가 도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힘이 없어서 제대로 상체를 지탱하지 못하는 도현을 기현이 부축해서 일으켜 주자 도현은 눈을 크게 뜨고 기현을 응시했다. 기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도현이 갑자기 오른 팔로 시선을 돌렸다.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오른 팔을 질린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던 도현은 고개를 들어올려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무언가를 떨쳐버리기라도 하듯이. 기현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현은 도현이 깨어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 도현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네가 이렇게 살아있어 줘서 얼마나 고맙고 미안한 지 몰라. 모두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도현아." 기현은 그렇게 말하며 강하게 동생을 포옹했다. 맞닿은 심장의 두근거림이 어느때보다 격렬하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들어오고 깨어나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도현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현이 도현에게서 몸을 떼자 의사가 다가가 간단하게 몸 상태를 살피고 나서 말했다. " 정확한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완전히 깨어난 것 같습니다. 아직 사고의 쇼크가 남아 있을 지도 모르고, 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가족들이 옆에서 잘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기현은 의사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말하고 나서 다시 도현을 돌아보았다. 뭔가에 놀란 듯이 크게 뜬눈을 한 채로 도현은 몇 번이나 고개를 젓고 있었다. 기현은 그런 동생의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 기쁜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 네, 아버지. 접니다. 도현이가 깨어났습니다. 어서 병원으로 오세요." 전화를 끊은 기현은 이번에는 채현에게 전화를 걸어 빠르게 도현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알렸다. " 도현아, 기분은 좀 어때?" 기현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며 침대 옆에 있는 보조 의자에 걸터 앉았다. 기현의 연락으로 병실에 들어와 있던 의사와 간호사가 흐뭇한 표정으로 두 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지금이라도 네가 깨어나서 얼마나 기쁘고 다행인지 몰라.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지...." "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도현을 기현은 조금 당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도현아? 지금은 장난할 때가 아니야." 그러나 도현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 선생님? 도현이에게 무슨 이상이라도 생긴 겁니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의사도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 언어장해라도 생긴 겁니까?" 도현이 언어의 천재라는 사실은 이미 담당 의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이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경우는 그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 " 도현아!" 기현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뭔가 도현에게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도현은 뭔가 필사적인 얼굴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도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현은 도현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우리말을 잊기라도 한 듯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도현의 이름을 계속 해서 불렀다. 의사도 당황했는지 한동안 굳어져 있다가 정밀 검사를 위해 도현을 검사실로 옮기려던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부모님이 나타났다. 그들은 도현이 깨어나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기쁨의 감탄성을 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도현을 안았다. 크게 놀란 듯한 도현이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로 굳어져 있는 것을 기현은 괴롭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아버지, 아무래도 도현이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더군요." 기현의 말을 옆에 있던 담당의사가 받았다. " 사고의 쇼크로 정신 적인 충격이라도 받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듭니다. 자세한 결과는 검사를 해 본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간호사."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간호사가 의사와 함께 침대를 움직여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기현은 놀란 얼굴로 눈물도 닦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얼마 후 채현도 병실에 들어서고 도현의 소식을 듣고 표정이 굳어졌다. " 하지만....최소한 깨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해야지, 오빠.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생겼더라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만약에 도현이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해도 상관없어. 우리가 옆에서 보살펴 주고 도와주면 되는 거니까. 어머니도 그렇게 울지 말아요, 도현이 죽은 거 아니에요! 오히려 깨어나서 잘 됐잖아요." 채현은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어떤 식으로라도 치료를 하면 나아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식물 인간 상태로 평생을 보냈을 지도 모를 도현이 깨어났다는 것이다. " 잃어버렸다면 다시 시작하면 돼요. 우리 모두 함께 도현이를 도와주자구요." 오랜만에 기쁜 소식을 듣고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채현의 말을 들으며 굳게 결심한 듯이 표정을 정했다. " 그래, 누가 뭐래도 도현이는 내 아들이니까...."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어머니를 조용히 포옹하며 채현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짝 떨구었다. 엇갈린 운명은 이제 막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Part 5. Grote academy 리카도 제국에 위치한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 그로트 아카데미의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신학부, 기사부, 마법부, 일반부의 네 학부로 나뉘어 지는 그로트 아카데미는 300년의 역사를 가진 대륙에서 가장 손꼽히는 아카데미이자 각 나라의 귀족이나 왕족들이 다니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수업료만 지불할 수 있다면 입학에 제한은 없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수업료 지불 능력과는 상관없이 아카데미에서는 그 인재를 받아들였다. 평소에도 유명인들이 많이 입학하기로 유명한 그로트 아카데미의 신학기 입학식은 여느 때와 달리 훨씬 소란스러웠다. 새로 입학함과 동시에 마법부 3학년으로 월반할 예정인 첼시피온 왕자. 사이드 공국의 적자인 첼시피온 왕자는 페르마 대공왕의 뒤를 이어 사이드 공국을 물려받을 인물이자, 이미 어린 나이부터 뛰어난 마법적 재능으로 유명했다. 또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 번 보면 쉽게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첼시피온 왕자가 사이드 공국을 떠나 그로트 아카데미에 들어온다. 또한, 첼시피온과는 다른 의미로 유명한 제국의 귀족 한 명의 입학 역시 화제가 되었다. 신학부 3학년으로 편입할 예정인 라메르 백작가의 둘째 아들 라딘 라메르였다.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유명한 황제와 라메르 백작가의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지금 까지는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었지만, 세 달 전 황태자가 주최한 파티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황제와 얽힌 과히 유쾌하지 못한 스캔들로 인해 몰락했던 라메르 백작가는 다시 일어섰고, 변두리의 영지에서 제도로 복귀했다. 갑작스런 지위와 재산의 회복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사실이 알려졌다. 황제가 직접 발표한 그 사실을 듣고 사람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카도 제국에서 보관 중이던 신의 보석 중 하나인 빛의 보석이 라딘을 주인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발표한 황제는 라메르 백작가를 원 상태로 회복시킬 것을 명령했고, 신의 보석을 받아들인 라딘 라메르를 그로트 아카데미에서 교육한 후 제국의 공신으로 임명하겠다고 말했다. 그 후로 여러 가지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신의 보석을 흡수한 이후로 한 달 동안은 황궁 안에서 꼼짝없이 요양생활을 해야 했던 라딘은 현재 그로트 아카데미의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로트 아카데미 대강당에 앉아 있었다. 황제와 황태자, 라메르 백작가의 가주인 테이드와 누나인 루사벨라 공작부인, 친척인 취드린 공작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딘 라메르는 정식으로 그로트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었다. " 저기 저 사람이야." " 정말? 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로군." " 기구한 인생이야." 그로트 아카데미의 식당에는 많은 수의 학생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흰색의 깔끔한 법복을 걸친 신학부의 학생들이나 검은색에 금색으로 그로트 아카데미의 문장이 수놓인 로브를 걸친 마법부의 학생들, 붉은 색의 망토를 걸친 기사부의 학생들과 어두운 청색 제복을 걸친 일반부의 학생들이 뒤섞여서 식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식당 안에 떠도는 화제는 단연 오늘 아카데미에 들어온 두 인물에 대한 것이었다. 뛰어난 재능과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페르마 대공왕의 아들 첼시피온에 대한 이야기도 물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단연 화제의 중심이 된 것은 황가와 대 귀족이 얽힌 스캔들의 주인공이자 이제는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 라딘 라메르였다. 넓은 아카데미 식당의 창가 자리에 앉아 혼자 식사를 하고 있던 라딘은 사람들의 시선이나 수군거림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는 속으로 애써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 젠장, 뭐가 신의 보석이고 뭐가 행운이야.' 돌아갈 방도를 궁리할 시간을 얻은 것도 잠시, 이제는 꼼짝없이 라딘 라메르라고 불리게 된 도현은 억지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사실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신의 보석에게 선택받았으니 앞으로는 신학을 배워 신의 대리자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안목을 높이고 제국을 위해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을 마치 세뇌라도 하는 것처럼 수 백번도 넘게 반복해서 들었다. 자신은 라딘이 아니고,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쳐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신의 보석이 그를 선택한 이상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에 사무칠 정도로 느꼈다. 입학하기 전 세 달 동안 도현은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었다. 신의 보석이라는 것을 얻게 되고 나서 가장 좋은 점은 불사의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사의 육체란 말 그대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칼에 찔리거나 하면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치지만 회복 속도는 무척 빠른 편이었고, 확실히 몸이 건강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 한 달은 그 보석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었다. 도현은 손바닥을 파고 들었던 보석의 영향으로 몽롱한 정신으로 한 달을 보냈다. 인간의 몸으로 신의 힘을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도현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 신세를 지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테이드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기도 했고, 얄미운 황태자와 몇 시간이나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었다. 꿈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하려 했던 도현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몸 안에 이상한 힘이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 신세에서 벗어난 후에는 기회를 틈타 황궁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황실 근위대에게 붙잡혀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언어의 천재였지만 몸을 움직이거나 싸우거나 하는 것은 지극히 보통이었으니 훈련받은 기사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파란만장했던 지난 세 달간을 돌이키며 도현은 애써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에서 도피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다 뒤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정상이 아닌 것은 도현일 터였다. 사실 이런 아카데미의 신학부 같은 곳에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황태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테이드의 집요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도현을 안도하게 했다. 도현의 손바닥을 통해 신의 보석이라는 흰 돌이 흡수된 이후로 테이드는 노골적으로 도현에게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라메르 백작가의 작위를 잇는 신분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둘만이 있게 되면 사람이 완전히 돌변해 버렸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따위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거부했던 도현이었지만, 결국 테이드를 피하듯이 아카데미로 들어왔다. 그로트 아카데미는 기숙사제 아카데미였기 때문에 한 달에 몇 번 외출하거나 집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면 테이드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도현은 깨작거리며 식사를 하다가 결국 반쯤 먹은 음식들을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가 맛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요즘 세대인 도현이라고 해도 몇 달 내내 양식만 먹고사는 것은 정말 지겨웠다. 여기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김치나 흰쌀밥, 토속적인 한국 음식들이 그리워졌다. 많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어도 도현은 그 속에 녹아들어 갈 수 없었다. 학생들이 모여있는 학교와 같은 장소인 이곳 아카데미 역시 도현에게는 이질적인 장소에 불과하다. 도대체가 처음부터 마법이니 기사니 하는 학부가 있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가장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한다면 도현이 이런 곳에 떨어져 버린 일 자체가 그렇겠지만. 도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많은 시선이 도현의 등에 따라붙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상 어쩔 수 없이 신학부에 속한 사람이라는 표시로 흰색의 법복을 입었지만 무슨 코스프레라도 하는 듯한 옷을 입고서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우선 방으로 가서 잠이라도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현은 아카데미 기숙사 건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뚫을 듯이 얼굴에 꽂혔지만, 도현은 그것을 무시하며 바로크 양식의 건물처럼 보이는 기숙사 3층 계단을 올라갔다. 기숙사는 학년별로 층수가 나뉘어져 있어서 3학년으로 편입한 도현의 방 역시 3층에 있었다. 고급 호텔처럼 화려해 보이는 석조 계단과 복도를 지나쳐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방 문 앞에 도착하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 문손잡이를 잡아 당기려던 순간이었다. " 라딘 라메르지?" 불쑥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똑같은 얼굴이 두 개 떠 있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엷은 갈색 곱슬 머리에 178인 도현과 거의 비슷한 키를 가진 쌍둥이 소년들이 도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 무슨 일인데?" 흥밋거리로 붙잡히는 것은 사양이다. 도현은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다. " 난 리올, 이쪽은 카드리. 마법부 소속이지." 도현이 생각하는 마법사의 이미지라기 보다는 불량기 섞인 시선을 가진 잘난 집의 도련님 처럼 보이는 쌍둥이는 거의 동시에 도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 학부가 다르니 자주 마주칠 리는 없겠지만, 잘 부탁해." 리올이라고 이름을 밝힌 쌍둥이 중 한쪽이 그렇게 말했다. 이유가 어쨌든 잘 부탁한다는 말에까지 짜증을 낼 이유는 없었다. 도현은 가볍게 손을 맞잡고 몇 번 흔들어 주었다. " 잘 부탁해. 그럼, 이만." 리올의 악수만을 받아들이고 나서 도현은 쌍둥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 라딘님이 안 계시니까 쓸쓸해요. 노스." 비어버린 라딘의 방을 청소하고 나서 고용인들을 위한 휴게실에 앉아 쉬고 있던 리사가 불쑥 말을 꺼냈다. 라딘 덕분에 다시 예전의 힘과 재산을 되찾은 라메르 백작가는 제도에 있는 거대한 저택으로 옮겨왔다. 예전부터 일하던 고용인들을 비롯해 새로 고용된 사람들만 해도 수십 명을 헤아렸고, 대놓고 백작가를 무시하거나 라딘을 경원시하던 사람들의 태도도 싹 달라졌다. 오래된 백작가의 고용인들은 여전히 라딘을 어려워했지만, 예전처럼 라딘의 이름을 듣는 것 만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는 일은 없어졌다. 이제 라딘은 불행을 부르는 아이가 아니라 신의 대리자인 것이다. " 리사, 넌 라딘님의 방이라도 청소할 수 있고, 여전히 그 분의 시녀지만 난 이제 라딘님을 돌봐드릴 일이 없어졌어. 여전히 라메르 백작가의 주치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도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고." 노스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대답하자 리사는 어머, 그런가요? 하고 놀란 듯이 되물으며 웃었다. " 그로트 아카데미를 졸업하려면 앞으로 5년이나 남았는데, 그 동안 몇 번이나 라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리사는 라딘이 주인이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라딘을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라딘이 불행을 몰고다니던 소년이라고 여겨지던 때부터 지금까지도 리사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로트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한 달 정도 새로 옮겨온 백작가의 저택에 머물고 있던 라딘은 황궁에서 보낸 학자들에게 둘러싸여 개인교습을 받았다. 3학년으로 편입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라딘은 그런 것들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억지로 학자들의 말을 듣곤 했다. 그러다가 정말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면 도망쳐서 숨어 있었다. 그 때마다 라딘이 들키지 않도록 도와주던 것이 리사였다. 그녀는 절대적으로 라딘의 편이었다. " 방학 때는 어차피 돌아올 테니까." 노스는 이제 조금 시큰둥한 표정으로 식어버린 홍차를 들이켰다. 백작가의 겉모습은 이미 과거의 영화를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몇 달만에 그렇게 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 라딘은 아카데미에 들어간 관계로 만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끊임 없이 백작을 방문했고, 선물을 보내며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비웃음을 던지던 귀족들의 손을 뒤집는 듯한 행동을 보고 노스는 다시 한 번 귀족 사회에 대한 경멸을 느꼈다. 그리고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노스의 경멸은 황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라딘이 불행해진 것도 라메르 백작가가 몰락한 것도 테이드와 라딘의 관계가 일그러진 것도 원인을 따지면 황제의 잘못이다. 그가 친구의 아내를 넘봤고 그로 인해 모든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쫓아냈던 라메르 백작가를 다시 제도로 불러들이면서 황제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노스는 문득 그 사실이 궁금해졌다. " 아카데미 기숙사에 가문의 하녀나 시종을 데려가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라딘님이 거절하셨지만 저는 그렇게 들었는데." 리사의 질문에 노스는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했다. 각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다니는 아카데미인 만큼 원한다면 시중인을 대동해도 좋다는 규칙이 있었다. " 하지만 시중인을 데려가지 않아도 아카데미에 속한 하녀들이 청소나 빨래까지 모두 해결 해 준다는 이야기도 들었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노스는 작게 덧붙였다. 귀족들은 편해서 좋겠군. 하고. 그로트 아카데미에도 의학부가 있다. 일반부는 여러 가지 학부로 나뉘어 지는데 전문적인 집사들의 교육을 위한 학부를 비롯해 의학부도 그 안에 속해있었다. 돈만 있었다면 노스도 그로트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겠지만, 노스는 그럴 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라메르 백작가에 고용된 것이 노스에게는 좋은 일이 되었지만, 대륙 최고의 명문 아카데미의 이름이 탐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 라딘님이 보고 싶은데......" 노스의 말을 듣고서 눈에 띄게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리사는 중얼거렸다. " 라딘님이 저택을 비우는 동안에도 넌 라딘님의 전속 시녀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리사는 그제서야 조금은 안도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네가 가지 않아도 황제 폐하께서 알아서 조치를 취했을 테니 괜한 걱정은 필요 없어, 리사. 이제 라딘님은 단순히 라메르 백작가의 아들이라는 신분만 가진 게 아니니까." " 신의 보석이 주는 힘이라니....대체 어떤 것일까요?" 화제가 신의 보석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자 리사는 금새 눈을 반짝였다. 평민에게 신의 보석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옛날 얘기처럼 다른 곳의 이야기였는데, 라딘 덕분에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저택에 머무는 동안 라딘이 신의 보석이 준 힘을 쓴 적은 없었다. 겉보기에도 뭔가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황제가 그렇게 발표했고 소문이 돌고 있으니 그렇다 라고 믿고 있을 뿐이었다. " 신의 보석에게 선택받은 사람이 힘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힘 자체보다도 신의 대리자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강하지. 신의 힘처럼 위대하고 큰 힘은 국가에서도 함부로 쓰려고 하지 않아." 리사는 노스의 설명에 감탄하며 완전히 식어빠진 노스의 찻잔에 새로운 홍차를 따라주었다. --------- 그로트 아카데미에서 첫날을 보내고 도현은 방에 비치된 마법 시계가 7시를 가리키던 무렵에 눈을 떴다. 시설 자체는 현대와 비교할 만큼 편리하지는 않았지만 TV나 전화기, 컴퓨터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지낼만 했다. 아카데미 자체가 고급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개인에게 주어지는 기숙사 방도 특급 호텔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편안한 장소에 있다고 해도 도현의 마음은 안정을 느끼지 못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버릇처럼 꿈에서 깨어나기를 바랬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사실은 도현의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었고, 어떤 곳에 있어도 불안함이 느껴졌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는 이곳이 아닌데, 어째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왜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인지. 누구를 붙잡고 묻거나 하소연하고 싶어도 그럴 상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도현은 창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넓게 펼쳐진 아카데미의 전경은 고풍스러운 대학 캠퍼스 같았다. 중세 시대의 정원처럼 꾸며진 미로 정원과 고딕,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아름다운 건물들의 외관을 바라보면서 도현은 굳어진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이곳에 존재해도 마음은 언제나 돌아가야 할 곳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벌써부터 많은 학생들이 일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 광경 속에서 오직 도현 혼자만이 이질적인 존재다. 하지만 의심을 품는 사람은 언제나 도현 자신뿐이다. 그 사실이 도현을 가장 괴롭게 만들었다. 도현은 시간표나 오늘 참석해야 할 수업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열린 창문 사이로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똑똑. 언제부터인지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도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여전히 얇은 잠옷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신경을 끄고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카데미 마법부 로브 차림을 한 어제의 쌍둥이가 서 있었다. " 지금 일어난 거야? 게으르시군." 말투로 미루어 어제 멋대로 말을 걸고 악수까지 청했던 리올인 것 같았다. 도현은 팔짱을 낀 자세로 열린 문틀에 기대서서 쌍둥이쪽을 응시했다. " 무슨 일인데?" "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말하러 왔지." " 별로 생각 없어. 너희들끼리 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도현은 친구를 사귈 마음이 없었다. 떠나야 할 이곳에서 친구를 만들고 안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 라딘, 수업은?" 도현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을 챙기려 하는 점이 희원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현은 피식하고 웃었다. 조금이라도 닮거나 비슷한 점을 발견하면 금방 누군가와 연관 시키려 하다니 자신이 한심하다. " 일부러 친해지라고 누군가에게 말이라도 들은 거야? 하지만 난 그럴 마음도 없고, 그럴 가치도 없어. 돌아가." 리올과 카드리의 표정의 거의 동시에 굳어졌다. 설마 이런 말을 들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것 같았다. " 이봐,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지금까지 입도 열지 않았던 카드리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목소리는 비슷했지만 카드리 쪽이 목소리가 조금 더 높았다. " 난 남의 흥밋거리가 되는 건 질색이야. 구경거리가 아니라고." " 누가 네게 구경거리가 되어 달라고 했어? 호의와 흥미도 구별 못하는 거야?" " 카드리, 그만 해." 언성이 높아지자 다른 방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었다가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중 한 명이 라딘이라는 사실에 놀라서인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 난 아카데미에 들어올 생각은 없었어. 억지로 들어가라니 어쩔 수 없이 온 것 뿐이야."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디올이 의외로 강한 힘으로 닫히려는 문을 잡았다. " 네가 뭘 그렇게 불만스럽게 여기는 지는 모르지만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건 그만 둬. 우리의 행동이 오해를 불러왔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겠지만 우리 역시 괜한 오해를 받는 건 사양이야." 잘난 척 하는 있는 집 도련님으로 보이던 리올이 의외로 진지하게 말하자 도현은 놀랐다. " 기분이 나쁘게 들렸다면 미안해." 도현이 사과하자 리올은 금새 표정을 바꾸고 싱긋 웃어 보였다. " 그럼, 함께 식사하러 갈래?" 도현은 밥 먹는데 엄청나게 집착을 보이는 듯한 쌍둥이를 보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를 가도 비슷한 나이대가 만나면 통하는 것은 있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잠깐 기다리고 있어.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조금 전에 언성을 높이고 말싸움을 했던 기억은 금방 털어 버리고 쌍둥이는 웃는 얼굴로 복도에 선 채 도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흥미를 담은 얼굴로 일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던 같은 층의 학생들은 도현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다시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 소문이 좀 잘못된 거 아냐?" " 뭐가?" 라딘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리올과 카드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했다. " 그런 과거가 있다면 좀 더 어두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잖아. 지금까지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저택에 갇혀 지냈다는 말, 거짓말 아니야?" 카드리의 말에 리올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확실히 라딘은 소문과는 전혀 달랐다. " 신의 보석의 선택을 받았으니 달라지기라도 한 것 아닐까? 더군다나 빛의 보석이잖아. 어두운 과거도 찢긴 마음의 상처 같은 것도 모두 치유되었을 지도 모르지." 그렇게 대답하기는 했지만, 사실 어느 누구도 신의 보석이 선택한 사람이 어떤 식의 변화를 겪는지, 그 변화라는 것이 있기나 한지는 모른다. " 어쨌든 우울한 성격이거나 존재감도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관심을 가졌을 리도 없지. 신의 보석의 주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라딘에게 말을 걸었을 거야 그렇지?" 이어진 리올의 말에 카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쌍둥이로 태어나 지금까지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는 두 형제는 마치 하나인 채로 살아온 것 처럼 깊이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의 마법은 함께 있을 때 더욱 강해진다. " 첼시피온 왕자와는 확실히 달라." 카드리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흰색 법복을 걸친 라딘이 모습을 드러냈다. " 가자." 조금 전까지 그들 사이에 흐르던 험악한 분위기나 신경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라딘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더니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식욕이 없나 보네?" 리올이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현은 빵을 작게 찢어서 수프에 찍어서 두어 조각을 먹었을 뿐, 포크로 샐러드를 몇 번 쿡쿡 찔러대다가 결국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 아... 질려서." 도현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이쪽에서 도현을 라딘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하고 있다고 해도 도현은 라딘이 아니었고, 원래 이쪽 사람도 아니다. 아무리 서양식이나 인트턴트식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세대라고 해도 도현은 한국 사람이었으니 이런 식단은 이제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만큼 질린다라는 생각 때문에 입에 대기도 싫어졌다. 안 먹으면 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먹기 싫은 것은 먹기 싫은 것이다. 그런 도현과는 대조적으로 쌍둥이 형제는 그다지 큰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식당은 뷔페식으로 되어 있어서 먹고 싶은 양만큼 얼마든지 먹을 수가 있었다. 고급 아카데미라고 하더니 뷔페에 나오는 음식들도 왠만한 고급 호텔 뷔페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음식들이 고급이어도 도현은 리올과 카드리 형제 처럼 맛있게 먹을 수는 없었다. 도현은 쌍둥이 형제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말 잘 먹는구나, 그렇게 맛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라딘, 너....아무리 봐도 소문이랑은 전혀 달라."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카드리가 언제 식사를 마쳤는지 그렇게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온 탓에 도현은 한동안 자기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 당연하지, 난 라딘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말을 알아듣자 도현은 툭 하고 내뱉듯이 말했다. " 뭐?" 쌍둥이의 표정이 동시에 돌변했다. " 말 못 알아들어? 난 라딘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불행히도 얼굴이 똑같아서 아무도 안 믿어줄 뿐이지만." 리올과 카드리는 도현의 말에 놀라서 크게 뜬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할 리는 없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에는 뭐라고 말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 어딜 가나, 라딘, 라딘.... 난 그런 이름이 아니야. 정말 지겨워서 못살겠어." 도현은 팔짱을 낀 자세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식당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끊이지 않던 시선들이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 못 믿으면 못 믿겠다고 말해. 쓸 데 없이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막 입을 열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리올은 말문이 막힌 듯 하려던 말을 삼켜버렸다. 도현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순식간에 세 사람 사이에 떠돌던 공기가 경직되었다. 도현은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둘에게 신경질 적으로 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라딘이라는 이름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며 타인의 인생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 하나 인정하려 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지만 지금 도현은 타인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강요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의 보석이건 테이드의 동생 역이건 그런 건 모두 진짜 라딘에게 주어졌어야 할 것들이다. 어쩌다가 우연히 이 자리에 있게된 도현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도현은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 도현이 이 자리에 있다면 라딘은 어디에 있을까. 테이드에게서 도망쳤다던 라딘은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자문하던 사이 갑자기 등뒤로 싸늘한 무언가가 다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만약, 도현이 여기에 있고 라딘이 도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둘이 완전히 뒤바뀐 거라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현기증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도현은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양팔로 짚었다. " 이봐?" " 라딘?!" 쌍둥이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당혹스러운 얼굴로 도현에게 다가와 몸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런 쌍둥이의 반응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닿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만약, 정말로 도현의 추측이 맞다면 정말 둘이 뒤바뀐 거라면. 그 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얼굴이 같다는 이유로 가족들 역시 이곳 사람들처럼 착각하고 있다면... 도현은 눈을 감았다. 장난으로라도 그런 상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된 거라면 지금까지 한도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봐, 괜찮아?" 놀란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현을 들여다보고 있는 리올과 시선이 마주치자 도현은 그제서야 '현실'로 되돌아왔다. ------- 파드웰과 함께 대소사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테이드의 손에 은색 인장이 찍혀 있는 그로트 아카데미의 우편물이 잡힌 것은 우연이었다. 그로트 아카데미에서 테이드 앞으로 우편물이 온 것은 이틀 전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바쁜 일이 많아서 테이드는 그것을 책상 한쪽에 놓아둔 채 잊고 있었다. 여러 가지 서류가 책상 위에 쌓이면서 그 아래 깔려 있던 편지가 이틀이 지난 후에 테이드의 손에 잡힌 것은 아무래도 그것을 읽어달라는 신호처럼 여겨져서 테이드는 조용히 봉투의 밀랍을 뜯어냈다. 고풍스러운 필체로 안부를 물으며 시작된 그로트 아카데미 학장의 편지는 중간쯤에 이르러서야 본론을 꺼내고 있었다. 귀 백작가의 자제인 라딘 라메르가 신학부의 수업에 참석하지 않고 있으니 조취를 취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신의 보석을 가진 자로서 수업에 불참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정중하게 말을 돌려 충고하는 듯한 내용을 읽고 테이드는 불쾌함을 느꼈다. 신의 보석이 문제였다. 신의 보석이 라딘을 선택하지만 않았다면 라딘은 지금쯤 테이드의 시선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자주 얼굴을 볼 수도 없는 그로트 아카데미 같은 곳에 보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신의 보석이 라딘을 선택한 덕분에 라메르 백작가가 다시 일어서고 예전의 영화를 되찾은 것도 사실이지만 테이드에게 그것은 커다란 기쁨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행이었다. 라딘이 테이드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게 된 것은 17년 이래 처음이었다. 그것도 불가항력으로 떨어지게 되자 테이드는 이런 일에 휘말리게 만든 황태자 케이스워크가 증오스럽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케이스워크가 라딘을 초대하지만 않았어도 신의 보석이 라딘을 선택하고 받아들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케이스워크가 황태자라는 것이 문제였다. 제국의 보물을 마음대로 꺼내올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 자체가. " 내일 그로트 아카데미를 방문하겠다. 준비를 해 놓도록." " 알겠습니다. 백작님." 차분하게 대답하는 파드웰은 편지의 내용을 전혀 궁금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라메르 백작가에서 집사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쓸 데 없는 관심을 겉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편지를 접어서 서랍에 넣어 놓고 나서 다시 처리할 일에 몰두하려고 했지만, 테이드는 조금 전과 같이 집중할 수 없었다. 라딘과 제대로 말을 주고 받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황궁에서 한 달을 보내고 나서 그로트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까지 두 달 동안 라딘은 제도에 마련된 라메르 백작가의 거대한 저택에서 황실에서 보낸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저녁 식사 때면 꼬박꼬박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이례적인 인사말이 오고 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열흘 전에 있었던 그로트 아카데미의 입학식에 참석해서 라딘을 지켜보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신의 보석이 라딘의 몸 안에 흡수된 이후로 라딘은 이미 라메르 백작가의 라딘으로서만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신의 보석이 라딘의 몸에 흡수되고 나서 처음으로 라딘과 대면했을 때, 테이드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라딘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라딘은 상당한 양의 피를 흘렸고, 시종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황태자 케이스워크에 의해 테이드는 라딘에게서 격리되었다. 케이스워크는 테이드가 저지른 일을 보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조금 머리를 식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테이드 보다 3살이나 어렸지만 케이스워크는 언제나 침착했다. 황실의 피가 주는 천성적인 오만함과 느긋함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 자신이 그런 성격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테이드가 기억하는 케이스워크는 아직 어린 아이였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지금처럼 완전히 황태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케이스워크는 테이드에게도 낯설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케이스워크는 황제 페히너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은 존재인 것이다. " 잠시 쉬도록 하지." 결국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테이드는 하던 일을 멈추고 벽 쪽에 놓인 안락 의자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가문의 이름을 되찾고, 모든 것이 다시 17년 전으로 되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테이드의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지금 17년 전과 다른 것은 단 하나. 라딘이 존재한다는 것. 라딘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테이드를 초조하게 만든다. 테이드에게서 평온을 앗아가 버린다. 다가서면 도망치고, 고개를 숙인 채 창백한 낯빛으로 입술을 깨물고, 결국엔 기억을 잃어 버렸다. 그 동안 집착해왔던 라딘의 탄생으로 인해 무너졌던 모든 것들이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 왔는데도 테이드의 마음은 복구되지 않는다. 라딘이 없었던 그 시절로는 되돌아 갈 수 없다. 이제는 두 다리를 부러트리는 것만으로는 라딘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질리지도 않고 자신은 라딘이 아니라고, 제발 착각하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말하는 라딘에게 언제 기억이 되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반항적으로 대답하고 쏘아보는 지금의 라딘이 싫은 것은 아니다. 확실히 지나칠 정도로 움츠러들어 있던 라딘에 비하면 훨씬 생동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름을 부정하는 라딘을 가만히 내버려 둘 정도로 테이드는 마음씨 좋은 형이 아니었다. 그리고 라딘이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의무를 소흘리하는 것도 그로 인해 가문의 이름에 흠집이 생기는 것도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신의 보석을 가졌다는 사실만이 아니더라도 제도에는 아직도 스캔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이 이상 라딘이 다른 사람들의 흥미 어린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고 테이드는 생각했다. 점심 식사를 거르고 방에 틀어 박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문을 열자 확실히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단정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 학장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입학식 때 단상 위에서 얼굴을 본 기억이 났다. 아카데미의 총 책임자인 학장의 비서 같은 역할을 하는 남자였다. 이름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 무슨 일이죠?" 도현의 물음에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 라메르 백작님께서 와 계십니다." 그 말에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대체 테이드가 왜 아카데미에 와 있지? 라는 의문이 든 것도 잠시. 도현은 의문의 답을 쉽게 찾아냈다. 어딜 가던 다 똑같다는 건가. 문제아에게는 집에 연락을 한다는 거군. 입학식 이래로 도현은 한 번도 수업에 출석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신학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주변에서 자신을 라딘으로 여긴다고 해도 도현은 절대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할 수 없었다. " 지금 가면 되는 겁니까?" 도현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도현은 바로 문을 닫고 남자를 따라 나섰다. 테이드가 어떤 얼굴로 기다리고 있을 지 상상이 간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폭력을 휘두를 지도 모른다. 이미 질릴 정도로 테이드의 의외성에 놀라고 황당한 일들을 당했다. 그로트 아카데미에 들어온 후 유일하게 좋은 점이 테이드와 떨어져 지낸다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도현이 실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현이 아무리 인정하지 않아도 어쨌든 현재 도현의 보호자는 테이드였다. 기숙사 건물을 빠져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더 걸어서야 학장실이 있는 아카데미 중앙에 위치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남자의 뒤를 따라서 도현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 학장님. 롭입니다.' 생각보다 젊게 들리는 목소리가 들어오라고 대답을 하자 롭이라고 말한 남자는 학장실 문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원목에 흰색을 입힌 문은 황실에 있는 것만큼이나 정교해 보였다. 학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사각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붉은 색으로 감싸인 의자에 앉은 테이드와 강당에서 본 적이 있는 안경 쓴 30대 후반의 남자가 앉아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 이쪽으로 앉게." 학장은 도현에게 테이드의 옆자리를 권했다. 도현은 굳어지려는 표정을 억지로 아무렇지 않게 만들며 테이드의 옆에 앉았다. 어디까지나 테이드는 대외적인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도현의 앞에 찻잔이 놓이고 나서야 학장은 입을 열었다. " 오늘 이렇게 라메르 백작님을 모신 것은 라딘군이 수업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기가 시작되고 열흘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수업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업을 듣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지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그렇게 막힌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도현은 학장과 마주앉은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깨달았다. " 오래전부터 신의 보석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걸맞는 교육을 받아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져 왔습니다. 더군다나 대륙에 빛의 보석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단 세 명뿐이었지요." 도현은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지만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자기 최면처럼 저런 말은 들리지 않는다고 계속 속으로 되뇌면서. 침묵을 지키는 도현과 테이드의 앞에서 학장은 신학의 중요성과 신의 보석을 가진 신의 대리인이 얼마나 중요한 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해 설명했다. " 수업에 참석하게 만들면 되는 겁니까?" 한참동안 이어지던 학장의 연설이 끝난 후에 테이드가 입을 열었다. 냉담한 테이드의 반응에 학장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학부모 면담을 신청해서 댁의 아이가 이런 문제를 일으켰으니 똑바로 하게 만들라고 설명하고 학부모는 네, 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삼자 면담의 정석인데 지금은 약간 그 입장이 바뀐 것 같았다. " 동생의 방으로 가서 잘 타이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신의 보석을 받아들인 일에 아직까지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몸이 좋지 않아서 저택 안에서만 지냈으니 갑자기 아카데미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지내는 것도 부담스럽게 느껴졌겠지요." 테이드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말했다. 불과 세달 전이었다면 테이드는 아무리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그로트 아카데미의 학장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메르 백작가는 예전의 지위를 되찾았고, 라딘은 신의 대리자였다. " 가자, 라딘." 도현은 차갑게 내리깐 시선을 돌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테이드도 도현도 찻잔에는 손 한 번 대지 않았다. 거의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학장실을 빠져 나온 둘은 중앙 건물을 빠져 나오자 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에서 멈춰섰다. " 네가 이곳에서 어떤 식으로 5년을 보내건 간에 나는 상관하지 않겠다." 도현은 그래서? 라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테이드를 노려 보았다. " 친형도 아니면서 돌보는 척 하지 마." 비틀린 도현의 말에 테이드는 피식하고 웃었다. ----- " 아직도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도현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 아니, 벗어날 거야. 여기에서,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서."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만약 벗어날 수 없다면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도현을 불안하게 만드는 상상. 라딘과 도현의 삶이 뒤바뀌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도현의 초조함을 가중시켰다. " 나는 이런 곳에서 신학을 배울 생각도 없고, 제국을 위해 일할 생각도 없어. 그리고 물론 당신의 동생으로 살 생각도 없지." 테이드는 예전처럼 도현의 말을 듣고 바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행동으로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지독하게 차가운 눈으로 도현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도현은 테이드가 넌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한다고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었고, 시도도 했고, 성공할 뻔 하기도 했지만 붙잡히고, 낯선 거리에 혼자 섰을 때 느낀 소외감이 도현에게 현실을 각인시켰다. 이곳은 낯선 세상이다. 자신이 아는 곳이 아니다. 홀로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로 뛰어 나왔을 때, 도현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 돌아가."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기숙사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도현은 테이드에게 어깨를 붙잡혀 억지로 돌려 세워졌다. 테이드는 도현을 돌려세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흔들림 하나 보이지 않는 녹색눈동자가 기이할 정도로 생소해서 도현은 어깨의 아픔도 잊은 채 테이드의 눈을 응시했다. 오늘의 테이드는 이상하게 테이드 답지 않았다. 도현이 알고있는 그라면 이렇게 조용히 바라보고 있기만 할 리가 없는데도, 테이드는 도현의 어깨를 붙잡은 채 가만히 내려다 볼 뿐, 입을 열지도 그 이상의 동작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둘은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현은 눈에 띄는데 한눈에 봐도 형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닮은 얼굴이 서 있다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쏠렸다. 식사를 마친 학생들이 식당에서 빠져 나와 기숙사나 다음 수업을 위해 이동하다가 멈춰서 있는 둘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식사는 했어?" 먼저 입을 연 것은 도현이었다. 테이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도현은 어깨를 붙잡은 테이드의 손을 떼어버리고 몇 걸음을 옮기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 식욕은 없지만 식당으로 가자. 이런 곳에서 구경거리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가서 얘기해. 그렇게 입다물고 있는 건 당신답지 않아." 도현의 모습이 시야에서 작게 변하자 테이드는 그때서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은 이후로 라딘은 테이드를 제대로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라딘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라딘 답다?' 테이드는 피식하고 웃었다. 언제나 주눅이 든 채 테이드와는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동생이 기억을 잃고 나서야 제대로 테이드의 눈을 마주보고 당당하게 반말을 한다. 한동안 라딘을 보지 못해서 느꼈던 초조함은 라딘의 얼굴을 본 순간, 테이드에게 향한 반발심이 가득한 눈을 본 순간, 제멋대로인 말투를 들은 순간 사라졌다. 테이드는 라딘과 자신을 번갈아 응시하는 시선을 무시하며 멀리 보이는 라딘의 뒷모습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점심 시간이 지난 후여서 식당은 한산했다. 늦은 식사를 하고 있는 몇몇 학생들과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하녀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이는 가운데 도현은 테이드와 마주 앉았다. 간단한 샐러드 한 접시만을 가져온 도현과 달리 테이드는 스테이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음식을 가져와 천천히 먹고 있었다. ' 백작님이 이런 곳에서 잘도 먹는군...' 도현은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그로트 아카데미 식당 음식은 상당히 맛이 좋았다. 왕족이나 귀족들도 상당수 다니고 있는 곳이니 만큼 당연히 신경을 쓴 것이겠지만, 도현에게는 아무리 최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이라도 식욕을 돋궈 주지는 못했다. " 이곳에 얌전히 틀어박혀서 5년 동안 신학 같은 걸 공부하라는 말은 하지 마. 내 전공은 언어지 신학이 아니고, 이런 곳에서 쓸모도 없는 학문에 매달릴 생각은 없어." 도현은 테이드의 앞에 놓인 음식이 반정도 줄어들었을 때 입을 열었다. 테이드는 조용히 도현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 네게 무엇을 배우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 " 그럼, 뭔데? 안 배워도 상관없어? 황제나 황태자가 시킨 거잖아. 아니지, 내 덕분에 가문이 부흥했으니 좋은 일인 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감정적으로 말을 내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도현은 자제할 수 없었다. " 물론 황제 폐하나 황태자 전하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다." " 친구의 아내나 건드리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자에게 충성할 필요가 있어?" 도현의 그 말이 테이드의 신경을 건드렸다. 마치 타인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과거를 들먹이는 동생을 더 이상은 가만히 두고볼 수 없었다. " 역시 거짓말이었군." 굳어진 듯한 차가운 말투를 내뱉으며 테이드는 도현을 노려보았다. " 뭐가?" 도현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되물었지만 테이드는 처음부터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기억을 잃었으면서 가족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고 있다니, 역시 라딘은 테이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테이드는 그렇게 단정지었다. " 일어나라, 네 방으로 가자." " 싫어, 여기서 얘기 해." 어느새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테이드가 말했지만 도현은 의자에 팔짱을 끼고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 여기서 무슨 꼴을 당해도 좋다면 그렇게 하지." " 하." 도현은 기가 차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 넌 모두를 속였다." " 내가...누구를 속여? 이제는 믿지 못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내가 당신들을 속였다고?" 어째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의심이라는 것을 하지 못하는 건지. 한번 믿으면 그 믿음을 바꿀 생각도 하지 않는 건지. 말이 통하는 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답답해서 도현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테이드나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입에 달고 사는 라딘은 도현을 대신해서 도현의 자리에 앉아 있을 지도 모르는데, 기현의 눈앞에서 동생 행세를 하고 가족들 사이에서 웃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지금 도현은 이런 곳에서 피곤하기만 한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 " 그렇게 믿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리고 내가 황제를 들먹여서 화가 난 모양인데, 그 신물나는 과거 얘긴 노스한테 들었어. 됐어?" 노스의 이름을 꺼낸 것만으로 불똥이 그에게 튈 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도현은 라딘도 아니고 노스가 친근하게 대한다고 해서 그에게 의리를 지킬 필요도 없으니까. " 친구의 부인을 넘보고도 오히려 잘난 척 하면서 권력으로 눌러버린 황제도 웃기지만, 모든 책임을 한 명에게 돌린 당신들도 웃겨. 이 세상은 웃기는 것들 투성이야. 이해할 수가 없어." 도현이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일어선 자세 그대로 도현을 노려보고 있던 테이드가 의식하지도 못하던 순간에 도현의 뺨을 쳤다. 이전에 맞았을 때 보다 훨씬 강도가 센 타격에 도현의 고개는 오른쪽으로 꺾이듯이 돌아갔다. 목뼈에서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철썩하는 타격음이 들린 순간, 식당 안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얼마 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도현과 테이드에게 몰려들었다. " 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테이드는 싸늘하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테이블을 돌아 도현의 옆으로 와서 섰다. 붉게 부어오른 뺨을 왼손으로 감싼 채 피식거리는 웃음을 토해내는 도현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순간, 타오르는 듯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배어 나와 있었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도현은 테이드의 녹색 눈동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 당신이야말로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 도현은 그렇게 씹어 뱉듯이 말하고는 테이드의 뺨을 철썩하고 때렸다. 의외의 사태에 테이드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도현이 등을 돌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손 힘은 그리 세지 않았지만 테이드는 라딘이 자신에게 반항했다는 사실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것을 보였다는 사실에 놀라서 굳어진 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대단한데?" 식당 건물을 막 빠져 나와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친근한 척 말을 걸었다. 도현은 뭐야? 라는 뜻을 담은 험악한 눈으로 휙하고 돌아보았다. 그 순간 도현은 자신이 조금 전까지 무엇 때문에 초조해 하고 화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뺨을 맞아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말을 건 상대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저 사람, 네 형 아니야? 보통 형에게 맞았다고 형을 때리나? 평민들도 그런 행동은 안 할텐데, 굉장해." 역광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얇은 금색 머리카락. 황태자인 케이스워크도 금발이었지만 지금 보고 있는 금발은 부드럽게 물결치는 듯한 웨이브를 가진 보석 같은 색이었다. 게다가 남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는데도 아름답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외모.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사가 실존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아하고 달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전형적인 게르만인의 특징인 금발에 푸른 눈동자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사실을 도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말없이 얼굴을 쳐다보는 도현의 시선을 어떻게 느꼈는지 소년은 싱긋 하고 웃어 보이며 다시 말을 꺼냈다. " 나는 첼시피온. 사이드 공국에서 온 첼시피온이야." " 한도현." 도현은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다. " 한도횬....? 특이한 이름이네?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나라도 있던가?" 고개를 갸웃하는 첼시피온의 얼굴에서 겨우 시선을 돌리고 도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제대로 발음해. 도횬이 아니라 도현이야. 그리고 난 이곳 사람이 아니야. 이곳에 있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으니까 생소한 건 당연하지." " 그래? 그러면 어디서 왔는데?" 도현이 막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 라딘." 굳어진 듯이 식당 안에 서 있던 테이드가 가면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계단 위에서 도현을 부르고 있었다. ------- "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당신 동생은 여기에 없어. 당신이 찾아오란 말이야!" 의아함을 담은 첼시피온의 시선을 느꼈지만 도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 도현. 내 이름은 한도현이야." 도현은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기숙사로 향했다. 모든 것들이 다 미쳐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평범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는 요구조차 누구 하나 들어주지 않는다. 평생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도현은 결국 지쳐버릴 지도 모른다. 누가 이름을 어떻게 부르던지 상관하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인 이름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만이 치밀어 오른다. 돌아갈 방법 따위를 찾아내지도 못했다. 아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이 어디인지 조차 모른다. 어떤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 의지할 사람도 없다는 것. 그 사실은 도현의 가슴속을 물들인 초조함이 커지게 만들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도현은 알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이 어리다는 것을, 작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끈적일 정도로 달라붙는 시선을 떨쳐내듯이 빠른 걸음으로 도현은 기숙사 3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 테이드 라메르입니다." 테이드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 멀어진 라딘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첼시피온에게 인사했다. " 동생이 폐를 끼쳤군요." " 첼시피온입니다." 아름다운 소년 첼시피온은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테이드의 인사를 받았다. 공국의 왕자였지만 페르마 대공왕은 대륙을 움직이는 다섯 명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첼시피온 역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페르마 대공왕의 아들이라는 지위 뿐만이 아니라 눈길을 끄는 외모나 본인의 마법 실력으로도 유명했지만, 사람들이 첼시피온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페르마 대공왕의 그림자였다. " 소문과는 확실히 다르더군요." "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테이드의 말에서 별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읽어내고 첼시피온은 화제를 돌렸다. " 제도의 날씨는 여전히 따뜻하군요. 제 고향은 쌀쌀한 편이어서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 쯤이면 온화한 날씨에 너무 물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 저도 제도로 돌아온 지는 세 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 라딘과는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별로 기회가 닿질 않더군요." 조금 전, 라딘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첼시피온은 말을 이어갔다. " 수업에 참석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라메르 백작님보다는 제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일을 맡아도 되겠습니까?" 테이드는 잠시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첼시피온을 응시했다. 모든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정도로 뛰어난 첼시피온의 얼굴을 보고도 테이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첼시피온님." " 라메르 백작님은 이대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 오늘은 라딘이 머리를 식히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좋겠지요." 테이드는 첼시피온의 등장으로 인해 오늘의 계획을 완전히 변경했다. 당장 라딘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리를 피하는 편이 좋다. 게다가 페르마 대공왕의 아들이자 사이드 공국의 다음 왕이 될 첼시피온과 라딘이 친구가 된다면 분명히 유리한 점이 있다. 지금은 개인적인 일보다는 가문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테이드는 결론지었다. 테이드가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고 나서 첼시피온은 내리 꽂히는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기며 기숙사로 향했다. 수업을 마치고 조금 늦게 식당으로 간 것이 행운이었다. 그곳에서 의외의 장면을 보고 나서 첼시피온은 소문의 라딘 라메르에게 흥미가 생겼다. 사실 처음에는 제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라메르 백작가의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정도로는 첼시피온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라딘이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첼시피온에게 라딘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 첼시피온님이다." " 첼시피온 왕자님이야." 기숙사에 들어서는 동안에도 학생들은 첼시피온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거나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군거렸다. 첼시피온 역시 3학년이기 때문에 기숙사 3층에 방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왕족들에게는 최상층에 있는 특별실이 주어진다. 첼시피온은 처음으로 방문한 일반 기숙사 3층 복도에서 이름이 쓰여진 팻말을 하나 하나 읽어가며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을 찾았다. 긴 복도 중간 정도에 다다랐을 때 첼시피온은 라딘의 방을 찾았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나서 첼시피온은 기다렸다.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첼시피온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몇 분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문이 열리고 조금 지친 듯한 표정의 라딘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첼시피온과 거의 비슷했지만 마른 듯한 체구 때문에 첼시피온 쪽이 훨씬 더 커보였다. " 안녕? 아까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해서 찾아왔는데,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어?" 라딘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문에서 비켜섰다. " 들어와." 첼시피온은 문을 닫고 라딘의 뒤를 따라갔다. 꽤 고급으로 보이는 커딜 왕국산 카펫이 깔린 거실에 들어서자 라딘은 첼시피온에게 의자를 권했다. 윤이 나는 황갈색 나무 탁자 위에는 방금 마시고 있었던 듯 아직 온기가 피어오르는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 차 마실 거야?" " 응, 부탁해." 편하게 의자에 앉은 첼시피온은 라딘이 티 포트와 찻잔을 들고 오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라딘은 꽤 익숙한 동작으로 티 포트를 기울여 차를 따랐다. " 고마워. 도현." 조금 전에 들었던 이름을 부르자 라딘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확하고 펴졌다. 의외라는 듯한, 조금은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기쁜 것 같기도 했다. " 꽤 어려운 발음이었는데, 잘 하네? 언어에 재능이 있나보다." " 이래봬도 왕족이니까 4개 국어 정도는 할 줄 알아." " 그렇구나." 라딘은 왠지 모르게 즐거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첼시피온은 그 이상한 어감의 이름을 한 번 부른 것만으로 라딘이 갑자기 경계를 풀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묻는 말에 대답은 잘 해주고 있지만 첼시피온을 조금 꺼리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 여기 오기 전에 네 형을 만났어." 따뜻한 찻잔을 들어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라딘의 눈빛이 굳어지는 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형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 너도 라메르 백작가의 스캔들인지 뭔지 다 알고 있는 거겠지? 하긴, 대륙에 있는 귀족들이라면 대부분 아는 소문이라고 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어. 그 사람은 내 형도 아니고."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 기억을 잃었다던가 하는 소문도 첼시피온의 귀에 들려왔다. 하지만 소문대로 기억상실이라고 여기기엔 뭔가가 이상했다. 라딘과 테이드의 얼굴을 직접 확인한 첼시피온은 어디서 만난다고 해도 누구든 둘이 형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못할 만큼 닮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라딘은 이상할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형을 부정한다. " 그렇게나 닮았는데 이상하지 않아?" 질문을 던지고 나서 첼시피온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엷게 우러난 것 같았지만 차맛은 꽤 훌륭했다. " 믿건 안 믿건 상관없지만, 난 이곳 사람이 아니야. 여기에 있는 어떤 나라에 속하지도 않았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라딘은 첼시피온을 시험하기라도 하듯이 눈을 마주쳐왔다. 라딘의 검은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진지해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저런 식으로 자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가족을 부정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사실' 일지도 모른다. " 하지만 신의 보석을 가진 이상 넌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 " 그게 무슨 소리야?" 첼시피온의 말에 라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상당히 간절한 눈빛이어서 첼시피온은 잠시 사실을 이야기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 신의 보석이 주인으로 선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자. 즉, 신의 대리인으로 선택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없다는 말이지. 물론 대륙 어디든 갈 수 있지만, 네가 만약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자 한다면 신의 보석이 그것을 막을 거야." 라딘은 충격을 받은 듯 조금 전의 놀란 표정 그대로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 .....거짓말이지.....?"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라딘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움직였다. " 나도 너와 비슷하다면 비슷한 경우니까 확실하지." 라딘의 얼굴에 약간의 표정이 되돌아왔다. 첼시피온은 여유 있는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 내 어머니는 이곳 사람이 아니야. 아니, 인간이 아니지." " 인간이....아니야?" 놀란 듯한 목소리를 듣고 첼시피온은 작게 웃었다. " 괴물 같은 것이 아니고 요정." " 요정...?" 라딘은 뭔가 엄청나게 황당한 말이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으로 첼시피온을 응시했다. " 내 외모가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지." 작게 미소지으며 첼시피온은 소리를 죽여 덧붙였다. " 나도 신의 보석을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난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없어." 또 다시 놀라는 라딘을 보며 첼시피온은 확실히 흥미를 느끼게 만드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 내가 신의 보석의 선택을 받은 건 10살 때 였지. 그 이후로 난 어머니를 만나러 갈 수 없었어. 어머니는 요정이어서 요정들의 땅에 계시거든. 외모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지만 몸은 거의 인간과 비슷해서 나는 요정들이 가지는 특수한 능력은 없어. 대신 마법쪽으로 재능을 물려받았지. 아, 내가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건 비밀이야." 라딘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뭔가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라딘은 생각에 잠겼다. 첼시피온은 라딘을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온 몸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현은 엷은 미소를 떠올린 채 여유 있게 차를 마시는 첼시피온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복잡하게 얽혀버린 생각을 조금이라도 정리하려고 애썼다. 돌아갈 수 없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가. 하지만 첼시피온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렇게 타인의 눈길을 끄는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외모를 가진 것이 어머니가 요정이라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존재여서라고 한다면, 첼시피온의 말은 확실히 사실일 것이다. 첼시피온은 지금까지 이곳에서 만난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도현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었고, 도현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도현과 마찬가지로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현은 그런 것들에 반가움을 느끼기도 전에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첼시피온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불치병을 선고받은 환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사람은 희망을 가져야 살아갈 수 있다. 방법 따윈 모르지만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도현은 지금까지 버텨왔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되돌아 갈 수 없다면. '현실' 속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도현은 그 막막함이 전신을 감싸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 전혀...방법이 없는 건가....?" 중얼거리는 듯한 도현의 말에 첼시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도 신의 보석이 다른 주인을 선택하면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 살아 있는 동안 신의 보석이 다른 사람을 선택한 경우는 없어." 기가 막혔다. 시간이 갈수록 꼬이기만 하더니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 하지만 너무 단정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몰라. 내 경우는 그랬지만 넌 다를 지도 모르니까." 첼시피온은 위로하려는 듯이 말했지만 도현은 그 말을 듣고도 조금도 힘을 낼 수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100% 확실하게 희망이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그렇지만, 라메르 백작님은 돌아가셨어." 도현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확실히 지금 같은 기분으로 테이드를 본다면 도저히 참지 못할 지도 모른다. 체격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소리치고 벗어나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쉬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슴속의 복잡함과 답답함, 그리고 공포와 비슷한 섬뜩함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 괜찮다면 네 이야기를 해줘. 가끔은 마음속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잖아?" 평소라면 도현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도현이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말을 하겠지만 첼시피온이 원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아마도 도현이 이곳에 오게 된 후 처음으로 하게 될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첼시피온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길 원하고 있었다. 확실히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뭔가 다른 초월한 듯한 존재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은 조금이지만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첼시피온은 자신의 어머니가 동화나 소설에나 나오는 요정이라고 말했고, 첼시피온의 외모는 보통 인간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름답고 풍기는 분위기도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도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첼시피온에게라면 마음속의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좋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벌써 이곳에 온지 다섯 달 정도가 되었지만 누구 하나 도현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라딘 라메르라는 같은 얼굴을 가진 소년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만 대했다. " 내가 살던 곳은...." 도현은 차분해 보이는 첼시피온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노스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오전에 그로트 아카데미를 방문하기 위해 저택을 떠났던 테이드는 늦은 오후 다시 저택으로 되돌아왔다. 생각보다 빠른 귀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노스는 저택에 돌아오자 마자 테이드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에 이유를 알지 못하면 서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새로 옮겨온 라메르 백작가의 저택은 예전의 저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어서 2층에 있는 테이드의 집무실까지 가는데도 계단을 오르고 길게 이어진 복도를 한참동안 걸어가야만 했다. 테이드는 집무실의 문을 세 번 두드리고 나서 문을 열었다. 집무실 책상이 아닌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테이드는 노스를 보자마자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 이쪽으로 앉게." 목소리 역시 차분하기는 했지만 뭔가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노스는 자신이 무슨 큰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닌지 걱정하며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노스의 일상은 지난 몇 년간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노스는 테이드와 마주 앉아 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심적으로는 테이드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노스는 테이드와 친구다운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10년 동안 라메르 백작가의 주치의로 일해왔지만 테이드와의 관계는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 라딘에게 무슨 말을 했지?" " 네?" 노스는 갑자기 들려온 테이드의 질문에 자기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 라딘에게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느냐고 물었다." 평소와 달리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로 나오는 테이드를 보고 노스는 그가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스는 곰곰이 과거를 되짚으며 라딘에게 했던 말 중 어떤 것이 테이드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들었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내용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지금 라딘이 예전의 라딘이 아니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테이드에게 어떤 식으로 말했을지 짐작이 갔다. 노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라딘님이 과거에 어떤 일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수군거리며 이름을 부르는지 궁금하다고 하셔서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아는 내용을 말씀 드렸기 때문에 예전에 알고 계시던 것만큼 자세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테이드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붉게 빛나는 태양이 하늘 저편을 물들이고 있는 광경을 응시했다. 사실 노스를 추궁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테이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라딘이 기억을 잃지도 않았으면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노스가 황제나 황태자에 대해 욕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라딘은 가엾은 희생자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일인데 그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경멸하듯 내뱉는 라딘을 테이드는 용서할 수 없었다. 라딘이 주변을 인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원망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테이드도 인정하고 있었다. 라딘에게 잘못이 없다는 사실도, 루사벨라가 말했듯이 단지 그들에게는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것도 테이드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17년 동안 굳어져 왔던 딱딱하게 응어리진 마음이 금방 풀어질 리가 없다. 라딘이 아무 것도 모른 채 태어났다고 해도 라딘이 부모님을 빼닮은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친구이고 제국의 황제라고는 하지만 부인을 몇 번이나 겁탈했다는 사실을 테이드의 부친은 용납하지 못했다. 힘없는 영세 귀족이라면 이를 갈며 물러서야 했겠지만 라메르 백작가에는 황제에게라도 항의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었다. 부친은 황제에게 알현을 청해 라메르 백작부인의 임신 사실을 알리고 사과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이 라메르 백작부인을 겁탈한 사실이 없다고 대답했다. 분노하는 라메르 백작에게 황제가 건넨 제안은 열 달을 기다린 후에 라메르 백작부인이 아이를 낳았을 때,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면 당장 라메르 백작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하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만약 태어난 아이가 황제의 핏줄이 아닐 경우 라메르 백작가는 황제를 모욕한 죄로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라메르 백작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백작부인 역시 뱃속의 아이가 남편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괴롭게 생각했지만 열 달을 버텼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태어난 아이는 황가의 상징인 금발이나 자색 눈동자. 둘 중 어느 것 하나 타고나지 않았다. 선명한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열 달 동안 불안한 표정 한번 보이지 않던 황제는 당당하게 라메르 백작가의 몰락을 고했다. 선대의 우정을 생각해 작위는 빼앗기지 않았지만 제도에서 쫓겨나던 그 때. 라메르 백작가에 남은 것은 부유한 평민보다도 못한 약간의 돈뿐이었다. 그 당시 11살이었던 테이드는 부모님의 얼굴에 떠올랐던 비통함을 지금까지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그때까지 우러러 보던 다른 귀족들에게 멸시의 눈초리와 비웃는 말을 들으며 제도를 빠져 나왔다. 몰락 귀족이라는 것은, 그것도 황제와 관련된 스캔들에 휩싸인 귀족 가문이라는 것은 평민들에게도 업신여김의 대상에 불과했다. 대귀족으로 태어나 자라온 라메르 백작은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오히려 유약하게만 보였던 모친쪽이 훨씬 강했다. 그녀는 남아 있는 두 명의 시녀들과 함께 낡은 저택을 수배하고 그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았다. 어렸던 테이드는 무너져 버린 아버지와 여린 몸으로 다시 가문을 일으키려 노력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고, 두 분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는 누구보다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노력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는 동안 라딘이 보여준 모습은 겁에 질린 작은 동물처럼 웅크리며 시선을 피하는 것뿐이었다. 심약하고 소심한 동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테이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단, 한번이라도 화를 내거나 감정을 표현했다면 테이드도 그렇게까지 라딘을 몰아 붙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딘은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계속 도망치려 했다. 손목을 긋고 저택을 빠져나가고. 언제나 자신은 피해자라는 듯이 행동했다. 테이드는 지금까지도 그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다. " 어쩌면....라딘님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과거를 회상하던 테이드는 들려온 노스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 그게 무슨 말이지...?" " 라딘님이 라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라딘님은 확실히 이상합니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 그래서 너도 라딘의 헛소리를 믿는다는 건가?" " 다른 것은 몰라도 라딘님의 기억이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기억을 잃은 상태의 라딘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리사와 노스였다. 그 이전에도 친 형인 테이드보다 리사와 노스가 훨씬 오랜 시간을 라딘과 함께 보냈다. 그런 만큼 라딘의 변화에 대해 그들은 더욱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 그래.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해 두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딘이 라딘 라메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야." 테이드의 말에 노스는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언제나 결론은 하나다. 기억이 있건 없건 간에 라딘은 라딘 라메르라는 사실.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이야기를 마쳤을 때, 이미 창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첼시피온은 도현의 이야기가 거듭될 때마다 놀라는 듯한 얼굴이 되었지만, 중간에 말을 가로막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 확실히 놀라운 이야기군...." 중세시대의 사람에게 갑자기 먼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 것은 시대극이 SF가 되는 것만큼이나 갭이 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갑자기 이해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사실쯤은 도현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없었던 만큼 도현은 첼시피온의 반응을 기대했다. 단 한 명이라도 이해자가 생긴다면 낯선 세상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다니더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면...그 네가 살던 쪽의 언어를 들려줄 수 있겠어?" 도현은 사양하지 않고 한국어를 시작으로 간단한 말을 10개 국어 정도로 반복해서 말했다. 조금씩 변화하는 발음을 듣고 첼시피온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계속 여유롭게 보이던 첼시피온이 보여준 커다란 변화였다. 놀라는 첼시피온을 보고 미소짓던 도현이었지만 금새 현실을 깨닫고 우울함에 휩싸였다. 돌아갈 수 없다면 언어의 천재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곳에서는 도현이 알고 있는 언어를 쓸 일이 없었다. 이곳의 언어를 빠른 시일 내에 배우는 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돌아가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배워온 것들은 그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 이렇게나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어째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첼시피온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도현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으니까." 테이드를 비롯해 루사벨라나 노스, 리사의 얼굴이 떠오르자 도현의 말투는 절로 퉁명스럽게 변했다. " 나도 처음에는 형인 줄 알았어. 눈동자 색깔은 달랐지만 어딜 봐도 형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이야. 이곳에 내가 있을 자리는 없어. 다들 라딘이라는 사람의 허상만 보고 있어. 그렇게 미워했으면서 막상 없어지니까 아쉬웠을 지도 모르지." 도현은 노스에게 들었던 라딘의 과거를 떠올리며 씹어 뱉듯이 말했다. 황제에게 겁탈 당해 아이를 낳은 어머니와 현실을 이기지 못해 무너져 버린 아버지. 어린 나이에 가문을 짊어져야 했던 형. 이것이 만약 도현의 현실이었다면 도현은 어떻게 자랐을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짐작도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바보 같이 라딘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책임을 라딘에게 전가시켰다. 황제의 겁탈을 당했던 백작부인이 어째서 자신과 남편을 닮은 아이를 낳았는지는 모른다. 황제의 말처럼 헛된 모함이었을 수도 있고, 이미 백작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겁탈을 당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미 그것은 17년도 더된 과거의 일이고, 도현의 과거도 아니었다. " 맞아.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 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지금까지 내가 언어 이외의 다른 걸 공부해서 뭔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현실에서 동떨어진 장소에 오게 되리라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는데...." 첼시피온이 이야기를 들어준 덕분에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는 불안으로 인해 쿡쿡 찌르는 듯한 감각이 남아있었다. 세상이 무너져 버린 것 같았다. 도현 한사람만을 남겨 놓고 세상이 무너져 내려서 갈 데도 없이 헤매는 것 같았다. "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 이곳으로 왔으니까 분명 돌아갈 방법도 있겠지." " 하지만 일방통행이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첼시피온은 도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조용히 말을 들어주었다. " 같은 신의 보석의 주인으로서 함께 움직이자. 방법을 찾아보는 거야. 잘 되면 나도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겠지." 불안해하는 도현을 달래듯 첼시피온은 손을 내밀어 도현의 손을 맞잡았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가 안정제처럼 도현의 몸에 퍼져갔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전해지는 감각에 도현은 문득 말을 꺼냈다. " 이거...뭐야..? 마법?" 첼시피온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마법이라는 것도 나쁘진 않네...." 도현은 편안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잠시 고민이나 불안을 잊은 채 그 온기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 복잡할 땐 잠을 자는 게 최고야." 첼시피온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도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 잘 자라고. 이방인 친구." 첼시피온은 비어있던 왼 손으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이제는 일과처럼 라딘의 방문을 두드리며 함께 식당에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쌍둥이 형제 리올과 카드리는 아무리 기다려도 라딘이 문을 열지 않자,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고 나서 이번에는 이름을 불렀다. " 라딘." " 라딘은 아직 자고 있어." 갑자기 문이 열리고 화사한 금색 머리카락이 나타나며 대답하자 쌍둥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첼시피온....왕자...?!" 그리고 그 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마자 리올과 카드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 어째서 라딘의 방에서 첼시피온 왕자가 나오는 거야?!!' 둘의 눈은 그런 의문을 담고 있었다. " 어제 좀 일이 있어서, 내가 마법으로 재웠지. 급한 일이 아니라면 오후에 찾아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저....왕자님은 왜 라딘의 방에......" 리올은 평소와 달리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 라메르 백작에게 부탁 받은 것이 있어서." 첼시피온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미소지으며 다시 문을 닫았다. 리올은 멍한 표정으로 카드리를 돌아보았다. " 두 유명인이 같은 방에 있다니....." 라딘은 신의 보석의 주인이자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유명하고, 첼시피온 왕자는 그 미모와 뛰어난 마법적 재능으로 유명하다. 리올과 카드리 역시 그 두 유명인과 같은 나이였지만 쌍둥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지극히 평범하다. " 그건 그렇고, 첼시피온 왕자님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본 건 처음이야." 카드리는 조금 멍한 눈동자로 그렇게 말했다. 문 밖에서 벌어진 일을 아는지 모르는 지 문 안쪽의 첼시피온은 밤을 새고도 멀쩡한 얼굴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도현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걸치고 있던 법복 대신 편한 잠옷으로 갈아 입혀주고 나서 도현을 침대에 옮긴 후 침대 옆에 걸터앉아 밤을 지새운 것이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만은 일들이 벌어지지만 첼시피온이 경험한 한도 내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도현의 경우였다. 얼굴이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사실이 정말 진실이라면, 도현이 살던 세상에는 첼시피온과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같은 나이에 비슷한 키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도현은 상당히 가늘어 보였다. 실제로 도현을 안아서 옮긴 결과 몸도 키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가벼웠다. 밤새 도현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마법으로 편안한 잠을 유도한 첼시피온은 조금 전 방문자와 대면하고 나서 다시 같은 자세로 돌아왔다. 도현은 아직 일어날 낌새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시녀들이나 시종들이 걱정하고 있을 테지만, 도현이 깨어나는 것도 보지 않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오늘 오전에도 수업이 하나 있지만 그것도 별로 상관없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첼시피온의 시야에 어느새 눈을 뜬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 멍하게 보이는 눈동자는 깜빡이지도 않고서 첼시피온을 바라보았다. " .....여태 안 갔어....?" 그렇게 한동안 첼시피온을 바라보다가 도현은 겨우 눈에 비치는 것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 하루 이틀 정도는 자지 않아도 상관없어." 미소지으며 첼시피온은 덧붙였다. " 일어났으면 식사나 하러 가자." 도현은 꿈조차 꾸지 않고 편하게 잠들었던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첼시피온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다시 바라보았다. 성화에서 막 빠져 나온 듯한 인간을 벗어난 용모를 가진 소년은 자연스럽게 움직여 창문을 열고 창틀에 걸터앉았다. 도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잠옷을 벗기위해 단추에 손을 가져간 순간 도현은 첼시피온이 옷을 갈아 입혀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작게 미소지었다. 왕자님으로 태어나서 다른 사람의 옷을 갈아 입혀주기 까지 하고 밤새 옆에 머물러 있다니 확실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곳에서 가장 특이한 존재는 도현이겠지만. 도현은 첼시피온과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다 됐어." 옷을 갈아입고 나서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나온 도현은 창틀에 걸터앉아 밖을 내려다 보는 첼시피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셔츠와 바지 차림이던 첼시피온은 도현이 말을 걸자 가볍게 창틀에서 내려와 의자에 걸쳐놓은 검은 색 로브를 집어들었다. 도현과 첼시피온이 함께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자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노골적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지만 피부가 찌릿 거릴 정도로 느껴지는 시선 때문에 도현은 없던 식욕 자체가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연예인이라도 이보다는 덜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내가 그렇게 특이해?" " 네가 아니라 라딘의 과거가 특이해서 그렇겠지. 그리고 너 역시 지금은 신의 보석의 주인이니까." " 넌 참 대단하구나. 어떻게 보면 시선을 전혀 못 느끼는 사람 같이 보인다." 노골적인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첼시피온이 도현에게는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 익숙하니까. 너도 만약 이런 얼굴로 태어났으면 알 거야."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년이라는 이유로 유명세를 탔던 도현이었지만 그것과 이것은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 언제까지가 될 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오래 있어야 할 지도 모르니까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는 게 좋아." 그렇게 말하며 첼시피온은 우아한 동작으로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고 있었다. 도현은 오렌지 주스와 맛이 비슷한 노란색 주스를 들고 몇 모금씩 마시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곳에서 필요도 없을 학문을 배우게 되리라는 생각은 못했지만,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첼시피온의 말처럼 조금은 적응하고 배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오늘부터는 수업에 나가야겠다. 배우고 싶지는 않지만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르지. 신학이란 건 신에 대한 일화를 배우는 거겠지?" " 그런 것도 있지만....." 첼시피온은 신학을 너무나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버린 도현을 보며 그냥 미소지었다. " 라메르 백작과 한 약속은 지킬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인가...." 작게 중얼거리자 도현이 뭐? 라고 되물었다. 첼시피온은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Part 6. inquiry 신학 수업은 생각만큼 지루하지는 않았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회색 머리카락의 교수가 중앙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서 신학대전을 펼치고 어떤 부분에 관해 설명을 하고, 학생들이 질문을 하면 답하는 것이 수업 방식이었다. 도현은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 수업시간 내내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집중했다.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임하자 집중할 수 있었다. 도현이 언어의 천재라고 불린 것은 언어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뿐만 아니라 언어를 잘 하기 위해서는 암기력과 집중력도 요구된다. 도현은 수학이나 체육 과목은 중간 정도에 그쳤지만 집중력이나 암기력을 요하는 문과 계열 과목 성적은 상당히 뛰어났다. 신학을 배울 생각도 없었고 아카데미에 들어갈 생각 같은 것은 없었지만, 지금 무언가를 배워야 하고 아카데미에 속하게 된 이상 도현은 돌아갈 방법을 찾는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다. 도현이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든 데에는 첼시피온의 말이 큰 영향을 주었다. 처음으로 도현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기도 했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일 텐데도 도현의 이야기를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자 도현은 안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지만 첼시피온을 신뢰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도현이 언어의 천재라는 이유로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리거나 흥미롭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아니, 오히려 도현의 가장 큰 재능은 이곳에서는 그다지 쓸모가 없다. 라딘과 똑같은 외모와 라딘의 자리에 놓이게 됨으로 해서 부차적으로 따라오게 된 가문의 이름이나, 기분 나쁜 황태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억지로 가지게 된 신의 보석. 그것들이 도현을 보는 사람들이 도현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첼시피온만은 수군거리거나 흥미어린 시선을 던져 오는 사람들과는 달랐다. 어떻게 보면 그는 도현과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도현은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로 정했다. 당장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것은 당연했고, 초조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안달한다고 해서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도현은 요 몇 달간 확실하게 몸에 새겼다.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길은 있을 것이다. 도현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번에도 분명 도현에게 해답을 줄 것이다. " 오늘은 신의 귀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음 수업 때는 신이 지상에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중년의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 없는 평이한 어조로 수업을 진행하다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수업을 끝냈다. 신학대전 수업은 고리타분한 내용이 아니라 지금의 도현에게 어느 정도는 필요한 내용으로 진행되어서 도현은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고위 귀족이나 왕족들까지 다니는 아카데미여서 그런지 강의실에 있는 의자 하나도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듀오백 같은 의자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푹신한 쿠션이 붙어 있는 나무 의자가 강의실 마다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도현이 강의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움직이자 여러 개의 시선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도현의 뒤통수에 내리 꽂혔지만, 도현은 무시하고 강의실을 나왔다. 신학부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신학부 건물은 멀리서도 눈에 띄는 검은색 건물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위압적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상당히 기품이 느껴지는 고딕 양식의 건물로, 10층은 넘는 것 같았다. 1층에서 진행된 신학대전 수업 이후에는 7층에 있는 강의실에서 진행될 예정인 고대어 연구 수업이 남아 있었다. 하루에 보통 2개에서 3개의 수업만 받으면 되기 때문에 한국에서 빡빡한 고등학교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던 도현에게는 상당히 여유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과목의 내용 자체가 평소라면 장난하냐? 라고 내뱉었을 것이 뻔한 것들이라는 것은 제외하더라도 아카데미의 수업 구성이나 진행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이 도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1층 강의실에서 나와 7층까지 올라가야 할 계단 앞에 서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곳의 건물 한층 한층은 상당히 높아서 보통 빌딩 건물 두 세층 정도의 높이였다. 그러니 7층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숙사 건물 역시 각 방마다 샹들리에가 달려 있을 정도라서 천장이 굉장히 높다고 생각했는데, 강의실은 족히 그 두배 높이는 됐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에스컬레이터도 없는 계단을 두 발을 사용해 올라가면서 도현은 운동부족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7층에 올라왔을 때는 숨은 거칠어져 있었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생각해 보면 테이드와 만난 이후로 몇 달간 침대 신세를 졌던 데다가 그 후에는 신의 보석 때문에 또 본의 아니게 침대 신세. 그리고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에는 거의 저택 안에 갇힌 채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신학부 3학년에 편입하기 위한 준비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현이 이 세계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황궁에서 보낸 학자들의 대부분은 도현에게 기본적인 상식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노스에게서는 라딘의 과거와 지난 17년간 있었던 대략적인 가문의 사건에 대해 들었다. " 어서 오십시오. 라딘님." 7층에 도착한 후 양쪽에 죽 늘어서 있는 여러 개의 문중에서 후이딘이라는 이름이 적힌 방 문을 두드리자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은발 머리의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 개인 수업인가요?" 열린 문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자 갈색 책상이 두 개 놓여 있고 창문을 제외한 모든 벽면이 책꽂이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고 도현은 그렇게 짐작했다. " 네. 며칠 수업을 빠지셔서 빠르게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들어오시죠." 얼굴만 봐도 학자풍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후이딘은 거북할 정도로 예의 바르게 도현을 방안으로 안내하고 마주 놓인 책상 앞에 앉았다. " 알고 계시겠지만 고대어 연구 수업은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 무척 중요한 수업입니다. 대륙의 역사는 5천년이 넘게 이어져 왔고, 고대로부터 사용되던 언어는 여러 가지로 갈라지고 발전하고, 사라져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신학에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들이 고대어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고대어를 익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후이딘은 책상 위에 놓인 가죽 양장본 책을 펼쳤다. " 고대어 중에서 문자 기록에 가장 많이 사용된 테일어 입니다." 그 말을 듣고 글자를 들여다보던 도현은 놀라서 말을 잊은 채 굳어졌다. 책 안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글자는 아무리 봐도 히브리어와 똑같이 생긴 문자였던 것이다. " 이렇게 읽는 게 맞나요....?" 도현은 왠지 멍한 느낌을 떨치지 못한 채 펼쳐진 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자 이번에 놀란 것은 후이딘이었다. " 이전에 테일어를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너무나도 완벽한 발음에 그는 깜짝 놀란 상태였다. " 배웠죠... 물론..." 신학부에 히브리어라. 너무 당연한 연결이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 여긴 설마.....지구인 건가.....?' 도현은 혹시 자신이 오랜 과거 시대로 거슬러 올라온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멍하게 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물어서는 이곳이 어디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궁금하다면 도현이 알아내는 방법밖에 없다. " 이 부분을 읽어보시겠습니까?" 조금 흥분한 듯한 표정으로 후이딘은 두꺼운 책의 뒤쪽에 있는 한 부분을 펼쳤다. 도현은 그가 가리킨 페이지를 망설임 없이 읽어 내려갔다. " 아아...이럴 수가...." 후이딘은 어딘지 모르게 어린 소년처럼 상기된 얼굴로 도현을 응시했다. " 라딘님께서 테일어를 이렇게나 완벽하게 구사하신다는 말은 듣지 못했었는데.... 그럼, 헬룬어도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 헬룬어?" 도현이 묻자 후이딘은 또 다른 두꺼운 책을 펼쳤다. 그 책에 있는 글자 역시 도현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것이었다. " 이것도 배웠습니다." 정말 신학과 딱 맞아떨어지는 배합이었다. 히브리어에 이어서 이번에는 라틴어라니. 보물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는 후이딘과 달리 도현은 기뻐해야 할 지 아니면, 놀라워 해야할 지 알 수 없어서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도현이 알고 있는 언어가 이곳에서도 통용된다는 사실은 분명 반가운 일이었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의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이곳과 도현의 세계는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있다. 같은 언어가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었다. " 도현,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어야지?" 문이 열린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현은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을 거는 첼시피온에게 인사말을 건네고 나서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첼시피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별로 입맛이 없어. 익숙하지 않은 음식들이 많아서 먹을 생각도 안 들어." 기계적으로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도현은 멍한 표정으로 첼시피온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깨닫고 첼시피온은 조금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 내 얼굴이 이상해?" " 아니, 너무 천사같아서. 그냥.." " 천사...?" 첼시피온이 되묻자 도현은 그제서야 시선을 옮겼다. " 내가 살던 세상에서 신의 사자라고 불리는 존재인데, 너처럼 생겼어." " 아아." 첼시피온은 활짝 웃었다. " 입맛이 없으면 과일은 어때?" " 뭔데...?" " 사이드 공국 특산물인 퍼시카야." 퍼시카라면 복숭아를 말하는 것이다.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는 과일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첼시피온은 보는 사람을 아찔하게 만드는 미소를 지으며 도현을 일으켜 세웠다. " 내 방으로 가자." 도현은 첼시피온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왕족에게 주어지는 방은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조금이나마 이곳에 적응하자고 결심했을 뿐인데. 첼시피온과 친구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첼시피온을 반기고 그의 말대로 움직이고 일상적인 궁금증을 느끼게 되다니 도현은 그 사실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던 첼시피온은 도현의 웃음소리를 듣고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 아무 것도 아니야. 네가 너무 잘 생겨서 그래." 도현은 실없는 대답을 하고서 조금 더 활짝 웃었다. 이곳에 와서 얼마 만에 마음 편하게 웃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확실히 첼시피온과 함께 있을 때는 마음이 편하다. 그 것 만은 확실했다. -------- 케이스워크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집무실에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몇 년 안에 황제에 오를 예정이었기 때문에, 케이스워크는 이미 황제가 처리해야 할 업무의 반 정도를 처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각 분야의 대신들이 정리해 온 문서를 스위드가 종합해서 가져오면 그것을 읽고, 어떤 식으로 처리할 지 판단하거나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었다. " 그로트 아카데미의 정기보고 쪽은?" 한참동안 서류에 인장을 찍거나 싸인을 하던 케이스워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스위드에게 물었다. " 라메르 백작이 아카데미를 방문한 이후 수업에는 제대로 참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첼시피온 왕자와 친분을 쌓았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 첼시피온 왕자라..... 페르마 대공왕인가." 케이스워크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 페르마 대공왕의 명령으로 일부러 접근했을 가능성도 부인할 수는 없군. 그 동안 아카데미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첼시피온 왕자를 보내지 않았으니까. 라딘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시기에 맞춰 첼시피온 왕자를 보냈다는 사실이 의심스럽군. 충분히." 케이스워크는 오른손에 든 깃펜을 가볍게 툭툭하고 쳤다. " 페르마 대공왕은 확실히 보통 인물은 아니야. 작은 공국을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국으로 만든 것도 그렇고, 행동력 하나만 본다면 대륙 제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겠지. 아버님과는 다르게." 그렇게 말하고 케이스워크는 희미하게 웃었다. " 제도의 꽃을 손에 넣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페르마 대공왕은 요정왕의 딸을 손에 넣었지." 희미하게 웃는 케이스워크에게서 부친에 대한 애정이나 존경심 같은 것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 네 능력은 정말 탁월해. 스위드." 짧은 한 마디를 듣고서 스위드는 케이스워크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아차렸다. " 신의 보석이 준 힘이겠지요." " 네가 죽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겠지?" 가볍게 건넨 케이스워크의 질문에 스위드의 표정이 달라졌다. 담담한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돌변했다. 그리고 이마에 검은 색의 문양이 떠올랐다. 흐릿하던 회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변해 황태자를 내려다 보았다. " 케이스워크. 역시 네게도 페히너의 피가 흐르고 있어. 아주 진하게." " 당연하지. 나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황제폐하의 유일한 적자가 아닌가. 내 동생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라딘과는 달리." " 신의 보석의 선택을 받을 줄 알았다면, 동생으로 해 두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지." 스위드의 입가에도 가느다란 미소가 매달렸다. " 하지만 라딘에게는 금발보다는 지금의 머리색이 어울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역시 페히너의 아들답군." " 내 가능성을 보고 나에게 온 것 아닌가? 난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스위드는 대답하지 않고 소리 없이 웃었다. " 나는 황가를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꿨지. 그걸 후회하지는 않아. 그리고 내가 인생을 바꿔 놓았기 때문에 신의 보석이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르니까." " 라딘이 그대로 내 동생이 되었다면 분명 빛의 보석이 선택하지는 않았겠지. 황족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케이스워크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희생양으로 삼았던 소년이 인생 자체를 뒤바꿀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어쩌면 그 기회를 제공한 것은 바로 황제 본인일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스위드의 힘 덕분이었지만. " 언젠가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떤 얼굴을 할까...." " 날 죽이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나서 스위드는 이미 잉크가 말라버린 케이스워크의 깃펜을 빼앗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은데? 신의 보석의 주인끼리 서로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건가?" 스위드는 대답대신 작게 피식거렸다. " 빛의 보석과 어둠의 보석은 성질 자체가 달라. 그리고 페히너의 명령으로 뱃속의 아이를 바꾼 힘은 보석의 힘이 아니라 내가 타고난 힘이니까." 케이스워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엷은 웃음을 띄운 채 턱을 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손을 내민 시기에 많은 일들이 이루어진 것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곧 아버지의 시대는 가고 자신의 시대가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페히너의 심부름꾼이 오는군." 스위드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이마에 떠올랐던 검은색 문양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스위드가 평소의 나른한 회색 눈동자로 되돌아옴과 동시에 문 쪽에서 황제의 전령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러니까, 너무 하는 것 아니야?" " 그렇다고 저 사이에 끼어들 수 있겠어?" " 그건...." " 말도 못 꺼내면서 그런 말 하지 마." 대각선상에 앉아 있는 라딘이 있는 테이블을 흘깃하고 쳐다보며 리올과 카드리는 작게 말싸움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지냈거나, 절친한 친구사이인 것처럼 며칠 전부터 함께 다니기 시작한 라딘과 첼시피온은 이제 아카데미 안의 대다수가 인정할 만큼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두 유명인이 저렇게 금방 친근한 사이가 되리라는 예상은 누구 하나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두 쌍둥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라딘의 방에서 첼시피온의 얼굴을 본 날 이후로 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함께 붙어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구에게나 부드러운 표정을 보여주는 첼시피온과 달리 언제나 뭔가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라딘이 첼시피온과 함께 있을 때 만큼은 환하게 웃거나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리올과 카드리는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라딘과 함께 식당에 가기 위해서 리올과 카드리는 말싸움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렇게 활기차게 웃는 얼굴이라니. 마치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 학부도 다른데 왜 항상 식당에 같이 오는 걸까." " 저녁은 첼시피온 왕자님의 방에서 먹는다고 들었어." 쌍둥이의 옆자리에 앉은 일반부 여학생들 역시 작은 목소리로 라딘과 첼시피온을 화제삼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 저 얼굴이면 누구든 접근을 허락한다는 건가...?" " 불공평하잖아." 쌍둥이는 같은 생각을 하며 얼굴을 구겼다. 쌍둥이가 라딘에게 접근한 것은 라딘 개인에 대한 호의에서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지나가는 말도 있었고, 라딘의 과거나 현재 상황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실, 라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이라면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계속 스캔들의 주인공으로서 여러 사람들의 기분 좋지 않은 시선 속에서 살아야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라딘은 멋지게 그 모든 상황을 뒤집어 버렸고, 지금은 그로트 아카데미에서 첼시피온과 마주 앉아 있었다. " 성격이 상당하던데....첼시피온 왕자 앞에서는 그렇지도 않나 봐?" 카드리는 대답하지 않고서 테이블 위에 고개를 붙인 채 라딘쪽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흥미로 접근했을 뿐인데, 지금은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진다. 소리내어 말다툼을 한 것도 오랜만이었고, 리올과 카드리가 숙이고 들어가야 할 상대를 만난 것도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처음이었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왕족이거나 고위 귀족이 아니면 리올과 카드리가 평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대륙 최고의 상단을 거느린 샤르코 일족의 이름이 가지는 힘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저 둘은 예외인 것이다. "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는 건 우리 성격에 맞지 않아." 카드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리올은 카드리가 자신이 한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쯤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 그냥 평소대로 하자. 그게 가장 우리다워." 테이블 위에 뺨을 붙이고 있던 카드리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그래." 리올 역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쌍둥이의 시선 안에 자리잡은 라딘은 첼시피온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라딘의 앞에는 주스 잔이 놓여 있었지만, 지금까지 손 한 번 대지 않고 있었다. " 여전히 식사를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은 식사를 안 해도 상관없는 건가..?" " 설마." 리올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카드리와 보조를 맞추어 라딘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 .....그래서 훨씬 수월해 졌지만, 의문이 더 생겼다니까. 역시 뭔가가 있어." 라딘은 진지한 어조로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쌍둥이가 가까이 다가섰지만 그 사실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첼시피온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짙은 검은 색의 가느다란 직모가 흰 이마를 덮고 있었다. 첼시피온의 금발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색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둘이 함께 있는 모습에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 라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라딘과 첼시피온이 쌍둥이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 아, 안녕." 라딘은 반갑다는 듯이 인사했다. " 지난번에 방으로 찾아왔었지?" " 네, 첼시피온님." " 이제 보니 같은 마법부였네?" 첼시피온은 쌍둥이가 걸치고 있는 검은색 로브에 시선을 던졌다. 같은 로브였는데도 불구하고 첼시피온이 걸치고 있는 마법부의 로브는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쌍둥이는 거의 동시에 그 사실을 깨닫고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 무슨일인데?" " 일이 있어야 말을 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카드리는 라딘과 말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감정적으로 튀어나오는 말투를 자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라딘은 카드리와는 달리 피식 웃고 넘어갔다. 처음에 쌍둥이의 앞에서 보여주었던 신경질적인 대응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사람이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어서 카드리는 새삼스럽게 라딘을 응시했다. " 내 이름만 제대로 불러준다면 괜찮아." 뭐가? 라고 묻고 싶었지만 카드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라딘이 말하는 이름이란 다른 사람들도 뻔히 알고 있는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 도현, 내가 불러주는 것만으로는 안돼?" 풀죽은 듯한 음성으로 첼시피온이 말을 걸자 라딘은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뭐야, 너무 잘 어울려서 메슥거려." " 하하." 서로를 보며 익숙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친근해 보여서 쌍둥이는 거리감을 느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라딘이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로 리올과 카드리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 나는 어느 쪽이 리올이고 어느 쪽이 카드리인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으니까 너희들도 내 이름쯤은 제대로 불러 줘. 그게 조건이야." " 조건?" 되묻는 리올에게 도현은 미소 띈 얼굴로 덧붙였다. " 친구가 되는." ---------------- 시간은 어느 곳에서도 변함없이 앞을 향해 흘러간다. 언제나 온화하고 따뜻한 봄 날씨가 계속 되는 리카도 제국의 제도. 유서 깊은 교육기관 그로트 아카데미에서 지내게 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처음 열흘 동안은 수업에 제대로 참석하지도 않았던 도현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해서 수업에도 참석하고 있었고 신학부의 고대어 연구 수업 부분에서는 졸업을 앞둔 최고 학년이나 교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보여 아카데미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도현이 보여주는 실력에는 모두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학부의 교수들은 훌륭한 인재를 얻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앞다투어 도현을 부르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다. 어느 곳에서도 학자들의 열정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만큼 뜨거운 것이어서 도현은 과거가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몸이 바빠지면 생각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당연해서 도현은 최근 한 달 동안은 돌아가야 한다는 고민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인한 초조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신학 수업은 그저 소설책을 읽는다는 느낌으로 넘겼고, 고대어 수업은 도현의 전공 분야인 만큼 다른 것에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집중했다. 가끔은 졸업반 선배들이 도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언어에 관한 도움 요청이라면 도현은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언어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은 왠지 모를 익숙함과 즐거움을 느끼며 다른 모른 것을 잊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 속에 파고들었다. " 도현!" 점심도 거르고 선배들의 요청에 따라 히브리어 강독을 해 주고 온 도현을 신관부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쌍둥이 형제가 불렀다. " 첼시피온은?" " 그렇게 일부러 챙길 필요 없잖아? 알아서 오실 텐데." 인사 대신 첼시피온이 부재중인 이유를 묻자 카드리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 같은 마법부잖아." " 같은 마법부라도 첼시피온 왕자님은 천재고 우리는 범인이라서 말이지." 도현은 한숨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 그로트 아카데미에 들어온 것 자체가 일반인과 큰 차이를 가진 증거라고 들었는데... 게다가." 도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리올과 카드리를 차례로 응시했다. 쌍둥이인데다가 같은 마법부여서 입은 옷도 같다. 덕분에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어 보였지만, 도현은 쌍둥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의 특색만으로 쉽게 둘을 구분했다. 평소에는 그다지 말이 없지만 도현의 앞에서는 말이 많아지는 카드리. 카드리 보다는 훨씬 차분하고 이성적인 리올. 그 둘이 가지는 성격의 차이가 표정에 그대로 배어 나와 있어서 도현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쌍둥이를 틀리게 부른 적이 없었다. " 게다가...너희는 부자잖아." 직설적인 말에 리올과 카드리는 동시에 피식하고 웃었다. " 대귀족 가문의 도련님께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참 색다른데?" 카드리는 평상시대로 말했지만 도현에게는 비꼬는 것으로 들렸다. " 거긴 내 자리가 아니니까 아무 상관없어." 리올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드리를 쳐다보았다. 요구에 따라서 라딘이 아닌 도현이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은 도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이곳 사람이 아니라느니, 라메르 백작이 친 형이 아니라느니, 방금 전처럼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거나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상당히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신의 보석의 주인이며, 가문을 다시 부흥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제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진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성격을 비틀리게 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보통 자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어도 입밖에 꺼내는 것은 금기라는 사실을 쌍둥이는 일치감치 깨달았다. 첼시피온은 그들과 달리 도현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지만 그가 그것을 전부 믿는 지 어떤지는 아무도 모른다. " 기다렸어?" 잠시 끊겼던 대화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첼시피온 덕분에 재개되었다. 첼시피온은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해서 마법부 건물에서 신관부 건물까지 한 번에 날아왔다. 마법을 사용한 증거로 첼시피온이 디디고 서 있는 바닥에는 어깨폭 정도의 원형 마법진이 나타나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 늦었어." " 미안, 마법 시연 때문에 조금 늦었어." 첼시피온은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도현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점점 희미하게 변해가는 마법진의 빛을 응시하던 도현이 불쑥 말을 꺼냈다. " 건물마다 계단 대신 이동 마법진을 설치해 두면 좋을 텐데..." " 너무 편리한 것만 찾으면 나중에 힘들어지니까." 첼시피온이 표정을 바꾸며 대답하자 도현은 피식하고 웃었다. " 그런데 넌 왜 공간이동 마법을 이런 간단한 거리를 이동하는 데 쓰는 건데?" " 난 괜찮아. 마력이 부족해질 일이 없거든."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첼시피온의 뒷머리를 도현은 가볍게 주먹으로 쳤다. 첼시피온 역시 도현과 마찬가지로 신의 보석의 주인이기 때문에 마법에 재능이 있는 첼시피온에게는 그것이 정말 좋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에게 직접 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것은 자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신의 보석을 가지고 있어도 도현은 뭐가 좋아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빛의 보석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지만 그 치유의 힘은 본인에게는 효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대체 무엇을 위한 신의 힘이냐고 비아냥거리는 도현에게 황태자는 신의 보석이 머무는 사람은 죽음조차 피해간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려주었다. 몸에 흡수된 신의 보석이 그 사람의 몸에서 빠져 나와 다시 보석으로 되돌아가기 전 까지는 무엇으로도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상을 입어도 보통 사람의 몇 배 속도로 빨리 회복된다고 했다. 그 말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몸에 상처를 입히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보석이 몸에 흡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드에게 물어 뜯겼던 목덜미의 상처는 1주일만에 깨끗하게 나았다. "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움직이자." 첼시피온은 도현에게 맞은 뒤통수가 아프다는 듯이 과장된 손짓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관부 건물 앞에 모여 있는 네 명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던 차였다. " 내가 챙기지 않으면 도현은 식사도 제대로 안 하니까, 오늘도 제대로 준비했어." 긴 다리로 앞서가며 첼시피온이 말하자 도현은 전혀 기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래? 하고 물었지만 도현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쌍둥이도 첼시피온도 잘 알고 있었다. " 이번 주에는 집에 돌아가지?"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던 중에 첼시피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묻자 도현은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 " 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매 주말마다 기숙사에 남거나 아카데미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도현은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 테이드를 보기도 껄끄러웠고, 그곳은 도현의 집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빠질 수가 없었다. 라메르 백작가가 제도로 다시 돌아온 후 처음으로 열리는 파티였던 것이다. 그것도 라딘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파티라는 명목으로. 초대받은 손님 가운데는 별로 얼굴을 마주 대하고 싶지 않은 황태자도 끼어 있었다. " 벌써.....8월인가....." 도현이 작게 중얼거리자 카드리가 8월? 하고 되물었다. " 휘센의 달이라고...." 간단한 사실조차 다시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도현에게 이 곳은 결코 도현이 살던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늘 봄 날씨가 계속되는 온화한 대지. 전설이나 책에서만 등장하는 줄 알았던 마법이 있고, 신이 남긴 증거물이 존재하고, 왕자와 공주가 존재하는 세상. 그 동화 같은 세상에서 도현은 벌써 반년 가까이 머물고 있었다. 모든 걸 다 버리고, 쓸데없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떠나버리면 좋을 텐데도 여전히 기현과 같은 얼굴을 가진 테이드를 끊어 버리지 못했고, 억지로 들어온 아카데미에서는 착실하게 수업을 받고 있다. 게다가 친구도 사귀었고 이곳의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다. " 정말.....돌아가고 싶어..." 여느 때와 달리 힘없이 말하는 도현을 첼시피온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 몸이 정상이 아니어서 마음이 약해지는 거야. 아무리 신의 보석 덕분에 죽을 걱정이 없다고 해도 하루에 한끼만 먹고 사는 건 좀 위험해." " 첼시피온님의 말이 맞아. 사람은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하게 먹어야 한다고." " 질렸어. 주식도 아닌 걸 어떻게 먹겠어...." 여전히 힘없는 말투를 듣고 쌍둥이 역시 오늘의 도현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힘 빠진 말투로 말하는 적은 없었다. " 집에 돌아가기가 그렇게 싫어?" 카드리가 툭하고 내뱉듯이 묻자 도현은 김빠진 웃음을 지었다. " 진짜 집이라면 꿈속에서도 간절하게 돌아가길 바라고 있지." " 말장난 하자는 게 아니야." "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여전히 힘은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도현은 날카로워진 눈으로 카드리를 노려보았다. " 이제야 조금 도현 답군." 그 시선을 마주하자 카드리는 삐딱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 17년간 함께 살아온 가족들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 글세.... 꿈이 아닌가 생각하겠지." 리올이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하자 도현 역시 바로 맞받아쳤다. " 지금 내가 그래." 차를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찻잔만 만지작거리던 도현이 짜증난다는 듯이 손을 떼고 카드리 쪽으로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도 안 된다는 표정 짓지 마. 기분 나빠. 내 입장에서 가장 말도 안 되는 건 너희 쪽이니까." " 나도?" 갑자기 대화에 끼어 든 첼시피온에게 도현은 힘없는 미소를 건넸다. " 정말 지쳤어. 장난 할 기운도 없어..."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지치는 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지금처럼 생각할 시간이 생기면 도현은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존재하지 않는 해답을 찾아 억지로 탐험하는 사람이 된 기분. 보물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목적만을 위해 배회하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우울해 진다. 첼시피온과 함께 열심히 조사해 봤지만 도현의 원래 세상에 대한 기록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왕족들에게 비밀처럼 전해지는 전승에도 그런 것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어도 이곳이 어디인지, 대체 어떤 시간대인지라도 알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일 텐데, 지금 도현에게 남은 유일한 작은 연결점은 '고대어' 뿐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제 그만 포기하고 이곳에서 라딘이 되어 살아보는 게 어때? 라는 마음 속의 유혹에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의 보석을 품고 있는 한 방법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다잖아? 그런 목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아있었다는 희망을 도현은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이렇게 지쳐 버리기는 했지만, 아직은 버릴 수 없었다. 기현을...채현을...부모님을. 도현이 '현실' 속에 존재했다는 증거를. ------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에 몸을 맡긴 채 도현은 푹신하고 고급스러운 마차 안의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첼시피온은 어지럽지도 않은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도현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책에 집중하고 있는 첼시피온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부드러워 보이는 표정. 성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신비한 외모. 늘씬하지만 약해 보이지 않는 몸. 게다가 왕자님에 신의 보석까지 가졌다는 첼시피온은 정말로 하늘에서 선택받은 존재가 있다면 이렇다. 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다른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도현이었지만 첼시피온을 앞에 두고 나서는 뭔가 그런 비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당히 두꺼워 보이는 가죽 양장본인 책표지에는 금박이 입혀진 글자로 마법 이론의 정립 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제목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딱딱한 내용일 것 같은 그 책을 첼시피온은 상당히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뭔가 말을 걸고 싶었지만 첼시피온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도현은 목구멍까지 넘어온 말을 그냥 삼켜버렸다. 라딘의 생일 파티라는 명목으로 열리는 라메르 가문의 복귀 축하를 위한 파티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초대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인지 모르고 누가와도 상관이 없지만, 그 명단에 첼시피온이 들어 있던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리올과 카드리도 초대를 받았다는 말에 도현은 테이드가 의외로 도현의 주변 관계에 빠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리올과 카드리는 이곳에서 말하는 평민이지만 대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단의 아들이어서 귀족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번 파티의 명목 자체는 라딘의 생일 파티이기 때문에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 타고 있는 마차는 첼시피온이 소유한 마차로 예전에 도현이 제도에 올 때 테이드와 함께 탔던 나무 벽에 쿠션이 조금 붙어 있는 딱딱한 의자가 달린 마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웠다. 우선 벽면에도 쿠션처리가 되어 있어서 만약 테이드와 이런 마차에 탔더라면 벽에 머리를 찧어 버리는 일도 없었겠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하아..." 도현은 마차를 타자마자 연상된 테이드와 관련된 기억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이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다. 피를 이은 친형제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혈육에 대한 느낌 같은 것도 없는 것 같고, 성격도 나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현과 정말 똑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도현의 마음에 방심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테이드는 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무심코 얼굴을 쳐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형이라고 인식해 버리는 것이다. 17년 동안 형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과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는데, 타인이라고 억지로 생각하는 것도 사실 힘든 일이었다. 도현을 동생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하는 말을 좀 들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 왜? 돌아가기 싫어?" 잠시 시선을 떼고 생각에 잠겨 있던 동안 첼시피온은 어느새 읽고 있던 책을 덮어 버리고 도현을 응시하며 물어왔다. " 당연하지. 거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도현은 힘 빠진 음성으로 대답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마차 벽에 등을 기댄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서 첼시피온의 얼굴을 마주보자 첼시피온이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 그래도 돌아갈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라딘으로 행세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그만하면 충분히 이곳에서 살아가는데는 충분한 방패가 될 거야." "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테이드가....내 형이랑 같은 얼굴을 한 테이드가 너무 달라서 싫어진다고." 말도 안 되는 투정이라는 사실은 도현도 잘 알고 있었다. 테이드가 기현과 같은 모습을 가졌을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예전에 깨달았다. 하지만 마음속의 기대감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 나도 바보라니까.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형이랑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이래서는 다른 사람들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어. 정말...얼굴이란 것도 무시 못하는 거라니까..."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피식하고 웃었다.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도현을 감상적으로 변하게 한 것 같았다. " 전혀 다른 세상에 나와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있고, 내 가족들이 그대로 존재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네가 살고 있던 세상에는 나랑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도 있을까?" 첼시피온의 질문에 도현은 글세...하고 고개를 저었다. "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르지. 아마도 외국의 유명한 모델쯤 되지 않을까.....?" 첼시피온은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도현에게 묻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때가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도현의 마음은 몹시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망설임과 혼란과 초조함으로 뒤섞인 도현은 어두운 보라색 오오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첼시피온은 온화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로 그런 도현을 조용히 응시했다. 요정의 피가 주는 힘은 처음 보는 상대의 기분이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첼시피온은 어머니를 닮은 외모 때문이 아니더라도 타인을 상대할 때 그다지 곤란함을 느끼지 않았다. " 사실 세상에는 자기랑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세 명 정도 있다거나, 우주는 수없이 연결된 고리 같은 것이라서 그 안에 무엇이 있을 지는 모른다는 말은 들었어. 하지만 솔직히 살면서 그런 걸 특별히 믿고 신경 쓰는 사람은 없어. 가미가쿠시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그런 일이 예전부터 있어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그게 나한테 생기리라는 상상은 꿈에서도 안 해봤어. 당연하잖아? 누가 그런 걸 생각하겠어. 앞만 바라보고 살기도 힘든데." 도현은 첼시피온이 도현의 말을 알아듣는지 아닌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덜어 버리고 싶었다. " 솔직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신경 쓰느라고 가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 부모님이 있는 건 당연한 거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이나 누나는 형제라기보다는 같은 집에 사는 사람 정도로만 여겼어. 난 막내고 나한테 잘 해주는 것도 당연한 일처럼 특별하다고는 생각도 못했어. 나는 매일매일 언어를 공부하고, 번역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보냈으니까. 그게 당연한 일상이었어. 변화가 생긴다고 해도 내 인생 자체가 뒤바뀔 만큼 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현실이란 건 너무나 당연한 거라서 그 현실 자체가 바뀌리라는 생각을 대체 몇 명이나 하고 살겠어?" 말을 하는 동안 도현은 마음속에 담고 있던 복잡한 얽힘들이 조금씩 풀려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흔들림 없이 온화하게 바라보는 첼시피온의 시선이 그런 편안한 기분을 갖게 해 주는 지도 모른다. " 처음... 왼 손목에 이 상처가 생겼을 때, 정말 황당했지. 피가 너무 많이 흘러서 놀라고 아픈 것 보다 황당함이 더 컸어. 현기증이 일어나는데도 대체 멀쩡히 자고 있었는데 누가 칼로 그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피가 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 자살 같은 걸 생각할 리가 없잖아? 태어난 이상 뭔가를 계속 하면서 사는 건 당연한 거야. 그리고 증거는 아무도 찾지 못했지만 가족들이 내가 자살 시도를 했다고 조금이라도 의심하게 됐다는 사실도 너무 짜증이 났어. 하지만...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당연한 걱정이었지. 언어에 재능이 있어도 나는 아직 열 일곱 살이고,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냥 특출난 어린아이였을 지도 몰라." 첼시피온의 시선은 도현의 왼쪽 손목에 남아 있는 흉터에 머물러 있었다. 칼로 깊숙하게 베인 듯한 상처는 이미 아물어서 흉터가 되어 있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망설임 없이 그어버렸다는 느낌을 주었다. " 가족의 소중함은....내가 얼마나 나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여기에 오고나서 알았어. 말도 통하지 않고, 형이랑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있는데 눈빛이나 표정이 전혀 달라서 아, 이사람은 내 형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느꼈을 때는 정말 절망했지. 그리고 하루가 지나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여전히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소리치고 다 부숴 버리고 싶었는지 몰라. 말을 배우고난 다음에는 아무리 내가 라딘이 아니라고 말해도, 이유를 대며 설명해도 단지 사람들은 사고 때문에 기억을 잃어서 그런거라고 생각해. 누구 하나 날 나로 봐주지 않았어. 단지, 이름의 문제가 아니야. 그 이름이 아니면, 도현이라는 이름이 아니면 난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리는 거야!" " 그래. 넌 도현이야. 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어." 확신을 심어주듯 첼시피온은 도현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 아무리 그 라딘이라는 사람이랑 똑같이 생겼고, 같은 자리에 상처가 있다고 해도 난 라딘이 아니라 도현이야." 조금은 흥분이 사그라든 어조로 도현은 다시 한번 말했다. " 네 말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싫어도 라딘 라메르로서 행동해야겠지.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인 이곳에서 그래도 라메르 가문 사람들은 내 가족과 같은 얼굴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내 가족과 같은데 그렇게나 똑같은 얼굴로 말하는데 타인이라는 건 아무래도 너무 괴로워..." " 네가 괴로워한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어.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명 방법은 있겠지. 그렇게 믿고 지금은 라딘이 되는 거야. 나는 항상 널 도현이라고 불러 줄 테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네가 도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건 잊지 말아 줘." 도현은 지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첼시피온에게 마음을 털어놓자 돌덩이를 올려둔 것처럼 무겁던 그 무게가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았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던가. 실감할 일 없었던 그런 말이 이렇게나 가깝게 다가오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도현은 힘 빠진 얼굴로 웃었다. 마음 고생과 더불어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식사를 거른 지 몇 달. 체력은 확실히 눈에 띄게 떨어져 버렸다. 아직 어리고 겉보기와 달리 건강체이기 때문에 그냥 몸에 만성피로 증세라도 있는 것처럼 힘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는 않았지만 도현은 조금 더 몸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고 나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저 멀리로 도망가 버렸던 식욕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 오늘은 뭔가 고기를 먹어야 겠어.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욕구도 채우지 못하면 제대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도 없으니까." " 그래. 잘 생각했어, 도현." 첼시피온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소만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고,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상대방의 무게를 덜어주는 상대. 첼시피온은 확실히 도현의 현실 세계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친구라는 이름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상대였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첼시피온과 헤어지게 되는 사실은 정말 아쉬워질 거라고 도현은 생각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차는 착실히 움직여 라메르 백작가의 영지에 들어섰다. 도현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던 창문가에 고개를 내민 채 밖을 바라보았다. 넓게 펼쳐진 평원과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땅이 모두 라메르 백작가의 것이라는 사실은 도현에게도 작은 뿌듯함을 선사했다. 비록 진짜 도현의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이것이 모두 네 가족이 가진 재산이다. 라고 말하는 데 싫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잘 부탁해. 왕자님." 창 밖을 응시하는 자세 그대로 도현이 건넨 인사에 첼시피온은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보라색이던 오오라는 어느새 엷은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 그러면 나도 이제 백작가의 도련님이라는 역할에 어느 정도 충실해지기로 할까. 어울릴 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 분명 어울릴 거야." 첼시피온은 라딘 보다 훨씬 더 라는 말은 삼킨 채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미소 띈 얼굴로 조용히 응시했다. ------ 제도로 복귀한 라메르 백작가에서 열리는 첫 파티의 주인공이 도착했다. 호화로운 왕족 전용 마차에서 내려선 도현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선 수많은 고용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 속에서 아는 얼굴 몇 명을 발견하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 멋진 곳인걸?" 마차에서 내려선 후 저택으로 이어지는 돌 길 위에 서서 고용인들을 응시하던 도현의 귓가에 온화한 첼시피온의 음성이 들려왔다. " 어서 오십시오. 라딘님." 여러 명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도현을 맞이했다. 나이나 성별도 다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자 도현은 정말로 이곳에서 자신이 높은 신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현은 라딘 라메르이고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예전에 지방에 있는 작은 저택에 머물던 시절에 느꼈던 기분 나쁜 시선은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신의 보석의 효과라는 것은 정말 그 점에서만은 유용했다. 도현은 그 보석이 몸 안에 들어와서 좋은 것은 못 느꼈지만, 꺼림칙한 시선이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하나만 해도 보석은 그 역할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이 첼시피온과 함께 저택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노스는 죽 늘어선 고용인들 사이에 서서 지켜 보고 있었다. 한 달 전에 비해 훨씬 더 가냘프게 보이는 체구. 여전히 창백한 얼굴 색. 게다가 얼굴은 확실히 더 야위었다. 분명히 아카데미에 가서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노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고집 불통인 건 형제가 똑같다니까....." 자기 혼자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고 나서 노스는 소문의 유명한 왕자님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서는 도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노스. 라딘님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이는데, 괜찮을까요?" 도현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노스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도현이 저택으로 들어간 후 다시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한 고요인들 사이에서 리사가 말을 건네왔다. " 신의 보석 덕분에 큰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확실히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아." 노스의 말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사가 순간적으로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 아참, 내 정신 좀 봐. 라딘님이 돌아오셨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다니... 먼저 갈게요. 노스." 리사는 서두르는 기색으로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노스는 작게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듯한 테이드와 지금쯤 대면했을 라딘에게 약간의 동정을 표시하면서. " 어서 오십시오. 첼시피온님." 테이드는 의자에서 일어나 첼시피온을 맞이했다. 도현은 첼시피온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테이드를 보고 새삼스레 첼시피온이 정말 왕자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원래 도현은 귀족이나 왕족 같은 특권 계층은 그저 전통으로만 남아있는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된 첼시피온을 신분보다는 그저 존재 자체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첼시피온의 신분이 크게 부각되는 요소인 모양이다. "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첼시피온과 도현은 테이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도현은 응접실 안에 들어서고 나서 테이드와 눈이 마주친 이후에도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테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를 무시하며 둘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이 차로 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저택이 참 멋지더군요. 오는 길에 본 풍경도 아름다웠습니다. 라딘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군요." 조용히 시선을 테이블에 떨구고 있던 도현은 거기서 갑자기 내 이름이 왜 나와? 하는 표정으로 첼시피온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첼시피온은 그런 도현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2/3정도 채워진 찻잔을 들어올렸다. "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십니까?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셨다는 첼시피온님이 만족할 정도는 되는지 모르겠군요." 테이드는 첼시피온의 말을 한마디로 가볍게 넘겨 버리고 일상적인 안부를 물었다. " 제가 마법의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니 배울 것은 아직도 많습니다. 하지만 라딘은.." 그렇게 말하며 첼시피온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잠시 도현 쪽을 쳐다보았다. " 아카데미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고대어에 재능이 있더군요. 아니, 이 경우에는 특별한 우연이라는 말이 더 맞겠지만." 테이드는 조금 놀란 듯 했다. 테이드의 시선이 얼굴에 닿는 것을 느끼고 도현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돌아갈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라딘이 되어 주겠다고 결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테이드와 얼굴을 맞대고 있자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에는 아카데미에서 서로 뺨을 한 대씩 올려붙이고 그대로 헤어졌었다. 이미 예전 일인데도 그 때의 기분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도현은 제대로 테이드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서로 타인이지만 얼굴만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형이고, 동생이라는 사실은 도현의 기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 조금만 기현 형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도현은 마음속으로 한탄하며 겨우 테이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 모르셨습니까? 라딘은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실력이지요." 첼시피온은 능청맞게도 정말 놀랍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도현은 티가 나지 않게 손을 움직여 첼시피온을 쿡하고 찔렀지만 첼시피온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 그렇군요." 테이드는 짧게 대답하며 조용히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어색함을 떨쳐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현은 괜히 입을 열어서 테이드와 피곤하게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라딘으로 지내기로 한 사실 때문에 어느 정도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 오랜만에 마차를 타서 그런지 조금 피곤하군요. 먼저 방으로 가서 쉬어도 되겠습니까?" 첼시피온이 부드럽게 말을 건네자 테이드는 시선을 돌렸다. " 물론입니다. 파드웰. 첼시피온님을 안내해 드려라." 차분한 표정의 집사는 테이드의 명령에 따라 첼시피온에게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 저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첼시피온이 갑자기 응접실에서 빠져나가 버려서 망연한 기분이 된 도현은 왠지 모르게 배신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 첼시피온 자식, 혼자서 가 버리다니.... 분위기는 잔뜩 어색하게 만들어 놓고서!' 도현은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리며 다시 달라붙어 오는 테이드의 시선을 피했다. " 그래.... 언어에 재능이 있었군..." 테이드가 작게 중얼거린 것은 그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뭔가 평소의 테이드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들자 테이드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 얼굴이 많이 야위었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도현은 놀라서 얼굴이 경직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저 테이드의 입에서 걱정하는 말이 나올 줄이야. 지금까지 반년 정도 알고 지낸 테이드는 정말로 기현과 얼굴만 똑같을 뿐 성격도, 말투도 모두 달랐다. 배려하고 걱정해 주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이 아니라, 강압적이고 비틀린 형제 관계를 품고 온 타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테이드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기현 같았다.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인천 공항에서 헤어졌던 기현의 얼굴이 테이드의 얼굴과 겹쳐졌다. " ....미쳤어..?" 그리고 도현은 순간적으로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테이드의 표정이 순식간에 냉랭하게 변했다. 도현은 이번 만큼은 정말 자신의 실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정하며 한숨을 쉬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 너도 그만 가서 쉬도록 해라. 내일 파티 때는 네가 주역이니까." 하지만 도현은 테이드가 말을 끊는 바람에 변명도 하지 못했다. 오늘의 테이드는 확실히 테이드답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다녀간 이후로 뭔가 바뀔 만한 큰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부러 그런 일을 물어봐서 쓸데없는 일을 자초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도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 그럼, 난 가서 쉴 테니까 나중에 봐...... 형." 도현은 망설인 끝에 겨우 끝말을 붙이고는 테이드의 표정도 확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도현의 뒷모습을 테이드는 놀란 듯한, 당혹한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드가 형이라는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내가 미쳤지....." 도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복도를 걸었다. 대체 뭐에 홀려서 테이드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했는지. 하지만 도현을 복잡하게 만든 원인은 분명 테이드였다. 불행도 한꺼번에 오고 행복도 한꺼번에 오는 것인지 첼시피온과 친구가 되어 마음이 조금 편해지고 나자 이번에는 테이드가 '형답게' 변했다! 환영해야 할 일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미심쩍기도 했다. 당장에 믿어버리기에는 테이드가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이 믿음을 한번에 부숴 버린다. 테이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동생을 계속 미워해 온 인간이었다. 물론 인간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주 넓은 이해심을 발휘했을 경우의 일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미워하려면 원흉인 황제를 미워해야지 애꿎은 동생을 미워한다는 건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라딘이라는 소년이 검은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검은색은 우성 인자다. 흑인과 백인이 결혼했을 때 흑인인 아이가 태어날 확률이 더 높은 것처럼 황족의 증거가 금발에 보라색 눈이라고 해도 아이가 반드시 둘 중의 하나를 타고 날 리도 없는 것이다. " 어차피 과학도 모르는 세상인데.....휴..." 도현은 괜히 엉뚱한 일을 생각해낸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쉬며 그 생각 자체를 떨쳐 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라딘의 과거 같은 건 지금은 어디에 있을 지 모르는 그 소년의 몫이지 결코 도현이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 라딘님, 뭘 그렇게 중얼거리시는 겁니까?" 2층에 있는 방으로 향하던 도현은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오자 자동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 노스, 오랜만이야." " 어서 오십시오, 라딘님." 안경을 쓴 갈색 머리카락의 주치의가 웃으며 도현을 맞이해 주었다. 언제나와 같은 노스의 얼굴을 보자 도현은 그제서야 돌아왔구나 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 여전히 식사는 제대로 하지 않으신 것 같군요. 얼굴이 많이 야위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도현은 노스까지 같은 말을 하는 걸 보니 확실히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의 얼굴은 매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달라진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역시 한창 자랄 나이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확실히 표가 나는 모양이었다. " 아카데미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리사에게 부드러운 송아지고기라도 부탁해야겠어." " 방에서 쉬고 계시면 제가 그렇게 전하지요." " 아, 부탁해도 돼?" 물론입니다. 하고 웃어 보이며 노스는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 라딘 라메르....라..." 복도를 지날 때마다 스쳐 가는 고용인들의 모습을 넘겨보며 도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 하룻밤이 지난 후, 이른 아침에 눈을 뜬 도현은 창문을 열고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정원처럼 넓지는 않았지만 승마를 해도 부담이 없을 만큼의 넓이에 잔디나 나무들도 깔끔하게 꾸며둔 정원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이른 아침부터 정원을 손질하는 정원사의 뒷모습이 나무 사이사이로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 일찍 일어나셨네요? 라딘님." " 아, 리사." " 어제 일찍 주무셨으니까 오늘은 연회장에 입고 가실 옷을 고르셔야죠. 다섯 벌 정도 골라두긴 했는데, 입어보시고 고르세요." " 그냥 리사가 골라 줘." 도현이 귀찮다는 듯이 말하자 리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건 안돼요. 이번 파티의 주인공은 라딘님이신데,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나가시지 않으면 백작가의 체면이 서질 않아요." 도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끄덕였다. " 그럼, 씻고 올 테니까 준비해 줘." 어쨌든 이제 장단을 맞추기로 했으니 그렇게 움직여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도현은 욕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하고 나서 문득 거울에 비친 얼굴을 확인했을 때, 도현은 얼굴이 예전에 비해 날카로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살이 빠지긴 빠진 모양이다. 어제 테이드가 야위었다고 말하며 방에 가서 쉬라고 형답게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보통 형다운 표정과 말투를 보여준 테이드가 왠지 계속 기억에 남아 있었다. '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도현은 마음속으로 이유를 떠올리며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욕실에서 나가자 이미 리사는 옷을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흰색, 검은색, 푸른색 계통의 깔끔하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예복은 상당히 여러겹이어서 차라리 턱시도를 입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 연회는 5시부터라고 했지?" " 네. 손님들은 아마 오전부터 도착하실 거에요." 아직은 파티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이 크게 실감나지 않았다. 생일 파티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난 번 황태자의 생일 파티 때처럼 화려한 연회가 열리는 것일 테니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모여서 하는 파티와 비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라딘은 그 동안 스캔들이니 불행을 부르는 아이니 뭐니 해서 경원시 되어 왔지만, 지금은 완전히 그 반대 입장이 되었다. 그것도 돌맹이 같은 작은 보석 덕분에. 이 세계 사람들이 믿는 신은 유일신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신을 절대적으로 믿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이 남긴 힘의 증거인 신의 보석에 대해서만은 누구 하나 의문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신학 수업에서 어느 정도 배운 바로는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 자들은 하나 같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도현은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이 세계 정복의 야망이라도 품는다면 당장에 모든 나라를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었었다. 하지만 신의 보석은 아무 때나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힘은 아닌 모양이다. 그 증거로 도현 역시 신의 보석이 몸 속에 흡수되었지만, 처음 보석을 손에 쥐었던 날 이후로 그 효력을 느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치료해 준다거나 한 적도 없다. 특별한 힘을 얻었다는 실감도 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은 신의 대리자이고 특별하다고 말하니까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꿈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 돌이 몸 속에 흡수된 것을 본 사람이 도현 이외에도 몇 명이나 있었고, 그 돌 때문에 한달 동안 누워지낸 것도 사실이었다. 그 투박한 작은 돌 하나가 사람의 운명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자 기가 막히기도 했다. 이름은 거창하게도 신의 보석이었지만 우유빛 불투명한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라딘이라는 소년을 신의 대리자로 만든 것이다. 엄연히 따져서 말한다면 불행을 부르는 소년으로 불리며 우울하게 살아왔던 것은 라딘이고, 신의 대리자가 된 것은 도현이지만 어쨌든 얼굴은 같으니 사람들에게는 동일인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신의 보석과 라딘 라메르. 도현은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자리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확인시켰다. " 라딘님? 이 옷은 어때요? 얼굴색이 흰 편이니까 이쪽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물론 다른 옷도 입어보셔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요." 리사는 짙은 청색 예복을 도현에게 넘겨주었다. 도현은 그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이자 옷장으로 쓰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복잡하고 여러겹 이지만 입는 법을 익힌 예복을 혼자 힘으로 입고 나서 전신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자 거울 속에 비친 것은 도현이 아니라 라딘처럼 보였다. 한번도 라딘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도현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입술만 움직여 라딘 라메르라는 이름을 말해 보았다. 조금은 헐렁하게 느껴지는 옷을 바라보며 도현은 확실히 예전에 비해 말랐다는 것을 깨달랐다. 이 옷은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 쟀던 사이즈로 만든 것일텐데, 헐렁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확실히 몸이 축났다는 것을 뜻했다. 제대로 식사도 안 했지만 영양실조로 쓰러진 적이 없는 것은 아마도 신의 돌의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특별히 몸이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다만 조금 기운이 없었을 뿐이다. 상자 속에 담겨 있던 그 작은 돌맹이가 몸 어딘가에 녹아들었다고 생각하자 새삼스럽게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사실 이곳에 있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신의 보석이라는 아주 중요한 것을 몸 안에 품게 되다니 아이러니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은 한도현이 아니라 라딘 라메르다. 이제부터는 연극을 하기 위해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배우가 되는 것이다. 라딘 라메르가 되어 그의 삶을 연기하고, 그 배우라는 입장을 이용해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다. 도현은 거울 속의 소년을 직시했다. " 라딘 라메르. 네 자리로 돌아와.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라딘에게 도현은 말을 걸었다. 네가 돌아오지 않으면 난 내 세계로 갈 수 없을 지도 몰라. 어쩌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얼굴만 존재해야 하는 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네 대신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건 지도 몰라. 그러니까 어서 돌아와. 도현은 거울 속의 소년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거울 속에 비친 소년 역시 도현일텐데도 지금은 이상하게 타인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냉정한 시선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 라딘님? 아직 멀었나요? 제가 들어가서 도와드릴까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리사의 목소리에 도현은 정신을 차렸다. " 다 입었어." 도현은 대답하고 나서 거울에서 시선을 돌렸다. 문 손잡이에 오른손을 올리고 문을 열었다. 화려하고 귀족적인 넓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충실한 고용인이 미소지으며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꿈이라고 여기고 싶지만 결코 꿈이 될 수 없는 '현실'이었다. " 그 동안 감사의 말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 아니요, 일부러 감사받기 위해서 한 일은 아닙니다. 저는 라딘이 마음에 들었고, 충분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백작님께 그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왕족으로 태어난 인간은 모두 이렇게 여유로운 태도로 한 발 물러선 듯한 거리에서 상대방을 내려다보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테이드는 문득 생각했다. 왕족이 아니더라도 테이드 역시 과거에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더라면 케이스워크나 첼시피온 처럼 여유를 당연하게 누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 라딘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환상은 너무나 커서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이 달라지게 만들어 주니까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요. 신의 보석이 아마 그것을 도와줄 것입니다." 첼시피온은 관찰하듯이 테이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전달하지 않는 부드러운 것이었다. 첼시피온의 시선에 담긴 테이드는 처음부터 한결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첼시피온의 얼굴을 마주 하고 앉아서도 냉정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첼시피온에게 흥미를 느끼게 했다. " 하지만... 스스로 미혹 속에 빠졌다고 생각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도 많습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를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어느 곳에서도 쓰이지 않는 언어를 몇 가지나 알고 있으니까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며칠동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다른 세상이 존재할 리가 없지요." 첼시피온은 단정하듯이 그렇게 말했다. 다른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단정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 요정들의 기록에도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까?" " 수천년 동안 살아온 요정들 중에서도 다른 세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균열이 일어나 그 사이로 누군가가 떨어졌다고 해도 우연히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그 가족의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정말로 그런 우연이 존재할까요?" 테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첼시피온 역시 테이드의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테이드는 첼시피온을 통해 지금 라딘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라딘을 눈앞에 두고도 예전처럼 초조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지금의 라딘은 잡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 무언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라딘이 라딘으로 살아가길 바란다면 어느 정도는 동조하는 것이 좋겠지요. 야생마를 길들일 때 무조건 채찍만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은 방법입니다." 테이드는 첼시피온의 말에 대답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자문했다. 아직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라딘이 첼시피온에게만은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했다. 테이드는 라딘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라딘은 이미 테이드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증오의 대상으로 그 후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집착의 대상으로. 그리고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달라져 버린 존재로. 하지만 그 모습들 모두가 라딘이다. 과거에 대해 어느 것 하나 기억하지 않고 있어도, 자신이 라딘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돌아갈 거라고 말하고 있다고 해도. " 만약의 경우....라딘이 정말 다른 곳에서 왔다고 할 지라도 신의 보석을 가진 이상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이니까요." 요정의 피를 이은 아름다운 왕자는 온화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테이드는 그 온화함 속에 단지 그것만이 담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외모는 모친인 요정의 모습과 흡사하지만 첼시피온의 부친은 다름 아닌 페르마 대공왕이다. 대륙을 움직이는 다섯 명 중의 한 명이며 인간 세계에는 관여하지 않는 요정왕의 딸을 부인으로 얻은 사이드 공국의 왕. 그리고 첼시피온은 다음 사이드 공국의 왕이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왕자. 테이드에게 다가온 첼시피온은 라딘의 친구가 되어 곁에 머무는 대신 라메르 백작가의 힘이 되어주겠다고 말했다.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테이드에게 단지, 라딘에게 흥미가 있을 뿐이라고 대답한 첼시피온은 온화하게 미소지었지만, 그것은 첼시피온의 진짜 얼굴은 아니었다. 단지, 인간들 속에 녹아들어 살아가기 위한 가면이다. 그 증거로 부드럽고 온화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는 입가에 떠오른 웃음과 달리 진심으로 웃지 않았다. "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라딘이 라메르 백작가의 이름을 깊숙한 곳에 새기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테이드의 마음속에 떠오른 의심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첼시피온은 다시 한번 약속했다. "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행동하시는 겁니까. 단지 흥미 때문입니까....?" 입을 다물고 있던 테이드는 말을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 글세요. 강한 척 하지만 사실은 누구 보다 여리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만, 사실은 배려심을 가진, 돌아가야 할 곳을 찾고 있는 소년의 행로가 어디에서 끝날지 지켜보고 싶어서라고 해 두지요." 첼피시온은 라딘과 같은 나이인 열 일곱이었지만 도저히 그렇게는 보이지 않았다. 몸 속에 흐르는 요정의 피 때문인지, 아니면 페르마 대공왕의 피를 짙게 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 아카데미에서 첼시피온과 대면하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에 첼시피온은 테이드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테이드와 첼시피온은 서로 생각하는 바를 위해 뜻을 합쳤다. " 그리고...또 한가지. 저는 케이스워크 황태자가 싫습니다. 라딘이 리카도 제국에 얽매이는 건 바라지 않아요. 설령, 치유의 보석을 가지고 있던 것이 리카도 제국 황실이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빙긋 웃는 첼시피온의 얼굴은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테이드는 냉정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맞받았다. " 모든 일은 17년 전. 리카도 제국 황실에서 시작된 겁니다. 라딘이 황제의 사생아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단순한 우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옅어지지 않는 당신의 감정 역시 단순하지 만은 않지요." 수수께기 같은 말을 꺼내 놓고 나서 첼시피온은 몸을 일으켰다. 시선을 마주쳐오는 테이드에게 부드러운 표정을 보이며 첼시피온은 다시 입을 열었다. " 저는 이제 라딘의 방으로 가봐야 겠군요. 라딘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끈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라메르 백작님." 테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방에서 빠져나가는 첼시피온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화실히 라딘을 중심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의 보석이 라딘을 선택하기 전부터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테이드는 달라져 버린 현실 속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움직여야 할지 확실하게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예전처럼 라딘에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역시. ----- " 라딘님, 아카데미에서 친구분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어제 먼저 출발했던 도현이나 첼시피온과는 달리 리올과 카드리는 파티 시간보다 두어 시간 정도 빨리 저택에 도착했다. 방으로 안내 받아 들어온 리올과 카드리는 아카데미에서는 늘 로브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각각 검은색과 짙은 남색 예복을 입고 있었다. " 어서 와." 첼시피온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도현은 웃음 띈 얼굴로 쌍둥이를 맞이했다. " 옮겨온 지 몇 달 안된 것치고는 상당히 정리가 잘 된 저택인데...?" " 형이 이것저것 신경 쓴 모양이지." 도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고 나서 쌍둥이에게 자리를 권했다. 도현의 시녀인 리사는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처음으로 도현의 주변에 여러 명의 친구가 모인 사실이 기뻤는지 평소보다 훨씬 밝은 표정으로 차를 준비하고 간단한 음식을 내왔다. " 손님은 몇 명 정도나 초대받은 거야?" 리올의 질문에 도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 300명 정도...." " 그렇게 많지는 않네." " 17년간 잊혀졌던 가문이 주최하는 파티치고는 꽤 많은 거 아닐까?" 남의 말하듯 하는 도현을 보고 카드리는 낮게 혀를 찼다. 기억이 없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생일 파티를 목적으로 열리는 것인데 저런 소리를 하다니 확실히 라딘은 이상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면서. " 그 잊혀졌던 가문을 다시 제도로 복귀시킨 것은 네 힘이야. 도현." 온화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던 첼시피온이 입을 열었다. 도현은 첼시피온이 도현이라는 이름을 불러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즐거워졌다. 다른 곳도 아닌 도현을 라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라메르 백작가의 저택에서 원래 이름을 듣는 기분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할 만큼 기뻤다. 도현은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 내가 이곳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붙일 수 있게 해준 건 너희들 덕분이야." 도현의 입에서 나온 진심을 듣고 카드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 우리가 아니라 첼시피온 왕자님 덕분이겠지." " 가장 처음 다가온 건 너희 둘이었잖아. 그때는 아카데미에 억지로 들어가게 되어서 기분이 나빴는데, 방까지 찾아와서 말을 걸었었지." " 흥미가 없었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넌 너 하나로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도현의 대답에 이번에는 리올이 말을 받았다. " 어쨌든 벌써 한 달이나 지났구나. 올해는 아카데미도 소란스러웠지. 대륙의 두 유명인을 동시에 받아들였으니까. 첼시피온님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도현 네게 접근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걸.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어한 사람들은 정말 많거든." " 너희는 어떤데? 너희도 날 이용하고 싶어서 접근한 건 아니야?" 도현은 문득 그렇게 질문했다. 본인에게는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자각이 그다지 크진 않지만 어쨌든 손바닥을 통해 그 흰 돌맹이가 흡수된 것은 사실이다. " 무슨 소리야. 라메르 가문이 예전처럼 힘을 되찾았다고 해도 우리 샤르코 가문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불끈하며 대답한 것은 역시 카드리였다. 카드리는 조금 분한 듯한 표정으로 도현을 노려보았다. 물론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로 접근하지는 않았지만 한 달 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도현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만 빼면 꽤 괜찮은 녀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후에는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친구가 되어도 좋을 것 같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현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 너희 가문이 부자인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신의 보석은 매력적이라면서?" " 매일같이 라메르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주제에...!" " 자, 말싸움은 그만..." 그런 소리를 할거라면 집어치우라고 말하려던 찰나 첼시피온이 미소 띈 얼굴로 둘의 사이를 중재했다. " 얼마 후면 연회장으로 나가야 할 텐데, 이곳에서 입씨름이나 할 여유는 없어. 도현은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고 리올과 카드리는 샤르코 상단의 대표이자 도현의 친구로 초대받은 것이니까." " 네가 첼시피온을 반만 본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이상하게도 도현과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대며 언성을 높이는 카드리를 만류하며 리올은 작게 한숨지었다. " 케이스워크 황태자님이십니다." 연회가 시작되고 한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스위드를 대동한 흰색 예복 차림의 케이스워크가 연회장에 도착했다. 황태자의 등장에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케이스워크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 두 명을 응시했다. 사이드 공국의 왕자인 첼시피온과 신의 보석의 선택을 받은 라딘은 황족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두 명이었다. 햇빛이 내려앉은 듯한 선명하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 첼시피온은 온화한 표정으로 라딘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올라온 보고를 통해 사이드 공국의 첼시피온이 라딘에게 접근했고, 지금은 가장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라딘과 첼시피온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눈길을 끌면서도 어울렸다. 케이스워크는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다른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고 바로 걸음을 옮겼다. " 오랜만이군. 라딘 라메르." "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도현은 반갑지 않다는 감정을 얼굴에 확실하게 드러내며 케이스워크에게 인사했다. 이상하게도 케이스워크 황태자와 마주치면 천적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나빠지고, 표정을 숨길 수도 없다. 도현은 그것은 아마도 케이스워크가 라메르 백작가를 터무니없는 이유로 모함하고 몰락시킨 기분나쁜 황제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황제와는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얼굴은 케이스워크 쪽이 훨씬 잘 생겼지만 황제는 누가 봐도 케이스워크의 부친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못하게 할만큼 케이스워크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황족의 상징이라는 금발과 푸른기를 많이 띄는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중년의 황제는 껄끄러운 시선으로 도현을 내려다 보았었다. 그 당시에는 라메르 백작가와 황제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몰랐었지만, 그 후 노스에게 자세한 사정을 듣고 난 도현은 그때 황제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막말로 뭐라도 씹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친구의 부인을 강간하고 태어날 아이가 자신의 사생아인지 아닌지 내기 걸 듯이 말을 꺼냈던 황제. 라메르 백작가에서 일어난 스캔들은 잘 꾸며진 한편의 드라마였다. 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황제는 검은색이 우성인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리도 없고, 강간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태어날 아이가 자신을 닮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라메르 백작부인을 강간한 사실이 확실하게 증명되었다면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불명예를 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자신만만하게 선언했고, 결과는 황제의 에상대로 나왔다. 그런데 17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난 라메르 백작가의 둘째 아들은 신의 보석에게 선택받았다. 황제는 자신의 입으로 예전에 빼앗아갔던 것들을 되돌려주어야만 했다. 황제처럼 자기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말을 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 오랜만이군요, 첼시피온 왕자." 케이스워크의 얼굴을 보고 떠올랐던 생각들을 되새기던 도현은 케이스워크가 첼시피온에게 인사하는 소리를 듣고 현실로 되돌아왔다. " 아마 5년 전에 뵙고 처음인 것 같은데요. 더 지혜가 깊어지신 것 같습니다. 케이스워크님." 케이스워크와 첼시피온은 시합이라도 하는 것 처럼 온화한 표정을 떠올린 채 말을 주고 받았다. " 라딘과 사이가 좋아졌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앞으로 빛의 보석을 이끌어갈 사람으로서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 좋은 친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케이스워크님은 곧 제국을 물려받으시나 보군요. 하지만 빛의 보석을 완전하게 손에 넣으려면 아직 5년이 남아있습니다." 도현은 무슨 은유법으로 점철된 지루한 대사를 내뱉고 있느냐고 한바탕 외쳐주고 싶은 심정이 되어 둘의 대화를 들었다. 도현을 사이에 두고 신경전이라도 벌이는 듯한 첼시피온과 케이스워크를 보고 헛웃음이 나와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우연히 스위드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그림자처럼 조용히 케이스워크의 오른쪽에 서 있던 스위드는 회색 눈동자로 도현을 응시했다. 상당히 특이한 눈동자 색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조금 달라 보였다. 평소에는 흔들림 하나 없이 차가워 보이는 눈빛이 지금은 취한 듯이 흐릿해 보였다. 도현이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스위드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도현은 스위드의 이마에 꿈틀거리는 듯한 검은 선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꿈틀대는 검은 그림자처럼 보였던 그것은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가느다란 선으로 이루어진 문양으로 바뀌었다. 누군가가 섬세한 손놀림으로 그려낸 듯한 아름다운 문양. 그러나 그 문양은 불길하게 느껴졌다. 얼어붙은 듯이 그 문양에 사로잡혀 있던 도현에게 스위드가 입 모양으로 무슨 말인가를 건넸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한 걸음을 움직인 순간. 타는 듯한 열기가 이마를 뒤덮었다. " .......!" 놀란 도현이 경직된 자세로 멈춰서 이마에 손을 올렸을 때, 흐릿한 스위드의 눈동자가 도현이 가린 이마의 중앙 부분, 스위드의 이마에 떠오른 문양과 같은 위치를 응시하는 것을 깨닫고 도현은 설마 하는 기분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올랐던 이마의 열기는 사라졌고, 이마에서는 피부의 감촉 이외에 다른 것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도현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이마에도 저것과 같은 것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라딘?" 케이스워크와 대화에 열중하고 있던 첼시피온이 경직된 도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도현은 이마를 가렸던 손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너......." 첼시피온의 얼굴에 놀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도현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 잠시 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온 스위드가 케이스워크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이미 그의 이마에는 문양 같은 것은 떠올라 있지 않았다. 라메르 백작가의 주인으로서 연회장에 온 손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있던 테이드는 황태자의 등장 이후 갑자기 연회장이 술렁거리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이마에 선명한 은색의 문양이 떠올라 있는 라딘이었다. 누가 봐도 신의 보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만들어주는 복잡하고 섬세한 문양은 라딘의 이마 정 중앙에 자리한 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테이드는 말을 나누고 있던 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라딘쪽으로 걸어갔다. 이 자리에서 라딘이 확실히 신의 보석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라딘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라딘을 향해 걸어가던 테이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첼시피온의 품안으로 무너져 내리는 라딘을 보고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 빛의 보석에 대한 기록에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테이드는 차분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조금도 차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라딘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호흡도 고르게 쉬고 있었지만 마치 깊은 잠에 빠지기라도 한 듯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테이드는 두 번 다시 라딘이 어떤 이유로든 도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같은 방 안에 케이스워크가 없었다면, 테이드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을 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 기록이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 단 두 명에 대한 기록일 뿐이니까." " 하지만...." "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군, 테이드." 테이드는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의 케이스워크에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하며 응시했다. " 라딘은 이미 그대의 동생으로서만 살아갈 수 없는 몸이다. 라딘은 제국의 소중한 재산이야. 신의 보석이 지상에 뿌려졌을 때부터 결정된 사실이 아니었던가? 그대 역시 신의 보석이 어떤 것인지 배웠으니 잘 알고 있겠지." 분했지만 케이스워크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라딘은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테이드의 동생이었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에 변화는 없었다. " 좋은 형으로서 동생의 곁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엉뚱한 행동은 하지 않길 바라네. 라메르 백작. 라딘이 깨어나면 내게도 연락을 주면 좋겠군." 의자에서 일어선 케이스워크를 배웅하기 위해 테이드 역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음속에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테이드는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테이드에게 차가운 미소를 남긴 채 케이스워크는 방을 빠져 나왔다. 3층의 객실로 들어서자 평소와 달리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스위드의 모습이 보였다. " 무슨 일이지, 스위드? 말도 안 되는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닌가?" " 다른 사람입니다." " 뭐?" 케이스워크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난 것 같았다. " 라딘 라메르가 아닙니다." 단언하듯이 이어진 스위드의 말에 케이스워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스위드는 설명을 덧붙이듯이 말을 이었다. "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 모습이었던 것처럼." 케이스워크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어긋났다는 사실이 이 정도로 평정을 무너트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신의 보석을 흡수한 라딘에게 원래 모습을 되돌려 주자고 생각한 것은 케이스워크였다. 황제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라딘의 생일 연회장에서 성대하게 그 일을 벌일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모든 것이 뒤집어 지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놀라는 테이드나 라딘. 그리고 17년 동안 라메르 백작가를 멸시해온 사람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가 되어 버렸다. "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느낌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스위드는 처음 라딘과 대면했을 때 받았던 느낌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군. 그렇다면 라딘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저 소년은 대체 누구지...?" 겨우 입을 뗀 케이스워크가 물었지만 누구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도현은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뜨거운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온 몸에 열기가 퍼져서 나른하게 몸을 잡아끌었다. 주변에 있는 인기척이나 가끔씩 오고가는 두런거리는 말소리도 들렸지만 눈을 뜰 수도 없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도현은 연회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회상했다. 황태자의 부관인 회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 스위드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스위드의 이마에 검은색 문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 까지는 확실히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제대로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현이 열에 시달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첼시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라딘은 아직입니까...?" " 네,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첼시피온님." 첼시피온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 그럴 수는 없지요. 친구에게 큰 일이 닥쳤을 때 곁에 있어주지 않는 것은 진정한 친구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는 것은 진정으로 축복받은 일이다. 테이드는 첼시피온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도 쉽게 경계심을 품지 않고, 누구나 쉽게 그를 믿는다. 테이드에게 17년 동안 마음을 열지 않았던 라딘이 첼시피온에게는 단 한 달도 되지 않아 마음을 열고 진심을 드러냈다. 무엇이 라딘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테이드는 그것이 궁금했다. 단지, 요정의 피를 이은 아름다운 외모와 친숙한 느낌 탓인지. 그렇지 않으면 테이드가 지금까지 잘못된 방법으로 라딘을 대해왔던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딘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며, 소중한 동생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비난하고 몰아세우는 가운데, 그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티려면 무언가가 필요했다. 가령, 증오라는 이름의 비틀린 감정 같은 것이. " 어쩌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지금은 정신을 잃었을 지도 모릅니다. 눈을 뜨면 다시 예전의 라딘이 되어있을 지도 모르지요. 원래 정신을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 온화한 시선으로 테이드를 바라보며 첼시피온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첼시피온 특유의 부드러운 눈빛은 테이드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처음 첼시피온과 마주쳤을 때, 그리고 두 번째로 만났을 때도 계속 그런 느낌이었다. 마치 마음 밑바닥부터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 요정은 자연과 친숙한 존재인 만큼 보통 인간과는 감각 자체가 달라서 타인의 진심을 쉽게 알아차린다고 한다. 그때였다. " 첼...시피온.....너....." 힘이 들어 억지로 말하는 듯한 쥐어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첼시피온과 테이드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서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킨 도현이 첼시피온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담긴 것은 명백한 분노였다. " 일어났구나, 도현. 아까는 연회장에서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었는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첼시피온은 도현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도현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 너도야? 너도 결국은 못믿는 거야? 웃는 얼굴로 거짓말을 한 거였어?!" 분노 때문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도현은 첼시피온의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부드러운 표정, 따뜻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더 이상 첼시피온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없었다. " 변명이라도 해봐. 방금 전에 테이드에게 말한 것처럼. 내가 정신이 이상한 거라고 다시 한 번 말해봐!" " 진정해." "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첼시피온은 소리지르는 도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 이손 놔! 넌 테이드 보다 더 악질이야! 요정의 아이라고? 이 세상의 요정이란 너처럼 가식적인 존재야? 여긴 다 그래? 눈에 보이는 게 아니면 못 믿는 거냐고!!" 이곳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존재인 첼시피온이, 다른 사람이 믿지 않아도 자신만은 믿어주겠다고 말했던 첼시피온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은 도현의 머리 속에서 뭔가가 끊어지게 만들었다. 거칠게 첼시피온의 손을 쳐내는 도현을 첼시피온은 가볍게 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현의 등을 쓸어 내려주며 첼시피온은 계속해서 온기를 전했다. 분한 마음에 첼시피온을 떼어버리려 했지만 의외로 첼시피온의 힘이 세서 도현은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 순진하게 네 말을 믿는 날 보고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어? 멍청한 녀석이라고 빈정거렸겠지? 잘도 저런 말을 지어내서 말한다고 생각했겠지. 안 그래?" " 도현...." "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넌 이제 자격이 없어." 작게 한숨을 내쉰 첼시피온은 입술의 도현의 귓가에 바짝 붙였다. " 네 형이....아니, 테이드가 죽어도 좋다면 계속 그렇게 소리 질러." " 뭐?!" 도현은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조용히 하고 내 말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첼시피온은 도현의 얼굴이 테이드에게 보이지 않도록 몸을 틀었다. " 난 널 데려가기 위해 아카데미에 왔어. 지금까지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잘 지내왔지만 네가 마지막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 덕분에 균형이 깨져 버렸지.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도 움직이고 있을 거야. 언제나 그래왔듯이 권력자라면 누구나 전부를 가지길 원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도현은 입을 열지 못했다. " 대륙을 움직이는 다섯 명의 유력자들이 널 노리고 있어. 분명 황제가 널 차지하지 못하게 방해할 것이 뻔하지. 다른 사람들은 무력을 사용할 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게 협력해 주는 것이 좋을 거야. 나는 힘으로 빼앗는 것을 싫어하거든.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겠지?" 말을 이어가는 도중에도 첼시피온은 도현을 달래듯이 계속해서 등을 토닥였다. " 하지만....네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테이드나 루사벨라가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물론, 너는 얼굴만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도현은 경직된 채로 가만히 첼시피온의 품에 안겨 있었다. 갑자기 테이드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첼시피온이 교묘하게 각도를 튼 덕분에 도현은 테이드를 볼 수 없었다. 분명 테이드는 기현이 아니고, 기현과는 성격도 완전히 달랐다. 테이드는 도현의 앞에서 언제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도현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무시했다. 하지만 저 테이드가 죽는다면? 테이드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상상하자 도현은 바닥이 없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세상에는 단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위안이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다. " 잠깐.....생각할 시간을 줘..." 도현은 겨우 입을 열어 그렇게 말했다. 첼시피온은 작게 웃으며 도현을 풀어주었다. " 이제 라딘이 조금 진정이 된 듯 하군요. 형제끼리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이 어떨까요? 라메르 백작님." 테이드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한 첼시피온은 허리를 숙여 도현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외국 사람들이 인사를 나눌 때 하는 듯한 가벼운 입맞춤에 불과했지만, 첼시피온의 진짜 모습을 알아버린 도현은 그것을 인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첼시피온이 도현과 테이드를 뒤로하고 방을 빠져나갈 때까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적막만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몇 번이나 입술만 달싹였을 뿐 도현은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선을 돌리자 테이드는 의자에 앉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듯이 바닥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저렇게 입을 다문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테이드는 기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실 얼굴만 같은 남이라면 죽는다해도 도현과는 상관없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도현은 첼시피온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대체 그 신의 보석이 뭐라고 이런 일이 생기는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도현은 테이드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 형. 신의 보석이란 게 대체 뭐야....?" 도현이 말을 걸자 테이드는 놀란 듯이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는 평소와 달리 냉정함을 잃고 있었다. " 뭐가 그렇게 형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데? 전혀 형답지 않잖아. 첼시피온이 왕자라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야?" 아카데미에 찾아왔던 그 날을 제외하고 어제나 오늘 도현의 눈에 비친 테이드의 모습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물론 이유 없이 테이드에게 맞고 싶지도 않았고, 달라진 듯한 테이드가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테이드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 너야 말로 첼시피온 왕자의 무엇을 보고 마음을 드러냈지? 네가 첼시피온 왕자에게 했던 이야기는 나 역시 모두 들었다. 단지 네가 망상에 붙잡혀 있다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아." " 어차피 믿지도 않을 얘긴 꺼내지도 마. 하지만 어째서 첼시피온과 손을 잡은 거야? 그거야 말로 형답지 않으니까, 그 이유나 말해. 난 신의 보석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용당하면서 살기는 싫으니까." " 내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건 너다." " 하..." 도현은 기가 막혀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웃기는 소리 좀 하지 마. 내가 말해도 들어주지 않은 건 형이었어. 그리고 어차피 지금도 믿지 않잖아. 피곤하니까 이제 나가 줘.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도현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고개를 돌리자 테이드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곧바로 나가지 않고 도현이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도현에게 테이드는 손을 뻗었다. 조금 거칠게 도현의 뒷머리를 움켜잡은 테이드는 도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테이드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아차린 도현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테이드를 밀어내려 했지만 테이드는 힘을 주어 도현의 얼굴을 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곳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거친 손놀림과는 달리 테이드는 부드럽게 도현의 입술 사이를 침범했다. 혀가 치열을 가르고 들어와 도현의 혀를 빨아들이듯이 잡아당기며 입안에서 움직였다. 경직된 자세로 굳어진 도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길게 이어지는 테이드의 딥키스를 받았다. 이윽고 테이드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을 때 도현은 어찔하는 현기증을 느끼며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 미쳤다! 다들 미쳤어!' 패닉 상태에 빠진 도현은 테이드가 방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Hidden Part. hesitate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고, 낯선 것들 투성이인 세상에서 낯이 익은 것은 단지 가족들의 얼굴 뿐이었다. 하지만 같은 것은 얼굴일 뿐, 라딘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치 꿈처럼 돌아가신 양친이 그대로 건재하고 테이드와 결혼해서 저택을 떠난 루사벨라 역시 한 집에 머물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주변의 작은 것 하나까지 모두 생소했지만,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가족들이 라딘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말 꿈같은 현실이라고 라딘은 생각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였다. 테이드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며 따뜻한 눈빛으로 라딘을 바라보았다. 뭔가 미안한 것 같은 표정을 보고 라딘은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싫지는 않았다. 지금도 침대 위에 누운 라딘의 곁으로 다가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물이나 특이한 종이가 붙어 있는 주스 같은 것을 건네 주었다. 팔뚝에 꽂혀있는 가느다랗고 뾰족한 것이 침대 위쪽에 연결된 것을 보고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뭔가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라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생소해서, 익숙한 것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정도였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푹 쉬고 있어라. 아마 며칠 후면 퇴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고 있어. 알겠지?」 테이드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라딘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배웅했다. 너무나 상냥하고 부드럽기는 하지만 테이드의 얼굴은 라딘에게 그 무엇보다 두려운 것이었다. 비록 눈동자 색이 녹색이 아니라 검은색이 되었지만, 라딘은 언제 테이드가 차가운 말투로 이름을 부르며 너는 고통받아야 한다고 말할 지 두려웠다. " 오빠, 아무래도 이상해." 도현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채현은 기현의 방으로 찾아가 마음 속을 채운 의구심을 겉으로 드러냈다. " 뭐가?" " 도현이 말이야." 기현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 나도 사고로 실어증에 걸렸다거나 기억을 잃는 일은 있어도, 지금 도현이 처럼 말을 잊어 버린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 하지만..." 채현은 기현의 말을 잘랐다. " 뭔가가 이상해. 도현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지금의 도현이는 마치 주변의 모든 것들을 완전히 처음 보기라도 하듯이 흠칫거리며 놀란다구." " 나도 알아. 이런 비유는 좀 이상하지만 시골에만 살다가 처음 도시에 온 사람이 놀라는 것 같은 모습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도현이가 도현이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난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뉴스에서 비행기 추락 소식을 듣고서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 오빠만 그런 거 아니야. 나 역시 도현이가 사고 당한 걸 알고 정말 놀랐어. 온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구.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천재인 동생이지만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여자의 감이라고 해도 좋아. 어머니는 지금은 도현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쪽은 생각도 못하시는 것 같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끼고 계실 거야." 기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채현아. 그럼 넌 도현이가 다른 누군가랑 바뀌기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 글세,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하지만...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일 수도 있지만, 도현이가 누군가랑 영혼이 뒤바뀐 거라면 이해할 수도 있겠어. 검사 결과에도 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나왔고, 도현이가 저런 증상을 보이는 이유도 모르겠다고 했잖아. 미심쩍어. 정말." " 그래서 채현이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도현이 안에 있는 이상한 사람에게 나가라고 소리칠 거야? 그럼,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해?" " 오빠..." 채현은 한숨을 내쉬며 기현의 침대 위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 나도 그런 게 아니란 건 알아. 하지만... 도현이를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리 그냥 사고 후유증 때문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뭔가가 다르다고 속에서 소리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얼굴만 제외하면 도현이랑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거야." 도현이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지 벌써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도현은 알고 있던 모든 언어를 다 잊은 것 같았다. 도현이 유일하게 하는 말은 영어와는 조금 비슷하지만 영어는 아닌 다른 나라 말이었다. 대체 어느 나라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려 했지만 채현과 기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아낼 수 없었다. 도현은 단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났을 뿐, 지금까지 제대로 된 대화도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죽은 것도 아니고 몸 어딘가가 불구가 된 것도 아니니 축복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채현은 도현을 볼 때마다 이건 내 동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예전처럼 도현을 대할 수가 없었다. 가족 중에서 도현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기현이었는데, 기현은 그런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보고도 못본 척 하는 것인지 채현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기현이 자신 때문에 도현이 사고를 당했다는 죄책감에 빠져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기현의 탓은 아니었다. 기현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누가 사고가 일어나리라고 예상을 하고 움직일까. 사고란 것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사고라고 불리는 것이다. " 어쨌든 내 탓이니까." " 그게 어떻게 오빠 탓이야? 엉뚱하게 자기 탓하는 건 그만 둬. 지금 중요한 건 도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잖아. 설령 오빠 때문에 도현이가 사고를 당했다고 해도 지금은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된 거야. 이제 자책은 그만 해. 오빠답지 않아." " 도현이가 날 볼 때마다 반가워하면서도 왠지 꺼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다..." 채현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가족 중에서 언제나 도현에게 가장 많은 신경을 써준 것은 기현이었다. 기현과는 나이차이가 11살이나 나다보니 형이라기 보다는 젊은 아빠나, 나이 차이가 적은 친척 정도라고 도현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채현과도 여섯 살 차이가 나는 데다 도현이 학생일 때는 이미 형과 누나는 모두 대학생이거나 사회인이었기 때문에 형제 사이의 깊은 우애...를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도현은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뭘 어떻게 해서 도현 같은 아이가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도현은 다른 아이들 보다 훨씬 빨리 말을 배웠고, 조금 머리가 큰 다음에는 혼자서 외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10개 국어 이상 되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 점이 나이 차이 때문에 생긴 거리감 보다 훨씬 큰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피가 이어진 동생이라도 천재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제나 매사에 그렇게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말투도 도저히 그 또래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래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도현은 한씨 집안의 막내 아들이고, 아직은 어린 10대라는 생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사고 이후로 채현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사실 표정이나 행동만으로 보면 지금의 도현이 훨씬 그 나이답고, 어떻게 보면 보호해주고 싶은 막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채현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 하지만 지금은 말도 통하지 않고, 뭐가 어떻게 된 건 지도 모르지만...단 하나 다행인 건 도현이가 살아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거야.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완전히 달라졌어도 그걸로 좋아. 아직 도현이는 어리고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돼. 난 그렇게 하고싶다. 채현아." " 알았어....오빠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채현은 도현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채현 역시 도현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사람이 바뀐 것 같다고 느끼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비행기 사고로 도현이 죽어 버렸다면 지금 같은 고민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도하기도 한다. " 지금 가장 불안하고 힘든 건 도현이니까, 우리라도 옆에서 잘 지켜봐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줘야지. 가족이란 건 그런 거 아닐까?" " 알았어, 오빠...." 채현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도현이는 자고 있어?" " 조금 전까지는 자고 있었어. 아직 체력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한 달은 더 누워있어야겠지만.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가." " 응, 알았어." 채현은 버릇이 될 것 같은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쉬며 기현의 방에서 나와 건너편에 있는 도현의 방문을 살짝 두드렸다.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채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기현의 말대로 얼굴이라도 보고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리 도현이 이상해졌다고 해도 가족이 존재까지 부정해 버리면, 그걸로 끝인 거니까. 방안에는 주황색의 야간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 아래 놓인 침대 위에 채현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구부리고 잠이 든 도현의 뒷모습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겁을 먹고 있는 어린아이가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보여서 채현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역시 기현의 말이 맞다. 지금 가장 힘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도현일 것이다. 채현에게는 그런 도현의 불안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깊게 느껴진 것일 지도 모른다. 채현은 침대 옆에 살짝 걸터앉아 잠든 도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약간 땀이 배어나와 있는 이마를 닦아주며 채현은 겁먹은 듯 창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잠든 도현의 얼굴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이 가장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야 할 잠자는 순간에도 도현은 뭐가 그렇게 불안한 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미안해, 도현아." 채현은 작게 사과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잠이 든 줄 알았던 도현이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손끝으로 채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매달리는 듯한 도현의 얼굴을 보고 채현은 얼굴에 엷은 미소를 만들었다. " 왜 그래? 도현아.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니? 아니면 악몽이라도 꾼 거야?" 도현의 입술에서 작은 단어가 새어 나왔다. 루사...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채현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 뭐가 불안한데...? 응..?" 채현은 부드럽게 말하며 다시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아 도현을 안아 주었다. 도현이는 아직 17살이고 이렇게나 어린데, 자신은 대체 뭘 의심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현의 품안에 안긴 도현은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가끔씩 몸을 떨고 있었다. " 괜찮아. 이제 괜찮아. 계속 곁에 있어 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을 알아듣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채현은 몇 번이고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도현의 등을 쓸어주었다. 도현의 얼굴이 닿아 있는 어깨 부분이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채현은 가슴 한구석에서 둔한 통증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그것은 도현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기도 했지만, 채현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했다. 기현의 말대로 지금은 그냥 지금 이대로 도현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있고, 서로 적응할 시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 도현아..." 채현은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왠지 그 울림이 먼 곳으로 흩어져간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채현은 곧 그것을 잊어버린 채 도현을 단단히 안아 주었다. Part 7. dichotomy " 이제 그렇게 웃을 필요 없잖아?" 도현은 마차 건너편에 앉은 첼시피온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첼시피온은 자연스러운 표정처럼 얼굴에 배어버린 미소를 지우지 않고서 도현을 바라보았다. " 왜 화를 내는 거지?" 첼시피온의 질문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뉘앙스여서 도현은 기가 막힌 나머지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오리발 내밀고 싶냐? 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 너도 헛소리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네. 어딜 가던 그렇지.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모두 미개인이니까,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겠지. 그래, 어차피 나 내가 잘못 한 거야. 혼자서 착각하고, 혼자서 좋아했어. 됐지...? 이걸로 다 된거야. 너는 잘나신 왕자님인 거고, 나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이상한 사람이면 됐어." 첼시피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 도현,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 " 믿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부르지 마. 너라면 괜찮을 거 같아? 아니, 괜찮을 지도 모르지. 화도 안내고 항상 웃고 계신 왕자님이, 더군다나 천한 인간과는 다르게 요정의 피까지 섞이셨으니 사람들이 싸우고 내가 혼자 열내고 하는 게 웃기게 보이기도 하겠지." " 네 말을 믿지 않은 건 사과하지. 하지만 사람에겐 믿을 수 있는 범위라는 게 있는 거야. 게다가 난 사이드 공국 사람이고 넌 리카도 제국 사람이지." " 됐어, 너랑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고,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아. 어차피 난 혼자니까. 이제 와서 다시 그걸 깨달았다고 해도 상관없어. 슬프지도 않아."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첼시피온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계속 무시했다. 돌아가는 길에 같은 마차에 타고 싶지도 않았지만, 황태자까지 있는 앞에서 쓸데없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잠자코 마차에 올라탔다. 지금은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갈 곳도 없었고, 테이드가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언제 무슨 행동을 할 지 모르는 곳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테이드와는 진짜 형제도 아니지만 테이드가 보기에는 도현은 동생이다. 그런데도 그런 짓을 하다니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고 다리를 부러트렸을 정도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곳에 와서 알게된 사람들 중에 대체 도현을 믿어주는 사람이 몇 이나 있는지 아니, 있기나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나마 테이드는 도현을 끔찍하게 동생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가장 낫다고 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사실 유무를 떠나서 핏줄에 대한 집착은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기는 문제들은 모두 그 돌맹이 때문이다. 그놈의 신의 보석인지 뭔지 때문에 첼시피온이 다가온 것이고, 케이스워크 역시 도현을 쓸모 있는 무언가로 본다. ' 대체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도현은 마음속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이제는 음침하게 혼자 고민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밑도 끝도 없이 화가 나서 힘만 있으면 퍽퍽하고 모든 것을 다 깨부숴 버리고 돌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도현에게는 그런 뛰어난 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보통 사람보다 빠르게 언어를 익힐 수 있는 능력과 이곳에 와서 어쩌다가 얻게 된 신의 보석이라는 쓸모가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돌덩이 하나 뿐. 그것도 다른 보석은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도현이 가진 빛의 보석이라는 것은 치유의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 내가 무슨 자동 치료 자판기 같은 것도 아니고....' 기분 나쁜 것이 얼굴에 여실히 떠오른 도현의 얼굴을 응시하며 첼시피온은 진심으로 웃었다. 이제서야 도현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첼시피온의 진의를 알게된 후에도 도현은 여전히 첼시피온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화가 나서 소리지르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얼굴만 보면 조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어서 감정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곁에서 지켜본 결과 그렇지도 않았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감정 표현이 활발하지 않지만,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고, 표정에 다 나타난다. 첼시피온은 도현의 그런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도현과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리고 도현을 사이드 공국으로 데려가야겠다는 결심은 더욱 깊어졌다. " 쳐다보지 마. 얼굴 닳아."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도현이 차갑게 말했다. 첼시피온은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후로 아카데미에 도착할 때까지 둘 사이에서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현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창 밖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이틀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생겼으니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첼시피온은 비스듬한 자세로 기대앉은 도현을 의자에 길게 눕혀 주었다. " 정말 재미있어..." 첼시피온은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잠든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야윈 탓에 얼굴 윤곽선이 선명해 져서 날카롭게 느껴지지만 잠이 든 얼굴은 상당히 단정했다. 첼시피온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본능적으로 끌리는 아름다움을 가졌지만, 도현은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고, 조금은 괴롭히고 싶어지는 인상이었다. " 앞으로도 잘 해보자고. 친구." 들을 리 없는 도현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첼시피온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물어 가는 해가 서편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었으니까. 하지만...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서류를 처리하다 말고 생각에 잠겨 중얼거리는 케이스워크를 내버려 둔 채 스위드는 업무에 전념했다. 가장 당혹한 것은 다름 아닌 스위드였다. 라메르 백작부인의 뱃속에 있던 아기에게 마법을 건 것은 스위드였고, 마법은 성공적이었다. 라메르 백작부인이 임신한 것은 분명 황제의 아들이었다. 스위드는 그 사실을 몸 속에 흐르는 피가 전해준 힘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신의 보석 중에서 유일하게 한 가계에만 전승되는 어둠의 보석. 스위드는 그 어둠의 보석의 주인이었고, 어둠의 보석이 주는 힘이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세상의 전면에는 얼굴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권력자들과의 계약이라는 형식으로 세상에 나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우리 둘만으로 해 두지. 어차피 밝혀진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케이스워크는 스위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관찰했다. 스위드가 어떤 기분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스위드는 태어날 때부터 어둠 쪽에 해당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어둠의 보석까지 흡수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신의 보석을 자유 자재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확실히 보통 인간이라고 말하기 힘든 스위드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가볍게 보석의 힘을 다뤘다. 리카도 제국이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스위드의 모친으로부터 시작된 인연 덕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위험한 존재지만 스위드는 모친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케이스워크에게 감사하며 케이스워크를 주인으로 선택했다. 그 전에 스위드의 주인이었던 리카도 제국의 황제 페히너는 어린 아들에게 가장 커다란 힘을 빼앗긴 셈이었다. "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잠깐 아카데미에 가서 조사해도 좋아. 스위드." 그제서야 스위드는 서류를 처리하던 손을 멈추고 케이스워크를 응시했다. " 확실하게 알아내지 못하면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게 뻔하잖아? 넌 그런 성격이니까." " 허락해 주신다면 다녀오겠습니다." " 그래, 허락하지.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말라고." " 감사합니다." 스위드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밝혀내고 나면 뭔가 다른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 라딘의 자리에 있는 소년이 신의 보석을 흡수한 이상 본래 라딘이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가치는 없지만, 스위드는 이 믿을 수 없는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지 알아낼 결심을 했다. 도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침에 방에 나타나 말을 거는 첼시피온에게 기가 막히다는 시선을 던졌다. 마차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는지 어쨌는지 눈을 뜨니까 이미 기숙사에 있는 방안에 와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있고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첼시피온은 뻔뻔하게도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 첼시피온, 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거냐?" " 응?" 첼시피온은 길다란 쇼파에 앉아서 도현이 신관복을 걸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이 품이 넉넉한 신관복에 가려지자 이제는 흰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모습이 되었다. " 너한테도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이제 내 앞에서 사라져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도현의 말에 첼시피온은 조금 곤란한 듯이 웃었다. " 난 솔직히 지금 의욕상실이야. 정말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네가 내 기분을 알아? 말로만 아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아냐고." 대답도 하지 않고 웃기만 하는 첼시피온의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아서 도현은 옷을 다 입자 그대로 방에서 빠져 나왔다. 문 밖에는 연회장에서 쓰러진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했던 두 쌍둥이가 서 있었다. " 괜찮아?" 리올은 도현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도현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세차게 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중간에 가로막혀서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 잠깐, 도현." 한 손으로 문을 잡은 첼시피온이 비어있던 다른 한 손으로 도현의 오른쪽 어깨를 잡았다. " 이거 놔." 도현은 싸늘하게 말하고 나서 첼시피온의 손을 치워버리려 했다. " 나는 아직 할 말을 꺼내지도 않았어." " 듣고 싶지 않으니까 됐어." 도현은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두 걸음도 채 옮기지 못하고 도현은 억지로 멈춰야했다. 첼시피온에게 잡힌 어깨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 동안 도현은 리올과 카드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 것을 보았다. " 무슨...짓이야...?" 온화한 표정과는 달리 첼시피온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보였다. " 생각할 시간은 없었겠지만, 나는 대답을 그리 오래 기다릴 수는 없어." 첼시피온의 손안에서 피어오른 냉기는 점점 더 강해져서 어느새 몸의 반 이상이 냉기에 점령당했다. 도현은 굳어지지 않은 왼손을 들어 그대로 첼시피온의 뺨을 때렸다. 철썩하는 소리가 경쾌할 정도로 크게 복도에 울려 퍼졌다. " 사람을 마음대로 도구 취급하지 마!" 도현은 왼쪽으로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정면으로 되돌리는 첼시피온을 노려보며 눌러 붙은 것 같은 오른쪽 어깨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첼시피온의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 동생을 다시 아카데미로 떠나 보내고 나서 테이드는 평소와 달리 조금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은 상당히 쌓여 있었지만 오늘 테이드는 그쪽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잘 꾸며진 정원을 바라보았다. 폭풍처럼 마음속을 휘젓던 감각이 일시에 사그러들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라딘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테이드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라딘은 예전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소리치고, 테이드에게 대항한다. 처음에는 그런 달라진 라딘을 제대로 보려하지 않았던 테이드였지만, 이제 더 이상 라딘은 테이드의 손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작은 소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이제 라딘을 놓아주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그 생각과는 정반대로 격렬한 소유욕이 피어 올랐다. 라딘은 테이드의 동생이고 지금까지 17년 동안 보호해 왔다. 다른 사람 곁에서 웃고 떠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황제의 명령이건, 신의 보석이건 상관하지 말고 다시 되찾고 싶다. 두 개의 마음 사이에서 테이드는 갈등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조금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이 보여서 누구도 테이드가 격렬하게 상반되는 두 개의 생각과 싸우고 있으리라는 사실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 뭐가 그렇게 형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데? 전혀 형답지 않잖아. 첼시피온이 왕자라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야?"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라딘의 목소리. 처음으로 제대로 시선을 마주하고, 움찔거리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 얼굴로 라딘은 테이드를 형이라고 불렀다. 라딘의 진심이 담긴 표정을 본 것도 의외였지만, 몇 달 전 바닷가로 도망쳤을 때 이후로 이상한 말만을 꺼내던 라딘이 아니라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과 동생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문을 몰락시킨 미워해야 마땅할 존재도 아니고, 신의 보석을 품고 있는 중요한 존재도 아닌. 테이드와 라딘으로. 17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라딘의 존재를 깨닫고 그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될 줄이야.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테이드는 정원쪽으로 시선을 던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녹색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그러나 잘 꾸며진 정원의 풍경은 아니었다. 도현은 되도록 늦게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일부러 느릿하게 행동했다. 첼시피온과 학부가 다른 것이 다행으로 여겨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첼시피온은 왕족 주제에 자기 방에는 가지도 않고 언제나 도현의 방에 죽치고 있는 때가 많았다. 처음에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얼굴이나 친근감 있던 표정이 이제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면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현에게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게 해 놓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만은 믿어 줄 거라고 그 얼굴로 진지하게 말해 놓고서 사실은 조금도 믿고 있지 않았다. 첼시피온에 비하면 테이드가 백 배 낫고, 리올과 카드리는 정말 천사라고 도현은 속으로 이를 갈며 생각했다. 세상에는 정말 얼굴도 잘나고 마음씨도 고운 신의 대리인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 정말 노력했던 것이리라. 첼시피온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에게 천사 같은 마음씨까지 준다면 정말 생에 실의를 느끼고 자살 할 사람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테이드의 잘못이라면 너무 고지식해서 도현을 동생인 라딘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다는 것이지만, 첼시피온은 사람 좋은 척은 다 하다가 뒤통수를 때린 격이다. 도현은 첼시피온의 따귀를 한 대 날려주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았다. 얼굴이라도 안 본다면 화가 가라앉을 것 같았지만, 첼시피온은 꼬박꼬박 도현의 방에 들렀고 예전처럼 저녁을 준비해 주기까지 했다. " 라딘님." 상급생들과 함께 고대어 연구를 위해 빈 강의실에 틀어박혀 있던 도현을 누군가가 불렀다. 시선은 책을 향하고 있었지만 머리 속으로는 첼시피온에 대한 원한을 불태우던 도현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의실 입구 쪽에 신관부 전속 시녀 복장을 한 소녀가 서 있었다. " 무슨 일입니까?" 입구쪽으로 다가가며 묻자 그녀는 1층에서 친구들이 기다린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얼굴이 똑같이 생긴 두 명이라는 말에 도현은 리올과 카드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금방 간다고 전해주세요."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강의실에서 멀어지자 도현은 책을 펴놓고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 선배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도현을 조금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그들은 별 말 없이 내일 다시 보자는 인사를 건넸다. 7층이나 되는 높은 계단을 내려가 1층에 도착하자 건물 입구 계단에 앉아 있는 로브 차림의 소년 두 명이 도현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 맞아. 갑자기 그렇게 열심히 하는 척 해도 아무도 안 믿는 다고." 아무렇지 않게 건넨 둘의 말에 도현은 왠지 예전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도 친구는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소년들은 도현이 천재라는 사실을 떠나서 그냥 주위에 있는 보통 남자아이처럼 아무렇지 않게 툭툭 말을 내뱉곤 했었다. 그때는 그런 모습들을 기분 좋게 느낀 적이 없는데 지금은 일상적인 작은 대화 하나만 가지고도 추억을 떠올린다. " 왜 여기까지 찾아왔어? 또 식당에 같이 가자고 기다렸다고 말하진 않겠지?" " 넌 우리가 항상 먹는 것만 생각하는 줄 알아?" " 그럼, 아니었어?" 도현이 피식거리고 웃자 카드리는 금새 얼굴에 감정을 다 드러내고 도현을 윽박질렀다. 그렇게 웃고 떠들며 함께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 도현, 이제 와?" 기숙사 1층 입구에 거기만 다른 색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처럼 빛을 발하는 존재. 첼시피온이 서 있었다. 도현은 첼시피온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노골적인 태도 변화에 안절부절한 것은 오히려 당사자가 아닌 쌍둥이 쪽이었다. 뭔가 라메르 백작가의 저택에서 있었던 파티 이후로 둘 사이가 나빠진 것 같은데 정확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다. 연회장에서 도현이 쓰러지는 모습은 리올과 카드리도 목격 했지만,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오기 전에는 도현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 어서, 가자." 도현은 쌍둥이를 재촉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는 첼시피온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도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도현이 첼시피온의 따귀를 때리고 소리질렀던 그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그 동안은 평소대로 도현을 챙겨준다거나 했던 첼시피온이었지만 오늘은 어조가 심상치 않았다.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하자 첼시피온은 싱긋하고 웃었다. " 이제서야 날 보는 구나." " 결국 협박이 아니면 할 말도 없는 거야?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나는 이쪽 세상에 별로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능력도 없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느냐지, 누구에게 끌려 다니면서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하는 게 아니야." 리올과 카드리는 도현의 적의가 가득한 얼굴과 부드럽기 그지 없는 첼시피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절부절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도현은 저택에서 돌아온 이후로 물어도 대답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첼시피온에게는 말을 거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한동안 노려보듯이 첼시피온을 직시하던 도현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다시 계단을 올라 입구로 들어섰다. 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는 첼시피온을 카드리는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보았지만 도현의 뒤를 따라 기숙사 3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온 도현은 기분 나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쇼파에 앉아 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얼떨결에 도현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온 리올과 카드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쇼파에 앉았다. 한참 동안이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며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도현이 표정을 풀고 쇼파에서 일어난 것은 밖이 어둑어둑하게 물들었을 무렵이었다. " 무슨 일....있어?" 겉에 걸치고 있던 신관복을 벗어서 아무렇게나 의자에 던져 놓은 도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리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일은 항상 있었어..." 대답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건 것과는 달리 도현은 퉁명스러운 목소리이긴 했지만 등을 돌린 자세 그대로 대답했다. " 솔직히 이제는 포기하고 싶기도 해.... 하지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사람이란 그런 거 잖아.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어." 독백처럼 이어지는 도현의 말을 쌍둥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 형은....날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있고....첼시피온은 배신이나 하고....황태자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다 따져보면 모든 일이 꼬인 건 그 황태자를 만나고 나서 부터였어...사실...아카데미에서 한가하게 뭘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어....여기서 하는 모든 것들은 그냥 시간을 보내고, 집중하는 동안 복잡한 생각을 잊게 한다는 것 뿐이야." 도현은 신관복 안쪽에 입고 있던 셔츠와 바지 차림 그대로 다시 쇼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런 도현을 바라보며 쌍둥이는 뭔가 상당히 복잡한 모양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그저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말이나 대륙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에 제대로 보려고도 하지 않았었지만, 도현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달라던 라딘은 꽤 괜찮은 녀석이었다. "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카드리가 묻자 도현은 의아한 시선을 돌렸다. "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대륙에서 가장 부유해. 비록 귀족은 아니지만 재력만으로는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지. 원래 상권을 움켜쥔 사람이 강력한 법이잖아." 쌍둥이라서 마음이 잘 통하는 것인지 리올과 카드리는 번갈아 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대륙 곳곳에 저택이랑 별장도 있고, 상단 지점들도 상당히 많아. 너만 원한다면 그 중 한곳에 지낼만한 곳을 마련해 줄 수도 있어. 우리 소유로 된 저택이랑 별장도 몇 채 있거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쌍둥이의 얼굴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저 나이에 집이랑 별장이 있다니. 도현도 어린 나이부터 번역이나 통역 관련 일을 한 관계로 같은 또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통장에 모셔두고 있었지만, 이 경우에는 급수가 아예 다르다. " 너네 정말 부자였구나?" 도현이 놀란 얼굴로 묻자 카드리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 제국 명문 귀족인 네 입에서 그런 소릴 들을 줄은 몰랐는데?" 어차피 그건 내 자리가 아니야라고 대답하려 했던 도현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은 믿지도 않는 사람들을 위해 제대로 이야기를 해 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 어차피 다시 복귀한 건 몇 달도 안 됐잖아. 그 전까지는 허물어져 가는 낡은 저택에 살았으니까." 도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나서 어떤 지역에 저택과 별장을 가지고 있는 지 물었다. 대륙의 지도까지 그려가며 저택과 별장의 위치를 설명하던 리올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도현을 쳐다보았다. " 그런데 정말 다 버리고 숨어서 살고 싶어?" " 지금은 라메르 가문이고, 제국이고, 공국의 왕자고 하는 사람들과 다 떨어져서 지내고 싶어. 난 사람들에게 지쳤어." 그렇게 말하는 도현의 목소리가 너무도 힘이 없어 보여서 리올과 카드리는 저절로 수긍해버렸다. " 좋아. 그러면 우리 본가에 초청하는 형식으로 해서 이번 주말에 아카데미를 떠나고 그 후에 별장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해 줄게.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면 사고가 생겼다거나 누군가에게 납치 당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꾸미는 게 좋지 않겠어?" 리올은 즐거운 듯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며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역시 사람은 겉보기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도현은 가슴 깊숙이 새기며 쌍둥이들과 머리를 맞댔다. ------ 아카데미에서 발신된 편지를 손에 쥐고 있던 테이드는 한참 동안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인가 손에 있던 편지를 구겨버렸다. 별 생각 없이 라딘이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적혀 있는 편지라고 생각하고 펼쳤지만 내용은 조금도 테이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담고 있었다. 라딘이 실종되다니! 라딘의 친구중에 샤르코 상단의 두 아들이 있고 그들의 초대로 며칠 전 샤르코 상단의 본가에 방문한다는 연락은 받았다. 샤르코 상단 혹은 샤르코 가문이라 불리는 대륙 최고의 상인 집단. 비록 귀족은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가문의 이름을 듣고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 만큼 황금이 가진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고, 샤르코 가문은 제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그 이름을 유지해왔다. 라딘이 그런 샤르코 가문의 두 아들과 친분 관계를 갖게 된 것은 결코 가문에도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예전의 라딘이라면 다른 누군가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친구가 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 테이드님. 황태자 전하께서 황궁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아카데미에서 온 편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황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은 이미 라딘의 실종 소식이 황태자 케이스워크와 황제에게도 알려졌다는 것을 뜻한다. 테이드는 더 이상 고민 할 시간도 가질 수 없었다. " 황궁으로 떠날 준비를 서둘러 주게." 집사에게 명령하고 나서 테이드는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신의 보석의 주인인 라딘의 실종은 귀족 가문의 자제가 실종된 것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중대한 문제였다. 케이스워크는 라딘이 실종되었다는 샤르코 상단 본가 주변 지역에 병사들을 파견해 라딘의 흔적을 조사시켰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샤르코 상단의 쌍둥이 형제, 리올과 카드리는 황태자에게 직접 불려와 그 당시 정황을 말해야 했다. 그 자리에는 황태자의 명령으로 황궁에 들어온 라메르 가문의 주인이자 라딘의 형인 테이드도 동석하고 있었다. "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리올과 카드리는 그로트 아카데미 마법부 로브 차림 그대로 황궁의 알현실 중 한 곳에 들어와 있었다. 라딘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마자 바로 연락이 들어온 바람에 본가에서 아카데미로 돌아오자 마자 황궁에 소환된 것이다. " 어서 오게. 그러고 보니 지난 번 라메르 백작가의 연회장에서는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군." " 그때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니까요." 리올은 황태자와 테이드의 맞은편에 카드리와 나란히 앉아서 대답했다. " 부친의 안부라도 묻고 싶지만, 오늘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다음으로 미루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 경청하겠습니다." 도현의 앞에서는 그 나이 또래의 소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던 쌍둥이였지만, 황태자의 앞에서는 제대로 교육받은 귀족 자제처럼 예의 바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 보고는 부관을 통해 대충 들었지만 곁에 있던 사람만큼 자세한 정황을 알려주기는 힘들지. 라딘이 실종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게." "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틀 전, 라딘을 샤르코 가문 본가에 초대해 함께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를 출발했습니다. 라딘이 평소에도 상단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관심을 보여서 이번 기회에 가족들에게 소개도 하고, 상단을 안내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본가에 도착한 것은 아카데미에서 출발해 3시간이 지난 후였고, 저희는 라딘을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그 후 저택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어제 오후 다시 아카데미로 출발했습니다." 케이스워크는 주의 깊게 쌍둥이의 표정을 관찰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라딘의 실종과 가장 관련이 깊은 것은 쌍둥이임이 분명하다. 물론, 라딘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빛의 보석의 주인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라딘을 노리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사이드 공국의 첼시피온 왕자 역시 그런 목적으로 접근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행동을 할 만큼 어리석은 자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 케이스워크의 예상이었다. 아직 라딘이 신의 보석의 주인이 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힘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는데 섣불리 손에 넣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한 나라를 움직이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 ....영지를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마차가 마법에 의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저희도 학생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마법을 배웠기 때문에 마차 밖으로 뛰어 나가 적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적의 모습은 쉽게 찾을 수 없었고, 방향을 바꿔가며 공격만이 날아왔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리올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사가 마차를 공격했고, 덕분에 마차는 파손되고 말 두 마리는 죽고 두 마리는 다리를 다쳐 마차를 끌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결국 어쩔 수 없이 라딘과 함께 다시 샤르코 가문 본가로 돌아가기 위해 걷기 시작했을 때, 얼굴을 가린 여러 명이 나타나 라딘을 데려갔다는 것을 설명했다. " 그 집단은 몇 명이었지? 기억하고 있나?" 잠깐 기억을 되새기듯 고개를 숙였던 리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 정확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공격을 하던 자들은 검술을 익힌 자들이 다섯 명에, 마법사가 세 명이었습니다." 확실히 그 정도라면 아무리 우수한 학생들만을 받아들이는 그로트 아카데미 소속 마법부 학생이라고 해도 쉽게 상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저희 가문의 이름만 믿고 자만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호위를 특별히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샤르코 가문의 깃발이 걸린 마차를 공격하는 자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 그건 그렇겠지. 그 자들이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는 것은 확실하군. 그것도 그대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미리 조사해둔 것이 틀림없다." 카드리는 차분하게 앉아 있기는 했지만 눈빛이 상당히 초조해 보였다. 그리고 케이스워크는 그런 카드리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 조금만 기다리면 내 부관이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겠지. 아. 라메르 백작? 뭔가 묻고 싶은 것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테이드는 고개를 들어 차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리올을 응시했다. " 라딘이 다치기라도 했나?" " 마법 때문에 약간 부상을 입었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저희가 최선을 다해 라딘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아직 보석의 힘은 발휘할 수 없는 모양이군." 케이스워크가 끼어들여 작게 중얼거렸다. 긴 로브에 가려져 있었지만 쌍둥이도 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검사들까지 덤벼든 바람에 제대로 방어도 하지 못하고 라딘을 데려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대는 왜 한마디도 하지 않지....?" 케이스워크가 테이블 위만 바라보고 있는 카드리에게 묻자, 카드리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올렸다. 여전히 흔들리는 눈빛으로 카드리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 죄송합니다. 하지만...." 분한 듯이 이를 악물며 카드리는 말을 이었다. " 그 자리에 첼시피온 왕자님만 계셨더라도, 아니, 제 실력이 그 분 만큼만 되었더라면 라딘을 그렇게 데려가게 놔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드리는 황태자의 앞이라 겨우 감정을 참아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테이드는 뭔가 더 물으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금은 어떤 것을 물어도 결과는 같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사로잡혔다는 라딘이 돌아올 리는 없는 것이다. 케이스워크가 간간이 질문을 던지고 리올이 대답을 하며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은 훨씬 지났을 무렵, 알현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바로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등 뒤로 늘어트린 회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안을 눈으로만 훑어보고 나서 케이스워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 갔던 일은 어떻게 됐지?" 케이스워크가 질문하자 스위드는 케이스워크의 건너편에 멈춰선 채 대답했다. " 라딘님의 실종 장소를 조사한 결과 난전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법사 세명과 용병으로 여겨지는 검사 여섯명.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말이 묶여 있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스위드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게 보고를 이어갔다. " 상당한 실력을 갖춘 고위 마법사가 화계, 풍계, 수계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마법의 흔적만으로는 누구인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용병 길드에 연락을 취해 어제 고용된 용병들의 명단을 정리해서 넘기도록 처리하고 왔습니다." " 수고했다." 케이스워크가 말하자 스위드는 다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서 이번에는 케이스워크의 뒤쪽에 가서 섰다. " 그대들도 상당히 고전한 듯 하군." 케이스워크는 카드리의 손을 감싼 붕대에 시선을 던지며 말하고 나서 이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 다시 협조를 구해야 할 일이 있을 지도 모르니, 그렇게 알아두도록." "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쌍둥이가 인사를 하고 알현실을 빠져나가자 케이스워크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테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라메르 백작. 물론 동생을 걱정하는 백작의 마음은 잘 알지만, 이번 일은 라메르 백작가의 일만은 아니니, 라딘의 행방을 조금이라도 빨리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 감사의 말은 필요 없어, 백작과 나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아닌가." 테이드는 쓴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얼굴에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 백작도 이만 돌아가보는 게 좋겠군. 내가 갑자기 부른 탓에 일도 많이 밀려있을 테고, 동생 걱정은 덜어두도록 해. 내가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테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서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언제부터인가 황태자의 부관이 되어 있던 회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 스위드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불투명한 회색 눈동자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테이드의 가슴을 찔렀다. 문이 닫힌 덕분에 시선이 차단되었지만 테이드는 스위드가 결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라메르 백작가의 저택으로 되돌아가는 내내 테이드는 불안과 초조함에 시달렸다. 라딘이 자신의 의지로 도망을 친 적은 몇 번 있었다. 그 때마다 테이드는 뒤를 쫓아가 라딘을 다시 데려왔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라딘은 완전히 테이드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렸다. 라딘이 손목을 긋거나 도망쳤을 때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었다.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도망치기만 하는 라딘이 증오스러워서 일부러 날카로운 말만을 골라서 내뱉었다. 하지만....지금 라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타인의 힘에 의해 라딘이 사라져 버리자 테이드는 이전과 달리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공허였다. ------- 첼시피온은 지친 듯한 얼굴로 기숙사에 되돌아온 쌍둥이의 얼굴을 훑듯이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첼시피온이 앞에 있으면 편안하게 앉지도 못하던 쌍둥이는 상당히 지쳤는지 쇼파에 널부러지듯이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리올이 고개를 들어 올려 첼시피온을 바라보았다. " 무슨 일이신지는 알겠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합니다. 내일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떨까요?" " 아, 그걸 생각 못했군, 미안해." 첼시피온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순순히 물러났다. 첼시피온이 쌍둥이의 방을 빠져나가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쌍둥이는 조금전과 마찬가지로 잔뜩 방심한 듯한 자세를 유지한 채 쇼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카드리가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 첼시피온 왕자는 위험해...." 리올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쇼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겉에 걸치고 있던 검은색 로브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고 고급스러운 바지와 셔츠 차림으로 테이블로 다가가 컵에 물을 따랐다.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리올은 카드리에게 다가가 컵을 내밀었다. " 마셔." 카드리는 손만 내밀어 컵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 순수한 요정은 사람의 거짓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그게 동화였는지 제대로 된 기록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리올이 다시 쇼파에 주저앉았다. " 우리는 첼시피온 왕자가 그런 힘은 없길 바래야 하는 건가..." " 어쩌면 눈치채고 있을 지도 몰라. 최대한 증거가 남지 않도록 신경썼지만, 세상에는 그런 걸 쉽게 알아차리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쌍둥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지난 며칠은 그 둘에게도 상당히 피곤한 시간이었다. 단 며칠 사이에 모든 일을 꾸미고, 그럴싸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카드리는 부상까지 입었다. 카드리의 손에 생긴 상처는 용병의 검에 맞아서 생긴 것이었다. 물론 용병들은 그들이 고용주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공격한 것이 샤르코 상단의 마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직 이걸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부관이 말하는 것을 들었듯이 용병 길드에 연락을 취해 조사를 하다보면 단서가 발견될 수도 있다. 그 일에 쌍둥이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밝혀낼 수는 없어도, 아마 사람들은 가장 먼저 쌍둥이를 의심할 것이다. 쌍둥이가 보통 귀족이거나 그저 돈 많은 평민이거나 마법에 재능이 있어서 아카데미에 들어왔을 뿐인 학생이라면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리올과 카드리는 대륙 제일의 상단을 소유한 샤르코 가문의 아들이었다. 샤르코 가문의 아들인 덕분에 이번 일을 꾸밀 수 있었지만, 반대로 쉽게 의심을 벗을 수도 없다. " 하지만....라딘이 그렇게 즐거워하는 얼굴은 처음 봤어..." 중얼거리는 듯한 카드리의 목소리에 리올 역시 동의했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라딘은 납치되기 전까지 내내 즐거운 얼굴이었다. 첼시피온과 사이가 좋았을 무렵에도 그렇게 즐거워하는 얼굴은 보지 못했었다. " 뭐, 그러면 된 거지." 잠시 라딘의 얼굴을 떠올리던 카드리는 다시 중얼거리고는 비어버린 컵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 오늘은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쉬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르니까. 당장 내일만 해도 첼시피온 왕자와 대화를 나눠야 할 테니까, 쉬는 게 좋겠어." 지친 표정은 여전했지만 리올은 느릿한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다음 날. 쌍둥이는 마법 이론 강의실에서 첼시피온을 만났다. 학년 공통 수업인 관계로 같은 학년의 학생들을 이 수업에서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첼시피온은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갔을 때 쌍둥이에게 다가왔다. 첼시피온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 당시 상황을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카드리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고, 리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올이 며칠 전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첼시피온은 평소의 부드러운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듣고 난 첼시피온은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반대편을 응시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쌍둥이는 첼시피온의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요정의 피가 혹시 거짓말을 밝혀내는 것은 아닐까하는 노파심에 안절부절했했다. 하지만 첼시피온은 몇 가지 질문만을 더 하고 나서 고맙다고 말하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첼시피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카드리는 무겁게 한숨을 내뱉었다. " 역시 대하기 힘든 사람이야, 라딘은 그런데 어떻게 저 얼굴을 마주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을까..." 첼시피온은 누구나 인정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쉽게 타인의 호감을 얻지만, 그 외모는 사람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첼시피온이 푸른 눈동자로 얼굴을 직시하는 순간,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잊을 정도였다. 리올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필요한 말만을 했고, 지금은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 오늘 중으로 연락이 오겠지. 잘 도착했으면 그걸로 된거야. 우리 할 일은 끝난거지. 물론, 앞으로 남은 건 많지만..." 리올은 카드리에게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쌍둥이는 한동안 빈 강의실에 남아 있다가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지금 도현이 딱 그꼴이었다. 리올과 카드리에게 고용된 용병과 마법사들에 의해 납치될 때 까지만 해도 도현은 이제 드디어 해방이다라고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도현을 잡은 용병 중 한 명이 뒷목을 때린 바람에 기절했다가 눈을 떴을 때 도현은 묶인 굴비 신세가 되어 있었다. 다리는 멀쩡했지만 양손이 뒤쪽으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고, 얼마나 세게 묶었던지 밧줄이 닿은 부위가 아릴 정도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들은 도현을 풀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도현이 깨어나자 용병들 중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한 번 돌아보고 눈을 찌푸린 것이 다였다. 그들은 무슨 창고 같은 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현은 낡은 나무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앉아 조용히 남자들을 관찰했다. 손이 뒤로 돌려져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벽에 기댄 자세로 앉은 것이 무척 괴로웠지만 도현에게는 줄을 풀 수 있는 재주는 없었다.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도현이 있는 곳까지는 들려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낡은 데다 천장에 군데군데 구멍까지 뚫려있는 창고는 꽤 넓어서 수십 명은 너끈히 들어오고도 남을 것 같았다. 어쩌면 예전에 마구간이나 곡물창고 같은 용도로 쓰였을지도 모른다.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는 것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 6명 뿐이었다. 로브 차림의 마법사들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돌아갔던지, 아니면 다른 곳에 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뭐가 꼬여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도현은 알 수가 없었다. 리올과 카드리는 자신들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용병 길드에 의뢰를 했고, 그 결과 도현은 훌륭하게 납치 당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지정된 장소까지 도현을 데려다 주면 되는 것이 의뢰의 전부였는데,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그 의뢰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용병들은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에다 무기까지 가지고 있어서 묶여 있지 않더라도 도현이 그들을 때려눕히고 도망갈 수 있는 확률은 무척 희박해 보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용병들을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 거기 도련님?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건가?" 언제 고개를 돌렸는지 도현이 있는 쪽에서는 등밖에 보이지 않던 짧은 갈색 머리카락 남자가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얼굴은 그리 험악하게 생기지 않았지만,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서 귀족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 같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 귀족가의 훌륭한 도련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선 그런 신분 같은 건 아무런 소용도 없어. 도련님은 우리에게 붙잡힌 몸이고 어떻게 처리할 지는 우리 맘이지, 안 그래?" 남자가 묻자 용병들이 소란스럽게 웃어댔다. 갈수록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도현은 용병들이 도현을 원래 의뢰대로 정해진 장소에 데려다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병이란 돈을 받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집단이기는 하지만 용병으로 이름을 걸고 살아가려면 의뢰를 잘 수행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이 사람들에게 그런 신뢰라는 덕목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 당신들이 받은 의뢰는 나를 일정 장소까지 데려가는 것이었을 텐데요, 잔금을 받고 싶지 않은 겁니까?" 도현이 묻자 조금 전까지 도현에게 말을 걸던 남자가 피식하고 코웃음 쳤다. " 물론 그게 첫 번째 의뢰였지. 그게 궁금하셨나 보군?" 남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도현이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도현의 바로 앞에까지 걸어와서 멈춰선 남자를 도현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표정만 평범하면 그렇게 나쁜 인상도 아닐 것 같은데, 남자는 뭐가 불만인지 잔뜩 표정을 구긴 채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싸움으로 단련된 균형 잡힌 체격은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감탄성을 터트렸을 만큼 보기 좋게 발달되어 있었다. 어떻게 봐도 호리호리한 도련님 타입인 도현과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 용병은 돈으로 움직이지. 우리는 첫 번째 의뢰 말고도 두 번째 의뢰를 받았고, 돈도 이미 받았지. 단지, 문제라면 두 번째 의뢰가 첫 번째 의뢰랑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도겠지.." 의외로 순순히 말을 해주던 남자는 갑자기 허리를 숙여 도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 윽..." 머리가 뽑힐 것처럼 아파서 도현은 억눌린 신음 소리를 냈다. " 귀족 도련님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남자가 도현을 바닥으로 밀어 버리고 손을 떼자 이쪽을 지켜보던 용병들이 시끄럽게 웃어댔다. 도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여기서 입을 열어서 묶인 채로 두드려 맞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바닥에 쓰러진 도현을 내려다보며 남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 꼴 좋군, 도련님." 이걸로 확실히 이 남자가 귀족에게 원한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왜 그렇다고 도현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도현은 갈수록 꼬여 가는 현실이 기가 막혀서 웃을 수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카데미에 박혀 있는 것이 나을 뻔 했다. 도현은 사실 쌍둥이들이 마련해준 별장에서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누구도 도현에게 라딘이 되기를 강요하지 않고, 신의 보석 따위는 다 잊고서 얼마동안이라도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도현은 넘어진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래도 이곳은 도현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 -------- 쌍둥이에게 도현이 별장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달된 것은 이틀 전이었다.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쌍둥이는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태자와 첼시피온을 동시에 속여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움직인 일이었는데, 도현은 정말 실종이 된 것이다. 용병들이 아예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들이 배신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도중에 사고가 생겨서 그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용병들의 시체는 나오지 않았으니 그들이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도현의 실종 소식에 다시 길드에 의뢰를 하고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풀어서 알아보았지만 도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정말로 그 때 용병들에게 잡혀간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카드리는 버럭 하고 소리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르코 가문의 막강한 재력과 인맥을 전부 동원한다면 쉽게 행방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쌍둥이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더욱 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 누구지...? 누가 일을 꾸민 거지..? 첼시피온 왕자가?" 가장 처음 떠오른 것은 역시 첼시피온 왕자였다. 도현이 실종되고 난 후 쌍둥이에게 찾아와 사정을 묻긴 했지만, 그때는 알아차린 것 같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쌍둥이들 역시 첼시피온이 가진 잠재력은 알지 못한다. 모르는 척 하면서 쌍둥이의 마음을 읽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 황태자쪽도 무시할 수는 없어." 리올이 대답했다. " 황태자가 그럴 이유가 있나? 어차피 라딘은 제국 사람이잖아." 리올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든 경우를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 만약의 경우지만 라딘을 데려간 것이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라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어." 리올의 말에 카드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군수 물자가 대량으로 필요해지기 때문에 상단에는 오히려 이익이다. 하지만 쌍둥이는 친구가 그 전쟁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 어떻게 하면 좋지..?" 쌍둥이는 이틀 동안 계속 고민하고 있었지만 이렇다할 해결책은 낼 수 없었다. " 차라리....라메르 백작님에게 이야기할까..?" 그러다가 카드리가 꺼낸 말에 리올은 고개를 저었다. " 라메르 백작이 알게 된다고 해도 뾰족한 방법이 생길 리가 없잖아. 대륙에서 가장 발이 넓은 건 우리 샤르코 가문이야." " 그럼, 첼시피온 왕자를 떠보는 건 어떨까..?" 확실히 나쁜 방법은 아니었지만 위험하다. 만약 첼시피온 왕자가 도현을 데려간 장본인이 아니라면 오히려 반대로 사실이 알려질 위험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쌍둥이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카데미 소속 하녀가 방문을 두드리고 편지를 전달해 주었다. 편지를 받아든 리올이 편지 겉에 찍힌 인장을 확인하고 카드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 라메르 가문의 인장..." 그것은 테이드가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편지였다. 대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멀건 수프를 억지로 마시고 나서 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밧줄에 묶여 시달린 손목에는 보라색 피멍이 들어 있었다. 밧줄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나기도 했지만, 신의 보석 덕분인지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하지만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면 늘상 묶여 있었기 때문에 상처는 나아도 계속 생겨났다. 말 위에 푸대 자루처럼 얹힌 자세로 이동하는 것은 거의 고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내장이 뒤집힐 것처럼 울렁거리고 멀미가 났다. 며칠동안 말 등에 실려 이동하는 동안 옷에는 먼지가 묻어 전혀 깔끔해 보이지 않게 변했고, 제대로 씻지 못해서 얼굴에 먼지가 묻은 데다 몸도 찝찝했지만 용병들에게 씻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도 도현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데 거기다 대고 끌려가는 주제에 부탁을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도현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도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만 가득한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어쨌든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하는 것이 도현의 바램이었다. 수프를 비우고 지쳐서 벽에 기댄 채 늘어져 있던 도현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용병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 시선은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도현은 지친 탓에 멍해진 정신으로 이곳에 오고 나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험악한 용병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도 이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감이 너무 지나친 것도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이다. 낡은 백작가의 저택과 언제나 미소짓는 얼굴로 시중을 들던 리사, 말은 많았지만 그래도 도현을 걱정해 주던 주치의 노스. 형과 똑같은 얼굴을 한 테이드. 재수 없는 황태자와 위화감이 느껴지는 회색 눈동자를 가진 스위드. 아카데미에서 만난 유쾌한 쌍둥이 형제와 뒤통수를 친 첼시피온까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고, 가족들의 얼굴 역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만화나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멋지게 구해주는 일이 지나칠 정도로 빈번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생겨도 주인공은 든든한 아군을 잔뜩 데리고 있고, 주인공의 능력 또한 엄청나게 비범하다. 하지만 도현은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단지, 억울하게 죽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애써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옆구리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자 매일같이 시비를 거는 귀족에게 불만이 많은 용병이 도현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 뭐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거야?" " 뭡니까..." 도현이 지친 목소리로 묻자 용병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 어느 가문의 도련님인지 묻잖아?"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 쉬고 라메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용병의 얼굴이 눈에 띄게 변했다. " 뭐? 대귀족이다가 스캔들에 휘말려서 몰락했다가 얼마 전에 다시 복귀한 그 라메르?" 용병치고는 자세히 안다고 생각했지만, 곧 라메르 가문과 황실이 얽힌 스캔들이 대륙에 얼마나 소문이 자자한지를 떠올리고 도현은 그 생각 자체를 지워버렸다. " 그럼 도련님이 그 주인공인가...?" 용병의 얼굴은 상당히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귀족에대한 무조건적인 반발이 사라지고 곤혹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얼굴로 용병은 도현을 내려다 보았다. 원칙적으로 의뢰 조건에 일정 장소까지 이 귀족 소년을 데려가되, 신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는 귀족에 대한 반발심이 너무 커서 요구 조건까지 무시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 있는 지친 표정의 소년이 그 엄청난 스캔들의 주인공일 거라는 사실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한때 라메르 가문에 일어난 스캔들은 평민들에게까지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노골적으로 잘 됐다고 비웃는 사람들부터, 일반인의 손에도 닿지 않을 것처럼 먼 곳에 있던 귀족 가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대귀족이라도 황실에는 이기지 못한다고 혀를 차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라메르 백작가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 제도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하면 역시 라메르 백작가의 복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도현은 대답 없이 몇 번 고개만 끄덕여서 용병의 질문에 답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나는 사실 그 라메르 백작가의 도련님과 얼굴은 똑같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말해봤자 미친놈 취급만 당할 뿐이다. " 그럼...설마 지난 번 그게.....처음...나온 것...?" 험악하게 말을 걸던 용병은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도현에게 물었다. 질문이 이상하긴 했지만 도현은 대충 의미를 알아듣고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가엾은 라딘 도련님은 그 낡은 저택에서 17년 동안 갇혀 살았다고 했으니 거의 정신병자를 감금하는 수준인 것은 확실하다. 아마 도현이 그렇게 살았으면 정말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손목을 그은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용병은 한참동안 굳어진 얼굴로 도현을 내려다보다가 어느 순간인가 다시 모닥불 쪽으로 되돌아 갔다. 한참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용병들이 조용해 진 것을 보니 방금 들은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동정을 하건, 무시하건 그 과거는 도현의 과거도 아니니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의 용병이 다시 도현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그 줄을 풀어주지." 어차피 도현은 검을 쓸 줄도 모르고, 싸움에 이력이 난 용병들 틈에서 도망칠 만큼 특출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니 처음부터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겠지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의 팔을 단단히 묶고 있던 줄을 풀어주고 나서 그 용병은 다시 입을 열었다. " 나는 크리스." " 난 라딘 라메르." 도현 역시 짧게 대답했다. 도현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용병들은 라딘이라는 소년을 상당히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줄을 풀어주고 난 후에는 억지로 도현을 자리에서 일으켜 모닥불 근처에 앉게 하더니 여러 가지 질문을 해댔다. 특히 도현을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크리스라는 용병은 이제는 정 반대로 바뀌었다. 얼굴 표정만 봐도 상당히 불쌍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정도여서 도현은 헛웃음이 나왔다. " 내가 아무리 라딘 라메르라고 해도....네가 싫어하는 귀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도현이 그렇게 말하자 크리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 나는 동정은 질색이야. 처음 나온 외출에서 이런 일이 생겼지만...그건 사람들이 말하듯이 내가 불행을 부르는 아이라서 그런 거겠지?" 도현이 그렇게 덧붙이자, 크리스의 얼굴은 더욱 더 일그러졌다. 그런 얼굴 표정을 보면서도, 다른 용병들의 경직된 얼굴을 보면서도 도현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 죽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고, 몇 번이나 도망치기도 했었지만 나는 결국 되돌아가야 했어. 하지만...그게 어쨌다는 거야? 제도를 한참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이라지만 그 스캔들은 내가 일으킨 게 아니야. 난 그때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어린 애였어." 도현은 라딘의 입장이 되어 그렇게 말했다. 진짜 라딘이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는 말하지 않겠지만, 도현은 만약 그런 답답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절대로 죄인처럼 죽은 듯이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의 시선은 도현의 왼쪽 손목에 있는 흉터에 가서 멈춰 있었다. 처음 도현의 팔을 묶을 때 그 상처를 보긴 했었지만 그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귀족이라는 보장된 지위를 가지고 태어나서 평민들 보다 더 못한 삶을 산 라딘에게 크리스는 확실하게 동정심을 품고 있었다. 귀족들의 횡포를 지겨울 만큼 겪었지만, 같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던 소년에게 가지는 당연한 동정심이었다. 너는 귀족이지만 평민이고 용병인 나 보다 못하다는 그런 생각도 확실히 깔려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당당했다. 그런 과거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구김이 없어 보였고, 귀족다운 기품이 있었다. 평민을 쓰레기 취급하는 귀족이 아니라 정말 귀족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크리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테이드의 얼굴은 황궁에서 봤을 때와 별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조금 어두운 기색은 있었지만, 동생의 실종 때문에 초조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음 편하게 업무에 집중하고 있지도 않았다. 테이드는 차분하게 쌍둥이를 바라보며 한동안 인사말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평정을 잃고 있는 것은 쌍둥이 쪽이었다. 도현이 진짜로 실종되지만 않았어도 이런 감정을 느낄 이유는 없었겠지만 도현은 실제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그들로서도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 차라리 라딘의 친형인 테이드에게 숨겨두었던 사실을 알리고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리올과 카드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테이드는 쌍둥이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테이드의 목소리가 들리자 쌍둥이는 동시에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 기우라면 좋겠지만, 이렇게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닐 테니 바로 말하도록 하지." 리올은 고개를 끄덕였다. " 지난번 황성에서 황태자 전하와 자리를 함께 했을 때 들려준 이야기는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대로 이야기해줄 수 있나?" 역시라는 안도감과 이렇게 쉽게 들킬 정도로 자신들의 행동이 허술했던가 하는 자괴감 때문에 쌍둥이의 표정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 언제...눈치채신 겁니까?" 결국 리올은 더 이상은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태자에게라면 모를까 라딘의 가족인 테이드에게까지 철저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 사실...라딘을 빼돌린 것은 저희가 맞습니다. 라딘이 아카데미를 떠나고 싶어해서 잠시 별장을 빌려주기로 하고 용병길드에 의뢰를 했습니다." 리올은 순순히 테이드에게 숨기고 있던 사실을 설명했다. 그러나 대략적인 상황은 이야기 했지만 자세하게는 말하지 않았다. 장사꾼의 기본은 언제 어디서나 완전히 밑천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있었다. " ...그리고 얼마 전 라딘이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받고 일이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우리 계획을 눈치채고 이중으로 용병길드에 의뢰를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저희로서도 라딘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리올이 말을 마치자 테이드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정황만으로 미루어 보면 쌍둥이의 행동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특히 분한 듯이 말하던 카드리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미심쩍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쌍둥이가 만약 평범한 귀족이거나 단지 자질이 뛰어나 아카데미에 들어간 평민이었다면 의심을 하지 않았겠지만, 라딘의 친구인 쌍둥이들은 대륙 최고의 상단을 이끌어갈 샤르코 가문의 후계자들이었다. 그것이 테이드의 마음에 의문을 심어둔 것이다. " 완벽한 실종이라...." 테이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밝힌 사실도 어쩌면 거짓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일 수도 있었다. 테이드는 우선 쌍둥이의 말을 믿기로 했다. " 원하신다면 상단의 힘을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눈에 띌 테니 라메르 백작가에서 직접 움직이는 것으로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확실히 어렸을 때부터 상단의 후계자로서 교육을 받은 덕분인지 그 또래의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황에 밝았다. " 고맙지만 그건 거절하지." 테이드는 쌍둥이에게 샤르코 상단의 힘을 빌렸을 경우 당장에 황태자가 그것을 알아챌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라딘을 파티에 초대한 것도, 라딘에게 신의 보석을 보여준 것도 모두 황태자 케이스워크였다. 그가 그런 행동만 하지 않았어도 라딘은 이제까지처럼 조용하게 저택 안에서 지냈을 것이다. 가문의 부흥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겠지만, 그런 것 보다는 라딘이 곁에 있는 것이 테이드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집착이라고 말해도 상관 없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라딘은 테이드의 시선 아래 있었고, 그 사실은 계속 달라지지 않았다. 라딘이 없는 라메르 가문은 라메르 가문이 아닌 것이라고 테이드는 생각했다. "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이번 일은 저희들의 책임이 큽니다." 리올은 테이드에게 그렇게 말했다. 카드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테이드의 얼굴을 응시하거나 리올의 말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라딘과 테이드가 그리 사이좋은 형제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카드리는 조금 불만이었지만, 먼저 테이드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던 것은 카드리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라딘의 행방을 찾아내는 일이다. " 라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드리는 문득 생각지도 않게 질문을 던졌다. 말을 꺼내고 나서는 스스로도 놀랐지만 이미 꺼낸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테이드는 그 질문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카드리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 라딘은 내 동생이다. 피가 이어진 형제가 어떤 의미인지는 더 잘 알거라 생각하는데." 테이드의 표정에서 동생을 지극하게 생각하는 형제의 애정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리올도 카드리도 어느 한쪽이 없는 삶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늘 함께였고, 앞으로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해가 지고 뜨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 오늘은 무척 고마웠네." 테이드의 인사를 받으며 쌍둥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한적한 호숫가가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자리잡은 하나의 탑이었다. 10층 건물 정도의 높이를 가진 탑이었지만 주변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숲 때문인지 밖에서 보면 탑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도현 역시 처음에는 어떻게 해서 이곳에 이런 탑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 지 깨닫지 못했다. 분명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용병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은 도현에게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말은 해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밤에 잠이든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도현은 탑 꼭대기에 있는 방에 들어와 있었고, 주위에는 용병들은커녕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회색 벽돌로 이루어진 벽과 굳게 닫힌 문, 뛰어내리면 뼈도 추리지 못할 것 같은 높이에 나 있는 창문. 도현은 고개를 돌려 방안을 관찰했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해 보이는 침대와 벽 쪽에 위치한 가구 몇 개. 낡은 나무 테이블과 빛 바랜 붉은 천으로 감싸여 있는 의자 두 개. 그것이 방안에 있는 것들의 전부였다. 도현은 바닥에서 일어나 15평 정도는 되어 보이는 방 안을 몇 번이나 돌아다녔다. 굳게 닫힌 문을 밀어도 보고 당겨도 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창문이 하나 밖에 없는 탓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방안에는 벽마다 촛대가 걸려 있었고, 그 촛대에 꽂힌 초는 누가 불을 붙였는지 타오르고 있었다. " 여긴 또 어디야....." 도현은 망연한 표정으로 멈춰선 채 중얼거렸다. 용병들에게 들은 바는 없지만 갈 길은 꽤 먼 것 같았고, 어쩌면 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가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만약 도현에게 납치 당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원래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해도 믿었을 만큼 자연스럽게 탑에 당도한 것이다. 용병들에게 끌려가는 사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디라도 좋으니 하루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수도 없이 했었다. 그 생각은 묶여 있던 밧줄에서 풀려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그 종착지인 것 같은 장소에 도착하고 나자 생각했던 것만큼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이곳의 주인인 누군가가 나타나서 설명이라도 해 준다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도현은 멈춰선 자세 그대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결국은 침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틀 정도는 묶이지 않은 상태로 이동하고 잠도 잤다지만 노숙과 말을 타고 하는 이동에 익숙지 않은 도현에게는 피곤한 일이었다. 이 탑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으니까 지금은 휴식을 충분히 취해서 체력도 회복하고 제정신을 차려야 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현은 먼지 묻은 옷을 벗어 버리고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시트가 피부에 닿자 맨바닥에서 자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현은 서늘한 시트에 몸을 묻은 채 금방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피부에 따가운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직접적인 자극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지금 느껴지는 감각은 도현을 잠 속에서 돌아오게 만들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나서 도현은 촛불로 밝혀진 어둑한 시야에 적응하기 위해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밝기에 익숙해지자 이번에는 시선의 주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얼마 움직이지 않아 도현은 시선의 주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도현의 피부에 따끔거리는 감각이 느껴지게 만든 사람은 바로 침대 옆쪽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검은색 롱드레스를 입은 20대 중반이나 후반 정도로 보이는 미녀가 조용히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 저...." 아무래도 이 탑의 주인인 것 같아서 도현은 입을 열었지만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늘어트린 채 앉아 있는 미녀는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표정을 바꾸지도 않았다. 마치 인형처럼 그녀는 계속해서 관찰하듯이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이 탑의 주인이십니까...?" 도현의 질문에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던 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 혹시 저를 이 곳으로 데려오라고 의뢰하신 것이 당신입니까...?" 미녀는 이번에도 역시 고개만 끄덕였다.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지금 자신이 속옷 한 장 차림이라는 것을 깨닫고 시트에 몸을 만 채 침대 위에 앉았다. 기묘한 침묵이 이어지고 미녀의 시선이 거북하게 느껴질 즈음. 그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그 순간 도현은 온 몸을 감싸는 서늘한 기운 때문에 놀라서 그녀를 응시했다. 몇 분 정도 계속 몸에 느껴지던 서늘한 감각은 그녀가 다시 입술을 달싹이자 사라졌다. " 아..." 그리고 도현은 그녀가 방금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먼지에 잔뜩 더렵혀져 있던 피부가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깨끗하게 변했다. 그리고 머리도 감은 것처럼 무척 상쾌했다. 뭔진 모르지만 아마 마법 같은 것으로 도현을 깨끗하게 해 준 모양이었다. 직접 겪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도현이 살던 세상과는 시스템 자체가 다른 모양이었으니 이제는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 감사합니다." 도현이 인사하자 미녀는 여전히 아무 대답없이 앉아있다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녀는 상당히 키가 컸다. 아마도 도현 정도는 되거나 아니면 조금 더 클 것 같았다. 모델처럼 뻗은 늘씬한 몸매와 눈길을 잡아끄는 선명한 외모. 몸 윤곽을 감싸며 흘러내린 검은 색 드레스와 무릎까지 닿을 것 같은 긴 검은색 머리카락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무척 아름다웠지만 그녀는 왠지 보통사람과는 인종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한참동안 그녀를 쳐다보던 도현은 문득 이런 느낌을 언제 받았었나 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알아차렸다. " 스위드........" 도현이 중얼거리자 굳게 다물려 있던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스위드는 내 아들이다." 아들?! 도현은 굳어진 채 표정을 바꾸지도 못했다. 그런 도현의 경악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그녀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때가 되기 전까지는 이곳이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다." 얼굴과 나이의 갭. 그리고 그녀의 정체를 들은 탓에 놀란 도현은 그녀의 몸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도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한참 뒤에 침대 위에 무너지듯이 쓰러져 누운 도현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뭔가가 달라져 있을 지도 모른다고 반복해서 생각하면서. Part 8. Son of Witch " 네가 그렇게 떠난 후로 계속해서 널 기다렸다." 거울 속에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그 거울을 보고 있는 청년과 상당히 흡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차갑고, 위험한 느낌. 스위드는 굳어진 회색 눈동자로 거울에 비친 여인을 응시했다. 몇 년만에 보는 얼굴인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저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케이스워크의 손을 붙잡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무슨 일입니까." 한참 동안 말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던 스위드가 겨우 입술을 움직이자 미녀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던 얼굴이 화사하게 변화했다. " 이제 다시 돌아와야 하지 않겠니?" 상냥한 어머니의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 특유의 애정은 담겨있지 않았다. " 돌아가지 않습니다." 스위드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네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 말이 끝난 순간 거울 속에 비치던 여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희뿌옇게 흐려진 거울이 선명하게 바뀌며 다른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지금 막 일어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창백해 보이는 소년. 살짝 귀를 덮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가 거울 속에 비쳤다. 얼굴만 조금 닮았다면 아마도 스위드 보다는 저 소년, 라딘이 그녀와 모자관계라고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 자, 어떻게 하겠니?" 또 다시 거울에 비친 영상이 여인의 얼굴로 바뀌었다. 스위드는 지금까지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에 나타난 어머니를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이미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했었다. 스위드가 그녀를 싫어하듯이 그녀 역시 스위드를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는다. " 스위드, 내 아들." 스위드는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반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리 신의 보석까지 가지고 있어도 스위드는 결코 그녀를 상대할 수 없었다. " 언제까지 가면 되는 겁니까...." " 내일 저녁." 그녀는 다시 한번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돌아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벌인 일이었다. " 내일 찾아가겠습니다." 스위드가 감정이 사라진 얼굴로 대답하자 그녀는 천천히 미소를 지우며 스위드의 회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닮은 모자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스위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거울 속에 비치고 있던 여인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스위드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선을 가진 얼굴. 어머니와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 눈동자 색만이 그녀와 스위드를 구분해 주는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스위드의 눈동자는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와 같은 색이기도 했다. 무거운 한숨을 쉬고 나서 스위드는 거울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황태자 케이스워크의 부관으로 되돌아갈 시간이다. 온화해 보이는 표정을 만들어 내고 나서 방을 나선 스위드는 케이스워크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스위드가 집무실에 도착해서 책상 위에 올라온 서류들을 검토해서 분류하고 있을 때, 케이스워크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입구 쪽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과 시종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스위드 역시 고개를 숙여 황태자를 맞이했다. " 좋은 소식은 없나?" 화려한 의자에 앉으며 케이스워크가 묻자 스위드는 급히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케이스워크의 앞에 내려놓았다. " 내일부터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래?" 케이스워크는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그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스위드가 대답하자 케이스워크는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스위드에게 있어 어머니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은 케이스워크 밖에 없었다. " 얼마나 걸릴 지 예상할 수 있나?" 스위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 좋아." 스위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삐걱. 거북한 마찰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 문은 결코 밖으로 통하는 문은 아니었다. 도현은 실망감을 여실히 드러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라고 생각했던 두꺼운 나무문은 서재로 통하는 문이었다. 몇 번이나 시도해도 열리지 않던 문이 겨우 열렸다 싶었는데,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도현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벽에 유일하게 뚫려 있는 문이라고는 이것 하나 뿐인데, 이것이 출구가 아니라면 대체 도현은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것일까. " 제발 상식적인 것을 좀 보여줘..." 도현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낡은 책으로 가득한 서재로 발을 들여놓았다. 도현이 머물고 있는 방 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서재는 창문하나 나 있지 않았지만 밝았고, 높은 나무 책장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스위드의 모친이라는 아름다운 여인은 그날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이곳에 있는지 묻고 싶었고, 스위드의 어머니라고 했으면서 20대로 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누가 가져다 놓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식사 때가 되면 테이블 위에는 한 사람 분량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음식은 꽤 맛있어서, 도현은 잠자코 그것을 먹었다. 탑 꼭대기로 여겨지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면 도현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은 없었지만, 무슨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나 마녀에게 사로잡힌 소녀도 아닌데 탑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이러니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굳게 닫혀있던 장소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재에 보관된 책들은 먼지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도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책등에 적힌 제목을 훑어 보았다. 고대어로 된 책들이 대부분이었고, 도현이 읽을 수 없는 문자로 쓰여진 것도 있었다. 흥미를 느끼고 책을 펼쳐 보았지만, 외계 언어처럼 언어 구조가 너무 달라서 읽을 수가 없는 책이었다. " 그 책은 내 피를 이은 자가 아니면 읽을 수 없다." " 헉!"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도현은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릴뻔했다. 고개를 들어올리자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스위드의 모친이라는 미녀가 도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키가 컸다. " 아무리 언어에 재능이 있어도 익힐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 당신은....누구죠?" 도현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적힌 책을 덮어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 휘트린." 도현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으며 그녀는 대답했다. " 검은 마녀라고 불리기도 하지." " 마....녀..?" 요정도 있다고 했으니 마녀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도현은 다시 한 번 이곳이 비상식으로 가득한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어쩌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너는 이미 이곳에 묶여 있다." 마녀라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져 있던 도현은 이어진 휘트린의 말에 번쩍하고 정신을 차렸다. " 그게 무슨 말이죠?" " 신의 보석은 보석의 주인을 이곳에 귀속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신의 힘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지." 도현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벌써 두 번째로 듣는 말이었다. 희망을 아예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듯한 이 말은. "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반드시 돌아갈 겁니다." 한동안 바닥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도현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도현이 이곳에 왔으니 분명 돌아갈 방법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 일방통행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휘트린은 말없이 도현을 내려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도현은 눈으로 우아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무의식 적으로 쫓았다. "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자기 자신의 몫이니 관여하지 않겠다. 하지만 언제까지 진실을 가린 채 보려 하지 않을 수는 없지." 휘트린은 이곳에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신비한 사람이었다. 용병들을 움직여서 도현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그녀가 분명한데 도현은 이상하게 그녀를 미워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크리스라는 귀족을 싫어하는 용병에게 발로 걷어 차였던 상처나 밧줄에 쓸렸던 상처는 이미 깔끔하게 나았다.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미움을 받거나 본인도 아닌데 엉뚱한 사람 취급 당하면서 오해 받는 것도 이제는 질렸지만, 휘트린은 도현이 라딘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도현은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책장 귀퉁이로 돌아가는 검은 실루엣을 도현은 따라갔다. 익숙하게 서가를 누비며 휘트린은 몇 권인가의 책을 뽑아서 왼손에 들었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책들이 뿜어내는 특유의 종이 냄새를 맡으며 그녀의 뒤를 따르는 동안 도현은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도현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무엇을 배우라고 하지도 않고, 라딘이 되라고 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도현은 이곳에서 한도현으로 있을 수 있었다. 서가를 누비며 다섯 권의 책을 꺼내든 휘트린이 도현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 이것을 읽으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겠지." 그녀는 들고 있던 책을 도현에게 넘겼다. 상당히 두꺼운 책을 받아든 순간 팔이 휘청했지만 도현은 책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팔에 힘을 주었다. " 저...휘트린.." 그녀의 시선이 닿자 도현은 입을 열었다. " 이곳에 계속 있어도 될까요?" 비록 출구도 없는 방에 머무는 신세지만 도현은 마음 편한 장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너를 붙잡으려는 사람들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을 만큼 힘을 얻는다면." 대답을 듣고 도현이 그 말을 되새기는 사이 휘트린은 서재에서 사라져 버렸다. -------------- 휘트린에게서 받은 책을 열심히 읽고 있던 도현은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도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 스위드...?" 굳어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분명 저 특이한 회색 눈동자는 스위드가 맞았다. " 여긴 어떻게..." 도현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분명 휘트린은 스위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어머니가 있는 곳에 아들이 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눈앞에서 다시 확인하자 휘트린과 스위드가 모자간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겉모습으로는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둘은 상당히 흡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 오랜만입니다. 라딘님." 스위드는 짧게 인사말을 건네고 나서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 후에는 도현이 자기를 쳐다보던 말던 상관하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바닥만을 쳐다 보고 있었다. 도현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보여주던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스위드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황태자 케이스워크의 곁에 있던 스위드를 처음 만났을 때 눈동자나 분위기 덕분에 상당히 특이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다가 황태자에 대한 반감이 커지자 스위드가 황태자의 곁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에게서 호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 라메르 백작가에서 열렸던 파티 때에는 스위드의 이마에 떠올랐던 선명한 검은색의 문양 덕분에 도현은 이상한 경험을 했었다. 묻고자 한다면 도현이 스위드에게 건넬 질문은 상당히 많았다. 지난번 그의 이마에 떠올랐던 검은색의 문양이나,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아 보이던 스위드의 모친 휘트린의 일도 그렇고, 황태자에 대한 것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다문 채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스위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도현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인물이라고 여겼던 케이스워크보다 지금의 스위드는 훨씬 접근하기 어렵게 느껴졌다. 한동안 스위드의 고개 숙인 얼굴을 바라보던 도현은 결국 작게 한숨을 쉬며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휘트린이 서가에서 골라준 책들은 아카데미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신의 보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책과 신의 보석으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들이었다. 지금의 도현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내용이어서 도현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이곳에 데려온 것이 그녀라는 사실에 화도 나고 그녀가 스위드의 모친이라는 사실에 황당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타인이 자신에게 누군가가 되기를 강요하지 않는 다는 것이 얼마나 편한 일인지, 이름에 얽매이지 않아도 그냥 있는 그대로 자신을 봐 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그녀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만난 것도 얼마 되지 않고 이야기도 몇 번 나누지 못했지만 도현은 휘트린에게 호감을 느꼈다. " 스위드." 도현이 책에 시선을 떨군지 얼마 되지 않아 나지막한 휘트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과 스위드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몸의 실루엣을 드러내는 검은 드레스와 차분하게 늘어트린 긴 생머리. 화장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와 붉은 입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침착하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휘트린은 스위드에게 다가갔다. " 오랜만이구나." 겉모습만 보기에는 남매가 대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투만은 어머니가 자식에게 건네는 말투였다. " 오랜만입니다....." 스위드는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듯이 휘트린의 인사에 답했다. 케이스워크의 곁에서는 차분하기 그지없던 스위드였지만 지금은 왠지 그의 얼굴에서 그런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 이런 방법으로 저를 부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 네가 오랫동안 돌아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위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 그다지 키가 크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지만, 의자에서 일어선 스위드는 휘트린 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단정하게 뒤로 넘겨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은 휘트린 보다는 짧았지만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 저는 라딘님을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다른 용무는 없습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건네는 말치고는 말투가 지나칠 정도로 딱딱해서 도현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스위드를 응시했지만, 그들 모자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저 아이는 라딘 라메르가 아닌데도 단지 신의 보석을 품고 있기 때문에 데려가겠다는 것이구나." 휘트린의 말을 듣고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도현이었다. 도현은 입을 벌린 자세로 굳어진 채 휘트린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아예 자신이 누구인지 밝힐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어느 누구도 도현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확실히 질릴 정도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조금 이상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진실로 여긴다. " 지금은 라딘 라메르가 아니라는 사실 보다 신의 보석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누구인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스위드의 대답을 듣고 도현은 다시 한번 놀랐다. 스위드 역시 도현이 라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기대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그런 사실을 듣게 되자 도현은 기뻐해야 할 지 당혹감을 느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그렇게 하기 위해 널 부른 것이 아니다. 스위드." 휘트린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두 번이나 이어진 충격에 굳어져 있던 도현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망연하게 놀라고 있는 것도 잠깐이었다. 도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두 사람 사이로 끼어 들었다. " 어째서 제 이야기를 하면서 당사자를 빼 놓고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하는 겁니까?" 도현이 끼어 들자 휘트린의 눈빛이 흥미롭게 반짝였지만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도현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스위드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잠깐 도현을 돌아보았다. " 나는 신의 보석을 원한 적도 없고, 라딘 라메르가 되어 이곳에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내가 원래 있었던 것으로 돌아갈 것이고 지금은 이곳에 머물고 싶습니다. 이곳에 얽매일 이유 따윈 없어." 말을 하는 동안 도현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고 도전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도현의 말을 듣고 들려올 반응에 대비한 것이었다. 이곳 사람이 아니더라도 신의 보석을 가진 이상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거나 신의 보석은 제국의 것이니 당연히 황실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거나하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도현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맥이 빠질 정도로 싱겁게 스위드는 도현의 의사를 인정해 버렸다. " ....어째서...?" 오히려 그렇게 질문한 것은 도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언제나 도현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도현의 주장을 무시해왔다. 하지만 지금 대답은 전혀 도현이 예상하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 신의 보석은 신의 것이지 어떤 한 나라의 소유가 될 수는 없다." 해답을 들려준 것은 휘트린이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옮기는 도현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 내가 준 책에도 분명히 적혀 있었을 텐데. 신의 보석은 신이 지상에 남겨둔 분신이며, 그 보석이 선택한 주인의 의지를 따른다고. 처음 보석이 발견된 장소가 어디라고 해서, 그 보석을 보관하고 있던 것이 어떤 나라라고 해서 소유권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보석의 주인이 어떤 나라에 속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것은 도현도 읽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건 책에 적혀있는 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다. 분명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이 되는 것을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그것은 아무리 시대가 달라져도 장소가 달라져도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장소라면 변함없이 일어나는 자연현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 그러니까...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거야...?" 도현이 망연함이 섞인 목소리로 묻자 스위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 하지만....당신은...그 황태자의 부관이잖아?" 그 질문에는 스위드도 대답하지 않았다. " 스위드. 이 소년의 곁에 머물러라." " 휘트린." 스위드는 도현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휘트린에게로 돌렸다. 결코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분노가 깔려 있는 시선이었다. " 황태자에게 돌아가 수족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었느냐. 네 힘으로 어둠의 보석을 손에 넣고 힘을 키운 네가 겨우 그런 것에 만족하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구나. 네 몸 속에 흐르는 피가 주는 힘을 겨우 황제의 치부를 가리는 일에 사용하고, 황태자가 내민 손을 잡고 무릎을 꿇는 것이 스위드, 네 본래 모습이었느냐?" 지나칠 정도로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이었지만, 스위드의 얼굴은 그녀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균열이 이는 것처럼 조금씩 변화했다. " 날...그렇게 만든 것은...당신이었습니다. 휘트린." 스위드는 끊어내듯이 힘주어 말했다. " 난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네가 바라는 어머니가 될 수는 없다." 휘트린의 대답을 도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말이 스위드에게 타격을 주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스위드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자세한 사정은 전혀 알 수 없지만 두 모자 사이에는 도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골이 패어있는 것 같았다. 마녀라는 휘트린이 도현이 생각하는 그런 마녀인지, 그리고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이곳에서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떤 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스위드가 왜 휘트린의 앞에서는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인지도. 그러나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 소년과 함께 있거라. 스위드." 다시 한번 휘트린이 말했다. " 저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스위드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휘트린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차분한 얼굴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아 보이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모르고 오지는 않았겠지. 되돌아온 이상 네 힘으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대답하지 않았지만 스위드의 얼굴에는 그렇다는 대답이 나와 있었다. 정말 기묘한 모자관계라고 도현은 생각했다. 도현의 어머니는 사업가이기는 했지만 도현에게는 한없이 약했다. 늦게 낳은 막내이기도 했고, 자신이 낳은 아들이 천재라는 사실을 그녀는 조금 거북하게 느끼면서도 도현을 무척 아꼈다. 어머니에게 막내로서 애정을 표현한 적도 없고, 어머니의 애정을 행복하게 받아들인 일도 없었지만 지금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도현에게 어느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결코 스위드와 휘트린 같은 모자관계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고 도현은 자부할 수 있었다. " 신의 보석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거라." " 도움은 감사하지만...저는 특별히.." 도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 아무런 힘도 가지지 않고, 네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겠지? 이곳에서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많은 사람들이 널 노릴 것이다." 그녀의 말은 확실히 옳았기 때문에 도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하지 않았어도 이미 얻었고, 바라지 않았는데도 이곳에 왔고 이런 상황에 처해버렸다. 말로만, 마음으로만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애써봤자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도현은 시선을 스위드에게로 옮겼다. 스위드는 시선을 바닥으로 향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표정은 굳어진 채였다. "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주겠다. 스위드. 하지만 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뿐이다." 스위드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휘트린은 차분하게 아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현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의자에 털썩하고 주저 앉았다. ----------- 싸늘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스위드와 휘트린의 대화가 끝나고 휘트린이 공기 속으로 녹아든 것처럼 사라진 것은 도현이 의자에 주저앉아 책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던 시점부터 한참이 지난 후가 되어서 였다. 휘트린이 사라진 후에도 자리에 선 채 휘트린이 있던 자리를 가만히 응시하던 스위드는 도현의 시선이 닿은 것을 느끼자 그제서야 의자에 앉았다.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를 두고 앉아 서로를 마주보는 자세가 된 도현과 스위드는 처음에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 내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스위드는 휘트린과 그리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는데, 어떻게 된 거에요?" 스위드가 대답을 해 줄지 어떨지 알 수 없었지만 스위드는 의외로 쉽게 대답해 주었다. " 휘트린은 마녀입니다." " 마법사도 있는데 마녀가 어때서?" 도현이 묻자 스위드는 기묘한 시선으로 도현을 응시했다. 그것은 상식도 모르냐는 황당한 시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정말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듯한 시선도 아니었다. 순수한 의문을 가지고 질문한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한 듯한 그런 느낌을 주는 시선이었다. " 이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마녀가 휘트린입니다. 마녀는 마법사와는 달리 마법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마법을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피가 이어지지 않으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신과 비슷한 존재입니다." 스위드의 설명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마법을 본 적도 있고, 아카데미에서 마법으로 움직이는 시계나 마법과 관련된 물건을 많이 봤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면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닌가...?" " 저는 마녀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 어쩔 수 없잖아. 아이는 부모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나도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았어요. 마찬가지야. 세상엔 불가항력이라는 게 있으니까. 예전에는 믿지 않았지만." 스위드는 다시 도현을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궁금하시다면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신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위드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 흔한 이야기입니다. 사악한 마녀에게 납치 당한 공주를 구하기 위해 고심하던 왕은 전국에 공고를 냈습니다. 마녀의 손에서 공주를 구하는 자를 부마로 삼겠다구요. 많은 기사들, 용사들, 그리고 평민들이 마녀의 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주가 갇힌 탑 꼭대기에 이르기도 전에 마녀가 풀어둔 괴물들에게 죽거나 함정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훌륭한 용사가 마녀의 탑을 찾아갔습니다. 용사는 마녀가 설치해놓은 함정과 괴물들을 물리치고 공주가 갇혀있는 탑 꼭대기에 도착했습니다. 공주는 매일같이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지쳐 있었지요. 그러다가 용사가 나타난 겁니다. 공주의 얼굴에서 그림자가 가시고 용사는 공주에게 손을 뻗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마녀가 나타났지요. 마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용사는 마녀에게 반했습니다. 왕국의 부마가 되는 것 보다 용사는 마녀와 함께 어둠 속에 머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공주는 절망한 나머지 탑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었고, 용사는 마녀와 결혼했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도현은 스위드의 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입을 벌린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도현도 익히 들어온 뻔한 옛날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림 동화 같은 것에 자주 등장하는 마녀와 공주, 용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도현의 예상대로 전개되지 않았고 그 이야기의 어디가 흔한 이야기인지. 그리고 스위드와 휘트린이 보통의 모자 관계와는 다른 이유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 그....이야기의 어디가 흔하다는 말....?" 결국 도현은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스위드는 표정하나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도현을 응시했다. " 이제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입니다." 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약속은 서로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이 세상에서 도현이 라딘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 두 사람은 바로 스위드와 휘트린 뿐이었으니, 말한다고 해도 손해볼 것은 없었다. 도현은 간단하게 도현이 살고 있던 세상에 대한 것과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간단하게라고는 해도 스위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30분이 걸려서야 대략적인 설명을 마칠 수 있었다. 스위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도현의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당장에 모든 것을 믿는다른 말을 기대하고 있지 않던 도현은 자신이 관심 있는 화제 쪽으로 말을 돌렸다. " 그런데 정말 마녀라는 건 대단하기는 한가봐요. 내가 라딘이 아니라는 사실도 한번에 알아차리고." " 마녀라면 한 번에 그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본질을 보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스위드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도현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 저 역시 얼마 전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 혹시...그 때 연회장에서?" 도현이 묻자 스위드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휘트린의 말과 지금까지의 정황을 미루어 짐작한 것이었는데 맞아 떨어졌다. " 라딘이 황제와 닮지 않도록 만든 것은 저였습니다. 라메르 백작부인이 아이를 가졌을 때, 그 아이가 황제의 아이라는 사실은 단번에 알았습니다. 나는 그 당시 황제의 명에 따라 라메르 백작부인의 아이에게 마법을 걸었고 아이는 백작과 백작부인을 꼭 닮은 외모로 태어났습니다. 연회장에서 그때 걸었던 마법을 풀었는데 당신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알아차린 것입니다." " 그 스캔들에 대한 얘긴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마법을 걸지 않았더라도 라딘은 원래부터 검은머리에 검은 눈으로 태어났을 지도 모르는 일인데. 원래 검은색은 우성이라서 금발과 결혼하면 검은 머리가 태어날 확률이 훨씬 높아요. 이쪽에선 유전이나 그런 건 모르겠지만. 스위드도 어머니의 머리카락 색을 물려받았잖아요. 아버지는 무슨 색이었는데요?" " 은색." " 그것 봐요." " 마녀의 피는 무엇보다 진합니다." 마녀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하게는 모르고 있으니 도현은 스위드의 단정적인 말에 그냥 그러냐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도현은 도현 대로 스위드는 스위드 대로 생각에 잠겨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도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 아직도 날 황태자에게 데려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스위드는 고개를 들어 도현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이 곳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 억지로 데려간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안 갈 거니까 그것만은 알아둬요." 기묘한 침묵 속에서 도현과 스위드는 다시 각자의 침묵 속으로 되돌아갔다. 첼시피온은 페르마 대공왕이 보낸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작게 투덜거렸다. 늘 온화하게 미소짓고 있는 표정만을 보여주는 첼시피온 치고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충분히 첼시피온의 표정을 바꿀 만한 것이었다. 라딘을 데리고 사이드 공국으로 가고 있던 용병들이 라딘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취해 왔다는 것이었다. 쌍둥이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이중으로 의뢰를 한 것은 첼시피온 이었다. 일은 잘 진행되어 용병들과 함께 라딘을 납치한 마법사들은 의뢰를 성사시키고 떠났고, 용병들만이 두 번째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였다. 쌍둥이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일은 잘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간에 갑자기 누군가가 라딘을 가로챈 것이다. 라딘을 데려가는 일이 아니라면 첼시피온이 아카데미에 들어 올 필요도 없었겠지만, 당분간은 이곳에 남아있어야 할 것 같았다. " 핀, 잠시 나갔다 오겠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첼시피온이 말하자 아카데미까지 따라온 시종장 핀은 재빨리 겉옷을 준비해 첼시피온에게 입혀주었다. " 조심해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첼시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재빠르게 마법 주문을 외웠다. 첼시피온이 딛고 있는 바닥에 눈부신 은색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고, 마법진은 첼시피온의 몸을 감싼 채 환한 빛을 뿜어냈다. " 어서 오십시오." 빛이 사라진 후 첼시피온이 서 있는 장소가 달라져 있었다. 기숙사에 있는 왕족 전용 방이 아니라 용병길드 마스터 센터 입구에 선 첼시피온은 늙은 용병의 인사를 받으며 길드 마스터의 방으로 들어갔다. 인사를 나누며 의자에 마주 앉고 나자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길드 마스터가 사과의 말을 건넸다. " 일이 실패한 것에 대해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저도 처음 겪는 것이라." " 자세한 경과를 들려 주시겠습니까?" 차분한 얼굴로 말하자 길드 마스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페르마 대공왕으로부터 받은 편지의 내용과 거의 같았지만 훨씬 자세했다. 라딘을 데리고 이동하던 용병들은 산길을 이용해 이동해서 무사히 제도를 빠져나간 후 국경을 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낡은 폐가에 머물면서 밤을 보내던 사이 갑자기 이유도 없이 모든 용병들이 잠 속에 빠져들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다음날 아침이 된 후였으며, 라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첼시피온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해도 예민한 감각을 가진 용병들의 눈을 피해 마법을 거는 것은 불가능했다. 길드 마스터가 말한 것처럼 용병들이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잠이 들게 만드는 것 따위는 더더욱. 아무래도 사이드 공국 이외에도 많은 곳에서 라딘을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가하게 다른 곳에서 라딘을 데려갔군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누가 비밀스럽게 추진했던 계획을 알아차리고 용병들을 소리 없이 잠재우고 사람을 데려갈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녔는지 알아 내는 것이 중요하다. " 마법사들의 소견은 어떻습니까?" " 수면 마법이 사용된 흔적은 없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첼시피온은 길드 마스터와 이야기를 나누며 누가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이렇다할 수확을 얻을 수는 없었다. "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첼시피온은 길드 마스터의 방에서 빠져 나와 용병 길드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밖을 돌아다니면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대륙을 움직이는 다섯 명의 실력자라 불리는 사람들은 예전부터 물 밑에서 신의 보석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다.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대륙의 정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신의 보석이라는 특별한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의 용의선상에 있지만, 첼시피온은 이번 일 만큼은 그들과 관련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도현..."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내뱉으며 첼시피온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날카롭게 가시를 세운 듯한 말투로 노려보며 말하던 도현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 꼭 이런 거 외워야 되는 거야?" 한참동안 비 맞은 중이 중얼거리듯이 입 속으로 주문을 외우던 도현은 주문이 발동되기 바로 직전에 주문을 멈춰버리고 스위드에게 물었다. " 그렇게 중간에 주문을 멈추시면 안됩니다." " 말 편하게 하라고 했잖아. 나이도 훨씬 많으면서 존댓말까지 들으면 내가 불편해." 도현은 길어져 버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지만, 스위드는 그 말에 대해서는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지난 한 달 동안 스위드는 도현이 끊임없이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댓말을 고집했다. 한국에서라면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말을 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정치가나 대기업 간부쯤 되어야 나이 많은 사람에게서도 존댓말을 듣는 법인데, 스위드의 고집은 알아주어야 할만한 것이었다. " 뭐, 맘대로 해." 결국 손을 든 것은 도현이었다. 그로트 아카데미에 머물던 짧은 기간 동안 도현은 신의 보석 중에서도 빛의 보석에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억지로 신관부에 들어가서 신학을 배워야만 했다. 다른 보석은 몰라도 빛의 보석은 치유의 힘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 교수들이나 학자들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휘트린의 탑에 끌려와서 지내게 된 이후로 도현은 스위드에게 마법을 배우게 되었다. 스위드는 처음에는 휘트린의 말을 거절했지만 결국 지금은 도현에게 마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도현은 어떻게 보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 있는 것이 도현이 아니라 라딘이었다면 라딘은 자신을 17년 동안 괴롭게 만든 원흉에게 마법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검은색이 우성인자이기 때문에 어찌 되었던 간에 태어난 아이는 금발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지만 이곳 사람들이 마법에 대해 가지는 확신은 맹목적인 신앙과도 비슷해서 어떤 설명으로도 통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계가 다르니 도현이 가진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해도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리고 스위드에 대한 생각은 라딘을 불행하게 만든 원흉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도현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스위드는 황태자 케이스워크의 부관이었고, 도현을 파티에 초대해 신의 보석을 보여준 것은 바로 그 둘이었다. 신의 보석만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도현이 이런 지경에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약간 자유로워진 것은 마음에 들지만 신의 보석이 몸 속으로 들어가는 일만 없었어도 도현은 지금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되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일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생각하며 고민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다고 도현은 생각했다. " 주문의 중요성은 이제 와서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되지만,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주문입니다. 말의 위력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법사가 하는 말은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될 만큼 무겁습니다." " 네네." 도현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다시 입 속으로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지금 도현이 배우고 있는 것은 지면에 신의 힘으로 성역을 만드는 것이었다. 영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신나게 때려부수고 하는 힘은 도현이 흡수한 빛의 보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도현이 할 수 있는 것은 광범위 치료 마법, 공간이동 마법, 광원 마법 등이었는데 그나마 치유와 관련 없는 것이 광원마법이었다. 지상에 빛을 불러내는 것이었는데, 빛의 세기는 도현이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마법이라도 써서 도망가야겠다고 도현은 결심했다. 지금은 마법을 배운지 한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은 첼시피온이 보여준 수준이나 스위드가 보여주는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도현은 뭔가 할 수 있는 게 생겼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도현이 가진 언어 능력만으로도 평생 아무런 부족함 없이 살았을 테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파앗. 도현의 입 속에서 주문이 완성되자 바닥에 흰색으로 빛나는 마법진이 그려지고 복잡한 문장으로 채워진 마법진은 점점 크기를 넓혀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된 마법진의 크기는 열 사람 정도가 들어가서 여유 있게 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어있었다. 마법진의 위력을 시험하기 위해 스위드가 자신의 팔에 상처를 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기 몸을 찔러대는 스위드에게 경악했었지만 지금은 무덤덤하게 그 광경을 쳐다볼 수 있게된 도현이었다. 스위드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들고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자 빛의 세기가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스위드의 팔에 생긴 상처는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자기가 불러낸 마법진의 효과였지만 도현은 아직도 그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 조금 더 연습하면 이보다 훨씬 더 큰 마법진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 해제 주문을 작게 중얼거렸다. 마법에 사용되는 언어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언어와 달랐지만, 스위드가 가르쳐 주는 주문은 아카데미에서 마법부 학생들이 사용하는 주문과도 달랐다. 도현은 그것이 신의 보석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세한 내용을 묻지는 않았다. " 황태자님이 걱정하고 있는 것 아닐까? 유능한 부관이 돌아오지 않아서." 스위드는 그 말을 듣자 도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전에 황태자와 함께 있을 때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도현은 이 탑이 스위드를 달라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니면 휘트린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스위드는 이곳에서 유능한 황태자의 부관이라기 보다는 도현이 상상하던 마법사라는 이미지에 더 맞아 들어갔다. 언제나 사색하는 듯한 분위기와 가르칠 때 보여주는 열성을 보면 스위드는 확실히 유능한 선생이었다. " 답답하기는 하지만 난 이곳이 지금까지 있던 어떤 곳보다 훨씬 마음 편한 곳이라고 생각해." 도현이 화제를 바꾸자 스위드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 한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곳에서 뼈에 사무칠 만큼 배웠거든." " 어떨 때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스위드가 건넨 의외의 말을 듣고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한 장소에 같이 머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스위드가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뭐가?" " 핏줄이라는 것은 생각이상으로 무척 견고해서 쉽게 떼어버릴 수 없으니까요." 도현은 스위드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위드의 말은 도현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떨어져 있기 때문에 비로소 느끼는 혈연의 견고함. 그리고 그리움. 스위드와 휘트린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는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도현은 그들의 그런 관계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 그럼 난 스위드가 부럽다고 해야하나?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것과 원하지 않는데 함께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게 더 불행할까?" 도현은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스위드는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게 느껴질 시간이었지만 도현과 스위드는 둘 사이에 묘한 연대감이 생겼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라메르 백작가의 하루는 제도로 옮겨온 이후로 늘 변하지 않았다. 많은 수의 하녀들이 저택을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많은 손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저택을 방문한다. 라메르 백작가의 주인인 테이드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집무실로 들어가 검토가 필요한 서류들을 훑어보았다. 언제나 처럼 딱딱해 보이는 표정으로 일 처리에 열중하는 얼굴을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이미 라메르 백작가의 둘째이자 신의 보석의 주인인 라딘 라메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어디에서도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테이드는 몇 번이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라딘을 찾아 나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한 번도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라딘의 행방을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테이드에게는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더욱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라메르가라는 이름.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제도의 귀족. 라메르라는 이름을 지키는 것은 테이드에게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라메르가가 몰락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던 17년 전부터 이제는 예전의 영광을 되찾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은 채 테이드를 지배하는 가장 강한 힘이었다. 라메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테이드는 라딘에게 모든 증오를 쏟았다. 라딘을 미워하는 것으로 다른 것을 잊을 수 있었다. 17년이 지나는 동안 테이드는 자신의 비틀린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라딘의 존재가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나자 그제서야 라딘이 어떤 의미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가문이 몰락한 후에도, 부모님의 죽음 이후에도, 루사벨라가 결혼을 하고 백작가를 떠났을 때도 테이드의 마음을 지탱해 준 것은 라딘의 존재였다. 미움은 17년 동안 쌓이고 쌓여 다른 감정을 낳았다. " ...백작님?" 언제 들어왔는지 노스가 의아한 얼굴로 테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치의인 노스가 왜 집무실에 나타났는지 잠시 생각하던 테이드는 약에 관련된 일로 자신이 어제 노스를 불렀다는 사실을 생각해냈다. " 아, 이걸 보고 필요한 약품을 기입하도록 해." 테이드는 약품 목록이 적혀있는 종이 몇 장을 노스에게 건넸다. 이전에는 고용인들의 숫자가 적어서 대량으로 약품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백작가의 규모가 커져서 노스가 해야할 일이 늘어난 것이다. " 조수가 필요하지는 않나?" "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지금은 리사가 절 돕고 있습니다. 라딘님의 일로 리사와는 호흡이 잘 맞거든요." 테이드는 라딘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잠시 굳어졌다. " 요즘 일이 많으신 것 같은데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 지 모르겠군요. 제가 말씀 드린 대로 휴식은 취하고 계십니까?" " 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테이드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바꿨지만 노스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 괜한 말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백작님처럼 타인의 위에서는 분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이 건강이라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테이드는 새삼스럽게 노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고 편안한 외모를 가진 갈색 머리카락의 청년은 벌써 10년 이상이나 라메르 백작가의 주치의로 일해왔다. 평민이지만 10년전 몰락해서 이름뿐이던 라메르 백작가에 주치의로 온 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테이드와 동갑인 청년. 다시 과거의 지위를 되찾은 지금이라면 더욱 실력 있는 의사를 고용하거나 마법사를 고용해도 될 정도지만 테이드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고용된 의사라고만 생각했지만 노스는 지금까지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지금도 테이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동안 대체 자신은 무엇을 보고 살아왔던 것일까. 테이드는 밀려드는 자책감을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책상 위에 흐트러진 종이 위로 시선을 옮겼다. ------------- 오랜만에 본가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쌍둥이들 앞에 도현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의 일이었다. 책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린 리올은 거울 속에 비친 낯익은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트린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리올은 굳어진 자세 그대로 거울을 응시했다. " 리올? 왜 그래? 갑자기 책은 왜 떨어트려. 졸기라도 한 거야?" 책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리올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걸던 카드리는 놀란 듯이 굳어진 리올을 보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카드리도 리올과 같은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며 굳어져야 했다. " 라...딘..?" 카드리는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거울 속에서 미소짓고 있던 도현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 도현이라고 했잖아? 기억력이 상당히 안 좋네?" " 어떻게 된 거야...?" 도현의 삐딱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린 리올이 묻자 도현은 싱긋하고 웃었다. " 아무래도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아서 연락하는 거야. 거울을 통해서 만나고 싶은 사람 앞에 나타나는 마법은 고난도의 마법이라면서?" 도현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리올은 그저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 지금 신세지고 있는 곳에 계신 마법사 덕분에 이렇게 연락을 하는 거야. 나는 잘 지내고 있어." " 지금 어디야?!" 카드리가 소리치자 도현은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 아아, 귀아프네. 그렇게 말 안 해도 잘 들려. 여기가 어디냐고?" 웃으며 되물은 도현은 나도 몰라라고 덧붙였다. 허탈해진 쌍둥이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자 도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당장이라도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행방조차 알지 못했던 도현의 건강한 모습을 보자 화를 낼 기운도 다 빠져버렸다. "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지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번에는 리올이 물었다. " 용병들이 약속한 대로 너희 별장에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더라구. 또 의뢰를 받았다면서 처음에는 묶여서 끌려갔지." 도현은 대략적으로 휘트린의 탑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 말을 들으며 쌍둥이는 심하게 얼굴을 구겼지만 이미 지난 일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정상 어디에 있는지 밝힐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머물던 어느 곳보다 훨씬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쌍둥이는 어느 정도 안심한 듯 했다. " 형에게는 연락할 생각 없어?" 카드리가 묻자 도현은 살짝 표정을 굳혔다. " 너희만 알고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실종된 걸로 해 두고 싶어." " 사실 라메르 백작님께는 네 실종에 우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어. 계속 숨기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잠시 후에 고개만 끄덕였다. " 나는 라딘 라메르로서 살 생각도 없고, 신의 보석을 가졌다고 어딘가에 얽매여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아카데미에도 다닐 생각은 없어.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거야." 굳게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나서 도현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 돌아가기 전까지는..." 리올과 카드리는 도현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어떤 말을 해도 결심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가끔은 연락해 줘." 리올은 웃으며 말했다. " 그래. 이곳에 와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너희들과 친구가 되었다는 거야." " 하하." 쌍둥이는 웃었지만 그것은 겸연쩍은 마음에서 나온 웃음이었다. " 거기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우릴 찾아와." 도현은 카드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잘 있어." 그렇게 말하고 미소짓는 도현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이별을 고하는 것처럼 보여서 쌍둥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거울 속에 비친 도현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 보다 훨씬 좋아진 듯한 얼굴. 창백해 보이는 피부색은 여전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던 몸도 어느 정도 정상으로 되돌아온 듯 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정말 지금 머물고 있는 그곳이 도현에게는 편한 장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울 속에 비치고 있던 도현의 영상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거울은 평상시대로 되돌아와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는 쌍둥이의 얼굴을 비췄다. " 가 버렸네..." " 그래..." 진이 빠진 것처럼 쌍둥이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힘없이 웃었다. " 고마워요, 휘트린." 거울 속에 비치던 쌍둥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도현은 미소 띈 얼굴로 휘트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 그런데 이제는 말해줘도 되지 않나요?" 도현을 응시하던 휘트린의 눈동자에 희미한 감정이 끼어 들었다가 사라졌다. " 뭘 말이지?" " 저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 말이에요. 다른 세상에서 온 소년이 얼굴이 똑같다는 이유로 여기 저기에 휘둘린다는 사실이 가엾어서 데려온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세상에 완벽하게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휘트린은 처음으로 활짝 미소지었다. 평소에도 무표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무거운 듯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웃고 있었다. 마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휘트린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보이는 것인지 도현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누나 같기도 했고 어머니 같기도 했고, 때로는 지상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여신 같기도 했다. " 원한다면 사실을 말해주지. 스위드가 되돌아오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널 이용했다." 도현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대가 없는 친절이 얼마나 비틀린 것인지는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물론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푼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도현을 향한 것이 아니라 라딘을 향한 것이었다. " 그럼, 앞으로 전 어떻게 하면 되죠? 한동안 이 탑에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 데요." " 그 말 그대로다. 스위드가 충분히 제국과의 인연을 끊고 되돌아오겠다고 결심 할 때까지 너 역시 이곳에 함께 있어야 한다. 스위드가 스스로 이곳에 남겠다고 말한다면 그 순간부터 넌 자유다." 도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위드는 휘트린을 싫어하지만 휘트린은 스위드가 되돌아오기를 원한다. 스위드가 어떻게 해서 황제의 밑으로 들어갔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의 부관이 되어있었는지 도현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말해 주지 않는 사실을 억지로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사정이건 그것은 스위드의 사정인 것이고 도현은 라딘이 아니니 황제와 황태자를 증오할 이유는 없다. 단지 신의 보석을 눈앞에서 꺼내 도현의 몸에 그것이 들어가게 만든 사실만큼은 용서할 수 없지만, 그 보석 덕분에 마법이라는 것도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거짓말이다. 보석이 흡수되지 않았다면 도현은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포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휘트린에게 들은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너무 확실하게 느껴져서 괴로웠다. " 난 다른 건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요. 단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휘트린은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도현을 바라보았다. " 오랫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 되돌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 말에 절망한 것도 잠깐, 도현은 휘트린이 한 말에 섞인 한 단어를 되새겼다. "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 그럼, 나 말고도 또 있었다는 말인가요?" 휘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떤 이유로 균열이 생기는지는 모르지만 가끔씩 다른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곳에 오곤 했지.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 사람도 있었다." " 그럼...모두 저 같은 경우였나요...?" 도현은 절망을 애써 떨쳐버리려 노력하며 물었다. " 나도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곳에 온다는 것은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적어도 도현과 같은 경우를 당한 사람이 더 있다는 말에 안도해야 할 지 아니면 어느 누구도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해야 할 지 도현은 알 수 없었다.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어서 이 세상에 오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간절하게 염원해서 오게 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우연히 오게 된 것인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어떤 이유도 없이 낯선 세상에 떨어지고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 방법은 없나요....?" 예전에도 물었다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도현은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내가 알기로는 없다. 신이라면 알지 모르지만, 신은 이미 지상에서 떠났지." " 하하." 도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쌍둥이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꼈던 즐거운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도현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리자 휘트린은 말없이 도현을 다시 탑 꼭대기에 있는 방으로 되돌려보냈다. 소년이 느끼고 있을 절망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소년이 바라는 것은 휘트린으로서도 이루어줄 수 없는 바램이었다. 휘트린이 바라는 것은 이제 하나밖에 없었다. 오래 전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스위드 뿐이었다. 스위드는 바라지 않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그녀의 아들이 권력자들과 뒤얽혀 허리를 숙여야 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스위드가 그것을 바란다고 해도 휘트린은 결코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되돌아온 도현을 보고 스위드는 잠시 굳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휘트린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도현은 당장 삶을 포기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었다. 지친 듯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침대까지 걸어간 도현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자세로 누운 도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도현이 스위드에게 말을 건 것은 한시간은 족히 지난 후였다. " 스위드. 황태자에게 돌아갈 거야?"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서 도현은 이불에 가로 막혀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냥 이곳에 있으면 안돼?" 스위드는 갑자기 도현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거절의 말도 그렇다고 긍정도 하지 않았다. " 미안해. 돌아가고 싶은 게 당연하겠지. 괜히 물어봤어. 그냥 잊어 버려." " 제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말없이 도현의 말을 듣고 있던 스위드가 말하자 도현은 스위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운 자세로 고개만 돌리자 몸이 불편해졌지만 도현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 저를 신뢰합니까?" 도현은 스위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 어떤 경우에도 저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이번에는 스위드가 연달아 질문했다. 도현은 신뢰할 수 있냐는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쉽게 타인을 믿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을 겪고난 후에는 더욱 그 말이 낯설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 응." 도현은 짧게 대답했다. 불과 한 달 하고 조금 더 되는 시간동안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냈고,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인 것도 아니지만 스위드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 없는 확신이었지만, 도현은 대답했다. ------------- 스위드는 그 대답을 듣고 처음으로 미소지었다. 휘트린이 보여주었던 화사한 미소와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전혀 다른 것 같기도 한 미소는 무척 부드러웠다. " 그렇다면 저 역시 당신을 믿겠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채 스위드는 그렇게 대답했다. 단 한마디의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현은 그 말이 반드시 지켜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진실처럼 느껴지는 예감이었다. " 그래도 가끔은 좋은 일이 있구나...." 도현은 웃었다. 이곳에서 진심으로 웃어본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 다들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희망까지 버리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거든. 세상이 변했고, 나도 조금은 변했어. 좋은 일인 건지 나쁜 일인 건지는 아직 모르지만..." 도현은 중얼거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 언제 나와 함께 바다에 가자. 스위드." " 바다...?" 스위드가 되묻자 도현은 탑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작은 하늘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 아무래도 이 세상과 내가 원래 살던 세상은 바다로 연결되어 있나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처음 발견된 곳도 바다라고 했었고, 내가 사고를 당했던 것도 바다 위였으니까. 그곳에 가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르지. 금방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겠지만 나가게 되면 제일 처음에 바다에 가고 싶어." 창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맑았다. 마치 바다처럼. 세상 어떤 곳에 있어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시간은 흘러간다. 도현이 존재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그 동안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살아가는 이유를 도현은 조금씩 떠올리며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 세상에는 정말 신이라는 존재가 있나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잴 수도 없고, 그저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말이야."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도현의 독백을 스위드는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것은 대답을 필요로 해서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묻어둔 혼자만의 고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도현 역시 그랬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고향을 도현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같은 색의 하늘을 바라보며 떠올렸다. " 왠지 꿈같아......" 도저히 있어서도 안되고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던 것들이 존재하고, 마법이 존재하고, 마녀가 존재하는 낯선 세상. 지금 도현은 그 낯선 세상에서 반년도 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야 할 지 모른다. 마녀의 탑 꼭대기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바깥세상과 연결되어있다고 만족하면서 그렇게. "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할 줄 알았다면 좀 더 많은 것을 해 보는 건데...." " 아직 시간은 많습니다." " 그렇겠지...." 도현의 시선은 여전히 작은 하늘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면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도현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바래도 피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것도. " 나 잠깐만 쉴게."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예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일어서야 겨우 어깨 높이에 닿는 높은 창을 통해 도현은 조금 더 넓어진 시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 빛이 어느때보다 눈부셨다. 스위드는 그런 도현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제국에 얽매여 보낸 25년의 시간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페히너의 동반자로서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켰고, 그 후에는 케이스워크의 그림자가 되었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녀와 그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일한 나라 리카도 제국. 마녀에 의해 납치당했다가 목숨을 끊어버린 비운의 공주는 오래전 리카도 제국이 제국의 이름을 얻기 전 왕국이었을 때 실존했던 공주였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제국의 황실에는 마녀의 존재가 전해져 왔다. 태어난 이래 계속 탑에서 살아왔던 스위드가 처음으로 탑을 나간 것은 휘트린이 모종의 일로 황제와 만나던 때였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 대신 황제가 요구하는 부탁을 들어주곤 했고, 휘트린은 더 이상 자신과 말도 하려 하지 않는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황제와 만나는 자리에 스위드를 데려갔다. 그리고 황제는 그녀에게 스위드를 황궁에 머물게 하면서 그림자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휘트린은 스위드에게 의사를 묻고는 황궁에 아들을 남기고 탑으로 되돌아갔다.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자유의 몸이 된 스위드는 리카도 제국 황실에 머물면서 황제의 크고 작은 부탁을 들어주었다. 몸 속에 흐르는 진한 마녀의 피는 스위드에게 보통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힘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17년 전. 황제가 친구의 부인을 몇 번에 걸쳐 겁탈하고 그녀가 아이를 가졌을 때 황제는 태어날 아이에게 황가의 상징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은 황제 페히너의 마지막 부탁이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총명함을 일찍부터 드러내던 케이스워크가 스위드에게 손을 내민 것도 그때였다. 리카도 제국 황실에 비밀리에 보관되어온 신의 보석을 가져온 케이스워크는 그것을 스위드에게 보여주었다. 빛의 보석과 어둠의 보석. 어떻게 그것을 구해서 보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스위드는 자연스럽게 어둠의 보석에 끌렸고, 그것은 기다렸다는 듯이 스위드의 몸에 흡수되었다. 어둠의 보석을 얻은 이후로 스위드는 자발적으로 탑에 돌아가지 않는 한 휘트린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어떻게 보면 라딘이라는 존재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고, 의미를 주었다.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라딘과 관련되어 그의 가문이 몰락했고, 황제는 원하는 것을 얻었고, 스위드 역시 자유를 얻었다. 17년이 지난 지금 모든 것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어 주었던 라딘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지만 여전히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결코 우연만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서로 얽혔고 지금 이렇게 만난 것이라고 스위드는 생각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되돌아 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휘트린이 있는 탑으로 되돌아 온 것은 라딘과 같은 얼굴을 가진 다른 소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제까지나 제국에 얽매여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케이스워크는 스위드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 자유의 대가는 또 다른 구속에 지나지 않았다. 마녀의 피를 잇고, 어둠의 보석을 얻어 완전한 어둠의 힘을 손에 넣었지만 그래도 스위드는 항상 자유롭지 못했다. 처음 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스위드는 처음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난 기쁨이라는 감정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위드는 자신이 지닌 힘이 그것으로 얻은 자유가 결코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휘트린이 어째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외딴 장소에 탑을 짓고 살아왔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했다고 해서 스위드가 휘트린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지만, 스위드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들 속에 섞여 살면서 느끼는 고독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다시 탑으로 되돌아 왔을 때 예전처럼 너무 답답해서 한시라도 더 머물 수 없다고 여겼던 조급함이 되살아나지 않은 것은. "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스위드는 도현의 등을 응시하며 말했다. 호리호리하고 연약해 보이는 마른 등이었지만, 창 밖으로 펼쳐진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소년의 등은 결코 좁지 않았다. "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이 세상에는 녹아들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스위드는 말을 이었다. 왜 스스로의 의지로 이 소년을 선택했는지. 케이스워크에게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는지 이제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위드는 70년만에 처음으로 자신과 동류인 존재를 발견한 것이었다. " 이방인...." 도현이 등을 돌린 자세 그대로 중얼거렸다. " 이 탑은 세상의 시간과는 동떨어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모든 걸 잊고자 한다면 시간 속에 묻힌 채 영원히 숨어 지낼 수도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도 있겠지요." 스위드 역시 도현이 지금 서 있는 곳과 같은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탑 속에서 바라보던 세상은 실제와는 너무도 달랐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느낀 가장 큰 감정은 환멸이었다. 세상에 대한 환멸, 사람들에 대한 환멸,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 " 스위드. 나는 이방인이지만 잊혀진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도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의자에 앉은 채 도현쪽을 바라보고 있던 스위드와 시선이 마주치자 도현은 작게 미소지었다. " 나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 곳에 왔고, 다른 사람 취급을 당했고, 억지로 보석까지 얻었어. 그게 너무 억울해. 덕분에 돌아갈 가능성이 점점 더 줄어들어서 분해. 그러니까 절대로 잊혀지는 사람은 되지 않을 거야. 차라리 날 끌어들인 이 세상에 복수해주겠어." 도현은 다짐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스위드도 날 끌어들인 덕분에 탑에서 못 나가게 됐고, 나 역시 언제 돌아갈 수 있을 지 알 수 없게 됐어. 그러니까 이제 우리 둘은 공평해진 거야. 아니, 내 쪽이 좀 더 손해보는 느낌이 들지만." " 도현." " 그래도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걸로 만족하겠어. 다른 사람들이 날 멋대로 하지 못할 만큼 힘을 얻을 때까지는 이곳에서 조용히 지낼 거야. 그러니까 스위드는 날 도와 줘." " 저는 이제 당신 곁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도현은 미소지었다. " 황태자와 함께 있을 때 스위드는 별로 였어.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표정은 짓지 마." 스위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자 도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내가 나라는 걸 잊으면 안 된다는 거야. 한 번 세상에 태어난 이상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게 당연하잖아. 스위드는 원하는 대로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어?" 스위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는 건 쉬운 일 같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었어. 나는 이곳에 와서야 그걸 깨달았지. 원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왔지만 그걸 깨닫지도 못했었어.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가장 자유롭게 살고 있을 때 그걸 느끼지 못하지. 나도 그랬어." 도현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10년도 더 된 과거처럼 느껴지는 영상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원래 있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던 문명의 이기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시간들이야말로 정말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알았다. 도현은 활짝 웃는 얼굴로 스위드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 이제 시작이야." 스위드는 도현이 내민 손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을 겹쳤다. 손바닥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스위드는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무언가가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아주 미약한 움직임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변화의 시작이었다. Hidden Part. Restart " 도현아, 오늘은 좀 어때?" 불안한 표정이 많이 사라진 라딘은 그래도 여전히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채현을 바라보았다. 몸은 이제 완전히 나았지만 아직 입이 제대로 열리지 않아서 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집에만 붙어 있는 동생을 채현은 평소보다 배는 더 집에 들어오는 시간을 늘려가며 보살폈다. " 아...누나." 라딘은 겨우 익힌 간단한 단어 중 하나를 떠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곳의 언어는 너무 복잡하고 생소해서 문자를 통해 글을 익히는 것은 아직 무리였고, 채현이나 기현이 직접 물건이나 사물을 가리키며 끈기 있게 설명해 준 결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몇몇 단어는 익히게 되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처음 보는 낯선 세상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라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애정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처음 정신을 차리고 낯선 것들로 가득한,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말을 거는 가족과 만났을 때 라딘이 느낀 것은 혼란과 두려움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곳이 원래 라딘이 있던 세상이 아니라는 것도, 얼굴은 똑같지만 이곳에 있는 가족이 실제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라딘을 증오하지 않고, 냉대하지 않는다. 이미 오래 전에 죽어서 기억에 그다지 남아있지 않은 부모님은 일이 바빠서 밤에만 얼굴을 볼 수 있지만 늘 라딘에게 온화한 표정과 애정어린 말투로 말을 걸어주었고, 채현은 직접 음식을 만들어 주거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며 가장 오랜 시간 라딘의 곁에 있어주었다. 그리고 기현. 테이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눈동자 색이 다른 형은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비록 예전과 다름 없이 거의 방에서 나가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라딘을 가둬놓지 않았고, 라딘 역시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절대로 깨어나고 싶지 않다고 여길 정도로 현실은 달콤했다. " 오늘은 오빠가 함께 밖에서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어. 준비하고 나가자. 네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잔뜩 먹을 수 있게 해 줄게." 라딘은 채현이 한 말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외출한다는 이야기는 알아 들었다. 채현은 즐거운 표정으로 옷장 문을 열고 도현이 입을 만한 옷을 코디해서 꺼내놓았다. " 자, 나도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너도 이 옷으로 입어." 채현이 방에서 나가고 나자 도현은 침대 발치에 놓인 옷을 들어 올렸다. 베이직한 면바지에 깔끔한 T셔츠였다. 원래 라딘이 살던 곳과는 옷도 종류가 많이 달랐지만 라딘은 그것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옷감은 상당히 부드럽고 편했다. 라딘은 옷을 다 입고 나서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하던 안색은 어느 정도 보기 좋게 바뀌었고, 오랜 침대 생활로 말랐던 몸도 정상적으로 보일 만큼 살이 올랐다. 그래도 보통 사람에 비하면 말라 보였지만 라딘은 생기 있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다. 책에서나 존재하리라 여겼던 행복이라는 것을 라딘은 뜻하지 않은 때,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맛보고 있었다. 지난 17년간의 시간은 라딘에게 있어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악의 섞인 말들이 쉴 새 없이 귓가에 들려오고, 따갑게 훑어 내리는 시선이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족의 시선 역시 무관심 아니면 경멸밖에 없었다. 따뜻함이라는 것, 애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라딘은 알지 못했다. 낡은 저택의 방에 틀어 박혀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낼 뿐인 매일매일. 살아있는 것이 고통으로 여겨질 만큼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날이 갈수록 마음속을 채우는 것은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열망,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외침뿐이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깨어있을 때. 자신이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였다. 네가 그런 모습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 가문은 몰락했다. 네 존재 자체가 불운을 불러왔다. 너는 좀 더 고통받아야 해. 이걸로는 부족해. 절대로 벗어날 수 없어.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 속에 빠진 것처럼 무거운 말들이 온 몸을 옭아매고 라딘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증오 받을 거라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라딘은 항상 생각했다. 하루 중에 가장 편한 시간은 잠이 들 때였다. 악몽만 꾸지 않는 다면 잠은 라딘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가능하면 깨어나지 않고 계속 잠들어 있기를 바랄 만큼. 그러나 아침마다 저절로 눈이 뜨이고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 라딘을 일깨울때마다 라딘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져 몸을 떨어야 했다. 아무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칼을 쥐고 손목을 그었다. 칼을 쥔 순간은 걷잡을 수 없이 손이 떨렸지만 그 차가운 칼날이 피부 위에 닿는 순간, 격렬한 떨림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라딘은 망설임 없이 손목을 그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는 모르지만 한번에 힘줄을 끊고 칼날은 깊이 손목에 파고 들었다. 눈앞이 새하얘지는 감각과 함께 손목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라딘은 침대에 누운 채 손목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을 눈을 감은 채 느끼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라고. 이 몸을 채우고 있던 죄악으로 가득한 피가 모두 빠져나가면 모두 끝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테이드가 찾아왔다. 그렇게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테이드가 이상하게도 무슨 예감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라딘의 방을 찾아왔다. 그리고 절대 너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더욱 고통받아야 한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절망이 라딘의 몸을 감싸 안았다. " 도현아. 준비 다 됐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어느새 채현이 방문을 열고 말을 걸고 있었다. " 응, 누나." 아직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라딘은 채현에게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 가자." 채현을 따라 집을 나서 택시에 올라탔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진 도로에는 말이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괴한 형상의 탈것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는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놀랐지만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다. 이곳에서는 말이나 마차 대신에 차라고 불리는 것을 타고 다닌다고 했다. 속도는 상당히 빨랐지만 거의 흔들림이 없는 신기한 탈것이었다. 택시는 20분 정도를 달려 번화가를 지나쳐 높은 빌딩이 즐비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풍스러운 영어 간판이 걸려있는 건물 앞에 멈춰섰다. " 내리자." 채현은 돈을 지불하고 내려섰다. 라딘은 사각형으로 높이 올라간 회색 빌딩숲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자신이 낯선 세상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무엇하나 전할 수 없었지만 기현과 채현은 라딘을 가족으로 받아 주었다.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 2층에 있는 문을 열자 양복 차림의 웨이터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 일행께서는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창가 자리에 있는 4인석 테이블에 기현이 앉아 있었다. " 아, 어서 와." 기현은 웃으며 두 명의 동생을 반겼다. 라딘과 채현이 의자에 앉고 나자 기현은 메뉴판을 펼치며 물었다. " 뭐 먹을래?" 메뉴판을 읽을 수 없는 라딘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저...." " 오빠가 맛있는 걸로 추천해 줘. 우선 가벼운 샐러드랑 이 집 스테이크가 괜찮았지? 아니면 랍스터 어때?" 채현과 기현은 이것 저것 라딘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며 음식을 골랐다.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진짜 가족처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라딘은 그 따뜻한 원 안에 자신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도현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기현과 채현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라딘을 보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라딘은 아니라고 말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다.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모두 자신을 인정해준다는 것. 따뜻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 머문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지 라딘은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나 작고 사소한 것이었는데,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따뜻하게 미소지어 주기를.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랬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라딘이 바래왔던 것은 전혀 다른 곳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라딘은 이제 두 번 다시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 원래 세상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낯선 이 곳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기현이 운전하는 차안에서 라딘은 잠이 들었다. 채현은 잠든 동생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고 나서 운전석에 있는 기현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 오빠, 도현이는 이제 천재는 아닐 지 모르지만 동생이라는 느낌이 들어." " 그 동안은 동생이 아니었어?" " 아니, 그게 아니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인데도 어린 동생이라는 느낌보다는 천 재라는 게 더 와닿았거든. 하지만 이제는 정말 동생 같아." " 천재 동생도 좋은데, 나는." 기현은 정면을 바라보며 웃었다. " 천재가 아니더라도, 기억이 없어졌어도 우린 가족이고 도현이는 우리 동생이야. 그건 변하지 않아." 기현이 덧붙인 말에 채현은 엷게 웃으며 응 이라고 대답했다. 다시 시선을 돌리자 정말 편안한 듯한 표정으로 채현의 다리를 베고 있는 도현의 옆얼굴이 보였다. " 맞아, 우린 가족이야." 채현의 목소리는 잠든 라딘의 귓가에 희미하게 울렸다. Part 9. Say Good-bye 탑 꼭대기에서 지상을 내려다 보기만 하다가 이렇게 탑을 올려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탑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높았다. 아무래도 10층이 아니라 20층 정도 되는 높이로 보였다. 한참 동안 탑을 올려다보던 도현은 문득 뒤를 돌아보며 자연스럽게 뒤에 서 있던 스위드에게 말을 걸었다. " 바다에 가자." " 이전에 말했었죠." 스위드가 대답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이곳에서 내 시작은 바다니까. 바다를 보러 가는 거야.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답답한 일이 있을 때는 탁 트인 바다를 보며 마음을 풀잖아.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 거지." 작게 웃어 보인 도현은 이제는 익숙해진 감각으로 빠르게 주문을 읊조렸다. 온 몸을 감싸는 흐름이 느껴지며 바닥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도현은 자신이 처음 발견되었다던 대륙 남단에 위치한 해안가에 서서 저편을 바라보았다. 넓게 펼쳐진 바다는 작게 일렁이며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건너편에 작은 섬 몇 개가 떠 있었지만 그곳은 결코 도현이 돌아가야 할 장소는 아니었다. 차라리 눈에 보이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돌아가야 할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 형!] [ 누나!] 도현은 입가에 두 손을 모으고 큰 소리로 외쳤다. [ 엄마! 아빠!] 들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닿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한 번 쯤은 큰 소리로 불러보고 싶었다. [ 나 여기 있어!] 도현은 오랜만에 한국어로 외치고 있었다. 한동안 소리치던 도현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조용히 도현의 뒤를 지키던 스위드와 무표정하지만 감정을 담아 흔들리는 녹색 눈으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도현을 응시하며 다가오는 테이드의 모습이었다. " 돌아가자." 먼저 말을 건넨 것은 테이드였다.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고, 좋은 기억을 준 적은 거의 없었지만 테이드는 바로 오늘 아침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 테이드. 어떻게 알았어?" 도현은 처음으로 테이드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 그냥 발길이 닿는 곳으로 가다 보니 여기에 와 있었다." 테이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현이 그렇게 사라지고 난 후 어느 곳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황태자의 능력으로도 도현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고, 황태자의 수족과 다를 바 없던 스위드 역시 그 이후 모습을 감췄다. 라딘이 도망치려 했던 바다에 이른 것은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예전에 해안가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라딘을 발견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지만, 이곳은 테이드에게도 그리운 장소였다. 바닷가에 이르러 넓은 물결을 바라보다가 그곳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을 때, 테이드는 놀랐다. 결코 이곳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두 개의 얼굴이 테이드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끓어오르는 듯한 격정은 없었다. 대신 테이드는 라딘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 돌아가자, 라딘." 여전히 눈동자 색만 다른 기현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진지하게 도현을 바라보는 테이드는 정말 형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테이드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 내가 갈 곳은 거기가 아니야." 도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테이드는 그 표정을 보고 처음으로 낯선 감각을 느꼈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분명 동생인 라딘이었지만 동시에 완전한 타인이었다. " 내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지만 적어도 당신 곁은 아니야, 테이드." 도현은 테이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테이드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동생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예전에 이 바닷가에서 쓰러져 있던 라딘을 발견하고 발목을 부러트려 저택으로 데려갔던 그 날 이래로 라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소리지르고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끊임 없이 스스로를 부정했다. 하지만 라딘은 어떤 순간에도 눈빛에 담긴 의지를 잃지 않았다. 지금도 역시 라딘의 눈은 무언가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예전에는 없었던 눈동자에 담긴 그 빛이 테이드에게 낯선 감각을 느끼게 만들었다. " 스위드." 도현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스위드를 불렀다. " 이제 돌아가자. 이걸로 충분해." 스위드는 일정한 보폭으로 발을 내딛어 도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테이드의 표정이 흔들렸다. " 내 형은 저 바다 건너편에 있어. 당신은 아니야. 테이드." 생각보다 훨씬 담담하게 그 말을 건넬 수 있었다. 도현은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테이드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보여주고 나서 입 속으로 낮게 주문을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른 모래 위에 선명한 마법진이 떠오르고 마법진에서 피어오른 빛이 도현과 스위드의 몸을 감쌌다. 테이드는 손을 뻗었지만 도현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도현과 스위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테이드는 바닥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는 마법진의 흔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래 위에 새겨져 있던 마법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바닷가는 적막에 휩싸였다. 원래 처음부터 테이드 말고는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라딘을 놓쳐버리고 나자 마음 한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금방 사라져 버렸다. 이제 더 이상 라딘은 테이드의 것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채 떨고 있던 작은 소년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강한 눈동자로 직시하는 타인의 얼굴. " 라딘...." 테이드가 내뱉은 이름은 곧 바람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바다는 낮게 일렁이며 끊임없이 흔들렸다. 테이드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백사장의 모래를 쥐었다. 허리를 펴고 먼바다를 응시하며 손을 뻗자, 손가락 사이로 가느다란 모래가 스르륵 빠져나가 흩어졌다. " 그걸로 만족합니까?" 스위드는 이제 버릇처럼 창 밖을 내다보는 도현에게 물었다. 바닷가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도현은 계속해서 창 밖을 내다보며 선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스위드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있던 도현은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 스위드야 말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 스위드는 이곳에 돌아온 이후로 단 한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던 케이스워크의 얼굴을 떠올렸다. 때로는 현명하고, 때로는 영악하고, 때로는 잔인하고, 때로는 속을 알 수 없지만 케이스워크는 스위드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위드는 이제 케이스워크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스위드의 이 결심으로 인해 케이스워크와의 관계가 틀어진다고 해도. " 사람은 동류끼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도현은 작게 웃었다. 바다를 보고 왔는데도, 테이드에게 이별을 고하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시원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가득 쌓여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이 낯선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피부에 와 닿았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의연하게 서 있지만, 사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무너져 내릴 것처럼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존재가 생겼는데도, 누구에게도 쫓길 필요도 없고 어느 누구도 도현에게 다른 누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는 장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 밑이 꺼진 것처럼 불안했다. 사람에게 가장 깊은 안도감을 주는 것은 고향이라는 단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언젠가는 돌아갈 장소가 있다는 사실. 그 사실 때문에 사람은 고난을 이겨내고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몸을 쉴 수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도현에게는 이제 그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어쩌면 같은 하늘로 연결되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두고 와 버렸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이 세상에서 도현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 지금은 잊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 비참해지니까.] 도현의 중얼거림을 들었지만 스위드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얼마 전 바닷가에서 외쳤던 그 낯선 언어였다. 이제 정말 작별을 고해야 할 순간이 왔다. 이곳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 앞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작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현은 먼 하늘을 응시하며 몇 시간동안 지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늘의 빛깔이 붉게 물들고 저편에서부터 검은 장막이 드리워질 무렵이 되었을 때 도현의 어깨에 닿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스위드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는 검은 드레스 차림의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 휘트린." " 네게 이곳에서 안주할 자리를 주마." 휘트린은 마치 도현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도현은 휘트린의 깊고 고요한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 너만 그렇게 되길 원한다면 이곳에서 네 어머니가 되어 주겠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도현은 깜짝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스위드가 있을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꼭대기 방안에 남아있는 것은 도현과 휘트린 뿐이었다. " 날 완전히 믿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사람은 기댈 것이 필요하지.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다면 무너지기 마련이다." 휘트린은 도현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도현 스스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무언가를 그녀는 확실하게 잡아낸 것이다. " 난 마녀다. 나는 시간과 더불어 이곳에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게 있어 너는 스쳐 가는 바람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네가 쉴 수 있는 나무가 되어 줄 수는 있다." 휘트린은 마녀인데다가 스위드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였지만, 결코 스위드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한 그녀를 도현은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는 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이곳에 납치하는 듯한 형태로 도현을 데려온 것도 그녀고, 스위드를 불러들이기 위해 도현을 이용했다고 말했지만 그녀에게 적대감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곳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지만 느낄 수 없는 자연처럼 그렇게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고마워요." 도현은 미소 띈 얼굴로 대답했다. " 언젠가 이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더라도 잊지 않을게요." 휘트린은 남은 한 손 역시 도현의 어깨 위에 올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이 도현의 이마 위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선명하게 시야를 채우던 휘트린이 사라지고 나자 서재쪽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스위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휘트린과 스위드 모자는 이상한 관계였지만 도현은 그들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도현에게 있어 휘트린은 아름답지만 신비한 마녀였고, 스위드는 이상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는 완전히 어둡게 변해버린 하늘이 펼쳐진 창문 앞에 도현과 스위드는 서로를 마주보며 서있었다. " 힘을 시험해 보겠습니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않다가 어느 순간 스위드가 입을 열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위드의 이마에 복잡하게 얽힌 검은 문양이 떠올랐다. 회색 눈동자가 나른하게 젖어들고 스위드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도현의 이마에도 역시 복잡하게 뒤얽힌 흰색 문양이 떠올랐다. 마치 빛과 어둠을 상징하기라도 하듯이 서로 상반되는 색을 가진 그것은 선명하게 색을 더하며 각자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도현은 온 몸에 퍼져 가는 열기를 느꼈다. 예전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열기였지만 지금은 적당하게 몸을 이완시켜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밝게 변하고 온 몸에 힘이 충만하게 차 올랐다. 보석의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마법을 사용할 때 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도현은 보석의 힘이 이끄는 대로 모든 것을 맡긴 채 기묘한 회색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스위드를 직시했다.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바닥에 은을 녹여 부은 듯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탑의 바닥 전체가 은빛으로 물들기 직전 은색 마법진 위에 겹치듯이 검은색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서로 겹쳐진 두 개의 마법진은 정신없이 얽힌 매듭이 되어 기묘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대륙의 오지에 위치한 검은 마녀의 탑 꼭대기에서 번개와도 닮은 빛이 새어나왔다. 일순간 어둠에 물든 하늘을 환하게 뒤바꿀 만한 빛이 새어나왔지만 그 빛은 숲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빛이 사라지고 나자 숲은 다시 고요한 침묵에 감싸였다. 숲 중앙에 높이 솟은 탑은 밤의 어둠 속에 녹아들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 검푸른 바다 너머 Fin> ============================================================ 넵, 이것으로 신의 보석 시리즈...라고 불러야 할까요;; 여하튼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 검푸른 바다 너머가 끝났습니다. 엔딩이 이상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검푸른 바다 너머는 도현이 낯선 세상에 와서 그 세상을 조금씩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까지였습니다. 그 동안 커플이 누군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원래 처음부터 검푸른에서는 제대로 된 커플이 안 나옵니다. -0- 죄송합니다.;;;; 검푸른은 결국 전체 이야기에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전초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장편에 손을 대니 참 기분이 묘합니다. 원래 장편파이지만;;; 조금 쉬고 나서 2부를 시작할 예정인데요. 아직 제목을 못 정해서 고뇌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첼시피온과 버림받은 황태자님이 먼저 나오겠습니다. 시간 배경도 검푸른에서 약간 시간이 흐른 후가 됩니다. 2부는 격렬하고(?), 복잡하고(??), 액션이 난무하며(???), 피가 튀는(?!) 이야기가 될 예정입니다. 어디까지나 예정(!!)입니다. 그 동안 검푸른 바다너머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선선한 가을에 다시 되돌아 올 것을 약속 드립니다.